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외 선생님과 사랑에 빠진 18살…11년간 총각 행세했다는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성수영 2023. 11. 1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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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의 선구자'
에두아르 마네(1832~1883)
그의 사적인 이야기
화실에서의 점심식사(1868). 뒤쪽의 여인은 아내, 앞의 청소년은 아들이 모델이지만 어딘가 분위기가 어색하고 사람들의 눈빛이 공허하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먼 나라에서 온 스물한 살의 피아노 과외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 열여덟 살 청춘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두 남녀는 머지않아 부모님의 눈을 피해 비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선생님이 학생의 아이를 갖게 된 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완고하고 엄격한 데다 유달리 남의 눈을 의식하는 아버지는 절대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 게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의 도피를 하자니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남자는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일단 엄마가 어떻게든 해 볼게. 그리고 상황을 좀 보자꾸나.” 그렇게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예비 며느리와 손자가 살 집을 마련해 줬습니다. 손자는 며느리의 호적에 사생아로 올렸습니다. 남자는 만삭의 여자에게 눈물지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꼭 성공해서 빨리 독립할게. 그러면 우리, 멋진 결혼식을 올리자.”

1년, 2년, 3년…. 세월은 계속 흘렀습니다. 아이는 태어나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가 사는 집을 찾는 남자의 발길은 점점 뜸해졌습니다. 일하느라 너무 바빠서, 갑자기 몸이 아파서, 급한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하는 이유가 늘어나는 만큼 이들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남자의 사랑이 식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성공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일은 좀처럼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11년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가족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져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남자,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사고뭉치 아들, 화가가 되다

마네 부부의 초상(1860). 완고한 아버지의 성격과, 수완 좋으면서도 남편의 눈치를 보는 어머니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오르세미술관

마네와 어머니에게도 이렇게까지 했던 나름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지금도 혼전 임신은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예전에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게다가 마네는 프랑스의 유력한 가문 출신. 그의 할아버지는 법조인 출신으로 지방 도시의 시장을 지낸 유명 인사였습니다. 아버지는 존경받는 판사였고요.

하필 아버지가 주로 담당했던 건 이혼 소송과 친자 확인 소송 등 가족과 관련된 민사 재판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아들이 혼전 임신 스캔들을, 그것도 사회적 계급이 낮았던 외국인 여성과 벌였다는 건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엄청난 지탄을 받을 만한 일이었지요. 아버지의 직업조차 위험해질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사실 마네가 사고를 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화가가 되겠다”고 한 것부터가 그랬습니다. 마네의 아버지는 소위 ‘화가라는 녀석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법원으로 걸어서 출퇴근하는 길에 미술학교가 있었으니까요. ‘지저분하고, 공공질서를 밥 먹듯이 어기고, 학교 앞에서 매일 술이나 마시는 지저분하고 한심한 사람들.’ 마네의 아버지가 화가에 대해 가진 인상은 이랬습니다.

그러니 대를 이어 법조인이 될 줄 알았던 마네가 열다섯 살의 나이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뒷목을 잡은 것도 당연합니다. 해군 장교를 시키려고 배도 태워 봤지만, 마네는 배에서 바다 그림만 그려댔습니다. 천생 예술가인 마네에게 육체적으로 힘들고 단조로운 바다 생활은 맞지 않았던 겁니다. 마네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뱃멀미는 끔찍하지만, 더 끔찍한 건 너무나도 지루하다는 거예요. 어딜 둘러보나 하늘과 물밖에 없고 항상 똑같은 일만 반복되니까요.”

