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타국에서 찾은 것은… 원시 세상인가 자신의 뿌리인가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한국 최초 누드 퍼포먼스 등 현대미술사 큰 족적
50년 작품활동… 창작 위한 끊임없는 도전의 삶
“미친 짓” “이게 전시회냐” 당대 외면당했지만
하늘의 별이 된 지금… 작품세계 재평가 활발
12월 30일까지 회고전… 회화 연작 집중 조명
네 팔로 그물 짜며 자유 추구 여인 그린 ‘거미’
한복 치마폭이 거대한 산 이룬 ‘유한한 인생’ 등
이국 경험에 상상력 입혀 특유 회화세계 구축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는 말은 옛날 얘기. 예술은 순간에도 존재해 온 우리들의 행위,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 한순간 피었다 지는 것. 인생은 이에 비하면 오히려 너무 길고 지루해요.” 1968년 6월9일, 만 26세의 정강자(1942∼2017)가 한 말이다.
지나고 나면 삶이란 늘 안타깝도록 짧다. 정강자의 인생 또한 미술사의 큰 궤적 속 찰나의 시간이니 말이다. 정강자는 1967년 등단해 2017년 타계하기까지 50년 작품인생 내내 예술을 자신 삶의 목적이라 여기며 창작활동을 지속했다. 시대로부터 외면당해도, 남으로부터 정당한 평가와 인정을 받지 못해도 자신 스스로 작가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 누가 나의 작품을 쓸어 버렸는가? - ‘무체전’ 전후
정강자가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7년 열린 ‘청년작가연립전’을 통해서다. 현재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시에 선보이고 있는 작품 ‘키스해줘요’(1967)가 당시 데뷔작이다. 여러 출품작 중에서도 그의 작품이 특히 주목받았다. 정강자가 쓰길 “나는 연립전에서 제일 어린 꼬마였는데 내 작품만 연신 ‘매스콤’을 타게 되어 선배들에게 미안했다”고 한다. “작품이 MBC 텔레비전에 나가게 되어 작품을 손으로 만지는 장면에서 나는 완전히 노동자의 손으로 변한 터진 손을 감추려다 핀잔을 받곤 했다”는 회상이다.
‘청년작가연립전’은 당시 기성화되어 가던 한국 앵포르멜 회화에 저항하는 연합전으로서, 우리 미술사 속 주요하게 회자되는 해프닝과 이벤트를 다수 선보였다. ‘오리진’, ‘무(無)동인’, ‘신전(新展)동인’ 소속 작가들이 해당 연합전에 참여했다. 세 동인은 공통적으로 ‘반(反)회화’ 기조를 내세웠지만 추구하는 형식과 세대적 측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그중 정강자, 강국진, 양덕수, 심선희, 김인환, 정찬성 등이 이끈 신전동인은 가장 젊고 급진적인 이들로서 ‘반(反)예술’을 외치며 파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한국미술대상전’에는 거울 500장을 미술관 바닥에 깔아 두는 설치작품을 출품했다. 일주일의 전시 기간 관객들이 거울을 밟아 부서지도록 하는 것이 작업의 핵심이었다. 안전을 위해 뒷면에는 광목천을 배접했다. 개막일에 작품을 확인한 작가는 예상보다도 무척 멋지게 되었다고 스스로 기뻐했단다. 그러나 다음 날 작품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미술관 측에서 거울 조각을 모조리 쓸어 쓰레기통에 넣은 것이다. 당시를 회고하며 작가가 쓴 문장들이 처절한 울부짖음 같다. “누가 나의 작품을 보았는가? 누가 나의 작품을 밟았는가? … 누가 나의 작품을 쓸어 버렸는가? 나는 왜 무엇 때문에 통곡하는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
최근 그의 작품세계를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거듭되고 있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이 11월15일부터 12월30일까지 여는 전시 ‘정강자: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초기 활동에 비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정강자의 회화 연작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자리다. 전시는 정강자가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제작한 회화 40점을 선보인다. 이국의 낯선 풍경과 모국의 전통 도상이 혼재하는 시기이자, 말년 화면을 장식하는 원과 반원 등 기하학적 도형이 나타나는 궤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요한 전환기다.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정강자의 화폭에는 한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도상이 자주 등장한다. ‘한복과 밤의 풍경’(1998)이나 ‘무제’(1997)에 등장하는 한복 치마의 형상이 대표적이다.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바다 건너 타국으로 떠나 발견한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뿌리였을까. 스스로를 진정 해방하는 열쇠는 결국 자신 안에 내재하여 있던 것인지 모른다.
정강자에게 여행이란 작품의 소재를 찾아 떠난 도전이었고, 환상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던 작가는 어느덧 태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각박한 날들로부터 가장 먼, 그림 속 공간처럼 무한한 자유의 세계를 향하여. 그토록 그리던 순수한 원시의 세상을 향해서다.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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