먼 타국에서 찾은 것은… 원시 세상인가 자신의 뿌리인가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3. 11. 1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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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자,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
한국 최초 누드 퍼포먼스 등 현대미술사 큰 족적
50년 작품활동… 창작 위한 끊임없는 도전의 삶
“미친 짓” “이게 전시회냐” 당대 외면당했지만
하늘의 별이 된 지금… 작품세계 재평가 활발
12월 30일까지 회고전… 회화 연작 집중 조명
네 팔로 그물 짜며 자유 추구 여인 그린 ‘거미’
한복 치마폭이 거대한 산 이룬 ‘유한한 인생’ 등
이국 경험에 상상력 입혀 특유 회화세계 구축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는 말은 옛날 얘기. 예술은 순간에도 존재해 온 우리들의 행위,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 한순간 피었다 지는 것. 인생은 이에 비하면 오히려 너무 길고 지루해요.” 1968년 6월9일, 만 26세의 정강자(1942∼2017)가 한 말이다.

정강자는 한국 최초로 누드 퍼포먼스를 선보인 작가이자 여성이다. 우리 현대미술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1960∼70년대 한국 실험미술의 전개에 크게 기여했다. 다만 그를 바라보는 당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행보가 파격일수록 경박한 수식어가 따라붙었고, 언행이 솔직할수록 일각에서는 비웃음을 샀다.
‘거미’(1995)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제공
정강자는 1970년대 중반 결혼 후 싱가포르로 이주하여 수년간 국내 화단을 떠나 있었다. 1980년대 초 귀국해 공간미술관(현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인도네시아 염색 기법 ‘바틱’을 접목한 회화 연작을 선보였으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미술계 사람들은 이후로도 오래도록 그를 잊었다.

지나고 나면 삶이란 늘 안타깝도록 짧다. 정강자의 인생 또한 미술사의 큰 궤적 속 찰나의 시간이니 말이다. 정강자는 1967년 등단해 2017년 타계하기까지 50년 작품인생 내내 예술을 자신 삶의 목적이라 여기며 창작활동을 지속했다. 시대로부터 외면당해도, 남으로부터 정당한 평가와 인정을 받지 못해도 자신 스스로 작가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 누가 나의 작품을 쓸어 버렸는가? - ‘무체전’ 전후

정강자가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7년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을 통해서다. 현재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시에 선보이고 있는 작품 ‘키스해줘요’(1967)가 당시 데뷔작이다. 여러 출품작 중에서도 그의 작품이 특히 주목받았다. 정강자가 쓰길 “나는 연립전에서 제일 어린 꼬마였는데 내 작품만 연신 ‘매스콤’을 타게 되어 선배들에게 미안했다”고 한다. “작품이 MBC 텔레비전에 나가게 되어 작품을 손으로 만지는 장면에서 나는 완전히 노동자의 손으로 변한 터진 손을 감추려다 핀잔을 받곤 했다”는 회상이다.

‘청년작가연립전’은 당시 기성화되어 가던 한국 앵포르멜 회화에 저항하는 연합전으로서, 우리 미술사 속 주요하게 회자되는 해프닝과 이벤트를 다수 선보였다. ‘오리진’, ‘무(無)동인’, ‘신전(新展)동인’ 소속 작가들이 해당 연합전에 참여했다. 세 동인은 공통적으로 ‘반(反)회화’ 기조를 내세웠지만 추구하는 형식과 세대적 측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그중 정강자, 강국진, 양덕수, 심선희, 김인환, 정찬성 등이 이끈 신전동인은 가장 젊고 급진적인 이들로서 ‘반(反)예술’을 외치며 파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정강자를 바라보는 당대의 시선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정강자, 강국진, 정찬승은 1968년 ‘투명풍선과 누드’를 비롯해 다수의 진보적 해프닝을 전개했는데 그에 대해 신문이 다음처럼 썼다. “지난여름의 해프닝 ‘투명풍선과 누드’서 나체가 됐던 정강자양이 땅속에 묻혀 물총세례를 받고 있다. … 이 수상한 예술행위(?)를 시종 지켜보던 10여 명의 관중과 40여 명의 기자들은 날씨도 추운데 이 무슨 미친 짓이냐는 표정.” 그때만 하더라도 정강자는 세상의 반응을 비관하지 않았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전시 전경. 왼쪽부터 ‘숲 속을 부유하는 여인’(2010), ‘사막의 풍경’(1995), ‘숲에서의 오수’(2004)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제공
1970년, 그의 첫 개인전 ‘무체전(無體展)’이 강제 철거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전시는 1970년 8월20일부터 24일까지 국립공보관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다. 드라이아이스로 피운 연기 속 사이렌이 울리고, 그에 놀라 부산하게 움직이는 군중의 상황을 연출하는 전시였다. 둘째 날인 21일에는 ‘무체는 예술로 가능한가’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예정했고, 22일에는 판토마임, 23일에는 정강자가 역시 몸담은 ‘제4집단’ 공동발표가 있을 계획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비로소 ‘무체에서 유체로…’라는 제목의 폐막행사를 치를 것이었다. 그러나 전시는 개막 이튿날 강제로 막을 내려야 했다. 공보관은 “이런 전시회는 보다보다 처음”이라며 암흑 장막과 기체, 사이렌의 조합을 의뭉스럽게 여겼다. “공보관 측의 완강한 철거 명령에 힘없는 내가 어쩔 수 있겠는가? 여기도 벽, 저기도 벽, 온 사방이 벽이다.”