볼로뉴를 떠나는 증기선(1864). 마네는 바다나 강을 소재로 한 그림도 잘 그렸다. 짧은 해군 생활 덕분이었다. /메트로폴리탄박물관

결국 아버지는 두 손을 들고 마네의 그림 공부를 허락했습니다. ‘나한테서 이런 아들이 나오다니 믿을 수 없구먼…. 저 녀석은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런 거야?’ 아버지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마네가 교양을 쌓게 해주려고 불러온 피아노 가정교사 수잔과 연애를 하고, 열아홉 살의 나이로 손자 레옹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야말로 기절초풍하고 부모 자식의 연을 끊었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 마네에게는 아버지의 성격을 쏙 빼닮은 점도 있었습니다. 고집이 아주 세고, 다른 사람의 인정과 명예를 갈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마네의 성격은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스페인 가수(1860). 이 작품은 마네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살롱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미술계의 이단아

잔디밭에서의 점심식사(1863). 고전의 반열에 올라 현대인들에게 꽤 익숙한 그림이지만, 처음 봤다고 생각하면 조금 당혹스러울 수 있는 그림이다. 그러니 19세기 프랑스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네는 이 그림을 통해 "새로운 그림을 그리겠다"는 도전장을 정면으로 냈다. 그 과감하고 저돌적인 자세가 마네의 매력이자 약점이었다. /오르세미술관

자신이 작가라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생긴 뭔가를 만들어냈다고 가정해 봅시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게 독창적인 현대미술 작품인지, 그저 돈을 벌고 관심을 끌기 위해 대충 만든 흉물인지, 예술적 가치가 어느 정도고 가격은 얼마가 적정한지를 판단하는 명확하고 일관적인 기준이 사실상 없다시피 합니다. 쉽게 말해 뭐가 미술이고 아닌지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다는 거지요. 작가와 평론가 등 미술계의 사람들, 미술 시장에서 매겨지는 가격, 대중들의 의견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결정된다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대답일 겁니다.

현대미술이 대중의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냥 사기 아니냐” “이런 건 나도 그리겠다” 이런 얘기를 하는 분들도 적지 않지요.

피리부는 소년(1866).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오르세미술관

그런데 무엇이 진정한 미술인지, 그 정답이 명확하게 있다고 해서 꼭 좋은 건 아닙니다. 마네가 활동하던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주류 미술계가 그랬습니다. 당시 ‘정답’은 정교한 기법으로 신화나 기독교의 성인, 영웅, 역사와 같은 영원한 주제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이런 작품을 그려서 정기 전시회인 살롱에 발표해 인정을 받고 왕립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 ‘진정한 화가’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요. 반면 정물화나 인물화 등 상대적으로 “급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림만 그린다거나, 정석적인 기법 외에 독특한 기법을 쓰는 화가들은 좋은 평가를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마네에게는 당시 미술계가 요구하는 이런 ‘정답’이 너무 뻔하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고리타분한 기법으로 옛날 일만 반복해서 그려봐야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그는 자신만의 기법으로, 자기 고집대로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그렸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주류 미술계를 놀라게 하고 미술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의도는 적중해서 마네의 작품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늘날 마네가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올랭피아(1863). 매춘부를 소재로 그린 이 그림 역시 마찬가지로 프랑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여신이나 요정도 아니고, 현실의 매춘부가 이토록 건방진 자세와 표정으로 관객을 바라보다니. 표현법마저 당대 다른 화가들에 비해 거칠고 생소했으니, 대중과 비평가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마네를 비판했다. /오르세미술관

욕을 먹고 거부당하는 건 선구자의 숙명입니다. 역사화에 익숙했던 당시 기준에서 마네가 쓴 독특한 기법은 그저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그린 완성도 낮은 그림’으로 보였고, 현대 생활이라는 주제는 ‘예술에 어울리지 않는 저급한 주제’ 취급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거부감이 심했던지 마네의 전시 경비원들은 그림을 찢으려는 사람들을 막느라 진땀을 흘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벽에 부딪혔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 뜻을 꺾을 겁니다. 좀 더 강단이 있다면 아예 아카데미와 살롱이라는 체제를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겠지요. 클로드 모네를 비롯한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이 살롱 밖에서 전시를 열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마네는 끊임없이 살롱의 문을 두드리며 정면돌파를 고집했습니다.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배경, 사회 주류의 인정을 갈구하는 성격 때문이었지요. 안타깝게도 이런 시도는 마네가 필요 이상으로 미술계의 집중적인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미술계의 인정은 커녕 작품이 제대로 팔리지도 않으니 ‘독립해서 처자식을 데려오겠다’는 약속도 자꾸만 미뤄졌습니다. 결국 마네가 처자식을 데려온 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인 1863년이 돼서였습니다. 마네의 나이 서른한 살, 아들의 나이는 열한 살 때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꽃 같았던 사랑은 식은 지 오래. 아들과의 사이 역시 서먹하기만 했습니다.

칼을 든 소년(1861). 아들 레옹이 모델이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속마음 들켰다, 그림을 찢었다

비록 가족 관계는 삐걱거렸지만,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마네는 어느새 영웅이 돼 있었습니다. 고리타분한 아카데미의 노인네들이 그리는 역사 그림과 달리 마네의 그림에는 신선함이 있었습니다. ‘나는 마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화가들도 하나둘씩 생겨났습니다. 마네는 자신을 인상주의 화가라고 부르는 걸 거부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크나큰 영향을 받았지요. 마네가 그림을 발표할 때마다 따라다니는 팬들도 많았습니다. 여전히 그림이 잘 팔리지는 않았지만요.

이런 인기의 또 다른 비결은 마네의 인간적인 매력이었습니다. 비록 20대 때처럼 날씬한 근육질 몸매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는 옷을 잘 입는 멋쟁이였습니다. 마네는 성격이 사교적이었고 유머 감각이 뛰어났습니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했고, 사람을 성별이나 재산으로 차별하지도 않았습니다. 작품 좋고 외모가 괜찮은데다 성격까지 좋은 예술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인기 있는 법. 이런 마네에게 공공연히 호감을 표현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마네도 자신의 인기를 즐겼습니다.

발코니(1869). 왼쪽 아래가 베르트 모리조다. /오르세미술관


부채를 든 베르테 모리조(1874). 그림 속 모리조는 갈수록 자신의 내밀한 속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팔레 드 보자르 드 릴

마네는 지적이고 도시적인 여성들에 끌렸습니다. 그런 여성들과의 관계 중 가장 유명한 게 인상주의 화가인 베르트 모리조와의 미묘한 사이입니다. 모리조는 마네의 실력을 동경했고 그의 매력을 사랑했습니다. 마네 역시 젊고 아름답고 지적인 모리조에게 푹 빠져서, 모리조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그녀를 모델로 한 작품들을 여럿 그렸습니다. 하지만 모리조의 부모님에게 둘의 사랑은 말도 안 되는 일. 앞날이 창창한 딸이 처자식 있는 유부남과 만난다니 청천벽력 같은 얘기지요. 둘 사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부모님의 집중 견제 덕에 사랑은 연애까지 이어지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아노를 치는 마네부인(1867~1868). 갈수록 그림 속 아내의 모습은 후덕해지고(현실을 일부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묘사는 투박하고 거칠어진다. /오르세미술관


푸른 소파에 누운 마네 부인(1880). /오르세미술관

반면 아내에 대한 마네의 감정은 갈수록 차가워졌습니다. 아내는 수수하고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를 홀로 키워내며 묵묵히 마네를 뒷바라지한 현모양처였습니다. 마네는 이런 아내를 거의 투명인간처럼 취급했습니다. 동료 화가들을 집에 불러왔을 때도 아내를 따로 소개해주는 일이 드물었고, 간혹 아내를 불러낼 때면 대부분 피아노 연주를 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은 그의 작품 속 아내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요정처럼 그렸던 그림 속 아내의 형체는 갈수록 희미해집니다. 뒤에 그린 그림일수록 친근함이 묻어나는 모리조의 초상화와 대조적이지요.

마네 부부의 이런 분위기는 친구인 에드가 드가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느날 드가는 마네 부부를 그린 작품을 마네에게 선물했습니다. 마네는 소파에 누워있고 아내는 피아노를 치는 그 모습과 분위기를 담은 그림이었지요. 하지만 마네는 이 작품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칼로 그림을 찢어버렸습니다. 드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대가다운 솜씨를 발휘해서, 마네가 숨기고 싶었던 결혼생활의 불편한 진실을 그림에 그대로 포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네가 헌신적인 아내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다는 진실을요.