같은 해 ‘한국미술대상전’에는 거울 500장을 미술관 바닥에 깔아 두는 설치작품을 출품했다. 일주일의 전시 기간 관객들이 거울을 밟아 부서지도록 하는 것이 작업의 핵심이었다. 안전을 위해 뒷면에는 광목천을 배접했다. 개막일에 작품을 확인한 작가는 예상보다도 무척 멋지게 되었다고 스스로 기뻐했단다. 그러나 다음 날 작품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미술관 측에서 거울 조각을 모조리 쓸어 쓰레기통에 넣은 것이다. 당시를 회고하며 작가가 쓴 문장들이 처절한 울부짖음 같다. “누가 나의 작품을 보았는가? 누가 나의 작품을 밟았는가? … 누가 나의 작품을 쓸어 버렸는가? 나는 왜 무엇 때문에 통곡하는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

최근 그의 작품세계를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거듭되고 있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이 11월15일부터 12월30일까지 여는 전시 ‘정강자: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초기 활동에 비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정강자의 회화 연작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자리다. 전시는 정강자가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제작한 회화 40점을 선보인다. 이국의 낯선 풍경과 모국의 전통 도상이 혼재하는 시기이자, 말년 화면을 장식하는 원과 반원 등 기하학적 도형이 나타나는 궤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요한 전환기다.

막연한 고독과 방황의 시기를 견디어 내던 1970년대 중반, 정강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두 아이를 얻었다. 1980년대 이후 온전히 회화로 전향한 정강자는 세상을 떠나기까지 40여년간 수많은 회화작품을 남겼다. 1987년부터 1990년에 걸쳐 그는 중남미와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등 세계 각국을 여행했다. 문명이 닿지 않은 원시세계 안에서 “특정 시대와 삶의 한계를 초월한 인간상”을 마주하기를 꿈꾸었다.
‘무제’(1997)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제공
1990년대 중반 정강자는 이국에서의 시각 경험에 상상력을 덧대어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특유의 화면을 구축했다. ‘거미’(1995)의 화면 중앙에 자리한 여인은 바삐 움직이는 네 개의 팔로 연약한 그물을 짜낸다. 거미는 가느다란 줄을 타고 자신의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삶의 노동 가운데 몽상의 순간을 일구어내는 여인의 도상은 ‘뜨개질로 우주를’(1996)의 화면 위에서도 발견된다. 찬란한 색채의 물소와 사자가 곁을 지키는 사이 뜨개질로 짜낸 촘촘한 우주 위에 갖가지 행성이 떠오른다. ‘무제’(1997) 등 화면에 나타나는 야누스의 양면적인 얼굴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의 흔적을 내비치기도 한다.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정강자의 화폭에는 한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도상이 자주 등장한다. ‘한복과 밤의 풍경’(1998)이나 ‘무제’(1997)에 등장하는 한복 치마의 형상이 대표적이다.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바다 건너 타국으로 떠나 발견한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뿌리였을까. 스스로를 진정 해방하는 열쇠는 결국 자신 안에 내재하여 있던 것인지 모른다.

‘유한한 인생’(2000), ‘무제’(2000년대) 등의 화면에 이르러 한복의 치마폭은 더욱 거대한 산을 이룬다. 오랜 세월 여성의 가슴을 옥죄어 온 치마끈은 자유롭게 흩날리다 하늘 위 어디로 향하는 먼 길을 내어 주기도 한다. ‘숲 속을 부유하는 여인’(2010) 등 2000년대 중후반의 화면에서는 구체적 형상을 기하학적인 원과 반원의 형태로 환원하고자 하는 조형적 실험이 돋보인다. 해당 화면과 ‘사막의 풍경’(1995)은 유사한 구도 및 색채로 제작되었으나 면 구성법이 명확하게 대조되어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난다.
‘유한한 인생’(2000)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제공
“내 삶의 좌우명은 끝없는 도전이다. 나의 완성을 위한 도전이다. 그것은 비록 미완성으로 끝나겠지만 끊임없는 도전은 삶의 의미이다.” 1990년 5월 정강자가 자신의 에세이 머리말로 적어 넣은 글귀다. 뒤이어 그는 이렇게 썼다. “꿈과 이상은 항상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곤 했다.”

정강자에게 여행이란 작품의 소재를 찾아 떠난 도전이었고, 환상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던 작가는 어느덧 태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각박한 날들로부터 가장 먼, 그림 속 공간처럼 무한한 자유의 세계를 향하여. 그토록 그리던 순수한 원시의 세상을 향해서다.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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