에드가 드가가 그린 '마네와 그의 아내'(1860년대). 마네는 캔버스 오른쪽 부분을 칼로 찢어버렸다. /기타큐슈 사립 미술관

어쨌든 시간은 흘렀습니다. 마네의 시간이 찾아온 건 정말 오랜 기다림 뒤였습니다. 마네가 50살이 거의 다 됐을 때, 비로소 대중은 점차 마네를 비롯한 새로운 화가들의 독특한 화풍에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발표될 때 마네의 작품은 일반 대중의 눈에 황당할 정도로 저급한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생전 처음 보는 새로운 그림에 대한 거부 반응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늘자 그림이 점차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평생토록 마네를 무시하고 조롱했던 살롱도 마침내 그에게 2등 상을 줬습니다.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너무 늦게 찾아온 영광이었습니다. 그가 끔찍한 병에 걸려 겨우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마네는 유언장에 썼습니다. “내 아들에게 대부분의 그림과 재산을 주고, 나머지는 아내에게 상속한다.”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까

폴리 베르제르의 바(1882).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그렸다. /코톨드 미술관

마네에 대한 대부분의 자료는 여기서 끝을 맺습니다. 하지만 조사하다 보니 그 가족들의 뒷얘기가 궁금해져서 또 한 번 기록을 뒤졌습니다. 조사해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들은 전설이라고 추켜세우지만, 아내 수잔과 아들 레옹에게 마네는 그저 형편없는 가장일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레옹은 마네의 성을 이어받지 않고 ‘사생아 시절’ 성을 고수했거든요. 마네의 아내와 아들은 마네가 남긴 그림을 정리하고 기록을 남겼지만, 이는 그저 작품을 현금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작품에 대한 유가족의 무관심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막시밀리안의 처형’을 조각조각 잘라서 팔아버린 일입니다. 마네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친구였던 드가는 시장에 나온 미술품을 둘러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마네가 그렸던 작품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드가는 당장 그 조각들을 모두 사들였고, 레옹에게 “왜 이런 짓을 했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레옹은 답했습니다. “그게 더 나을 거 같아서 자른 부분도 있고, 썩어서 잘라버린 부분도 있어요. 썩어서 잘라낸 캔버스 조각은 불을 피우는 데 썼는데…. 가치가 있었다니 아깝네요.”

막시밀리안의 처형(1867~1868). 아들 레옹이 뜯어내버린 버전이다. /영국 내셔널갤러리

작품을 정리한 후 유가족들의 기록은 더욱 찾기 어렵습니다. 자료가 너무 부족해서 의도적으로 은둔 생활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일단 기록에 따르면 작품을 모두 정리한 레옹은 반려동물용품과 낚시 도구를 파는 작은 가게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후 54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동갑내기 ‘돌싱녀’와 결혼했습니다. 은퇴 후 그는 노르망디에서 말년을 보냈고, 1927년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레옹의 이런 평범하고 소박한 은둔자 같은 삶은, 화려하게 살다 죽어서 전설이 된 아버지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영원한 명성을 갈망하며 평생을 바쳤지만, 소중한 가족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마네. 레옹은 아버지의 이런 삶의 방식과 정반대로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아버지가 그린 그림은 대충 팔아버렸고, 별 볼 일 없는 가게를 운영하다 은퇴했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결혼했으니까요. 사람들은 수군댔을 겁니다. 위대한 아버지와 딴판으로 보잘것없는 자식이라고. 하지만 레옹은 이런 평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져 은퇴한 뒤에는 정답게 아내의 손을 잡고 매일 노르망디 해변을 걸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도, 아버지보다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다시 주말이 돌아왔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따뜻한 휴식의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책 출간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러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연재를 2주 쉽니다. 출간은 내년 1~2월로 예정돼 있습니다.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 연재는 12월 9일 재개됩니다.
*이번 기사는 Edouard Manet(Rebel in a Frock Coat) (Beth Archer Brombert 지음), 
Manet and the Family Romance(Nancy Locke 지음), The Art of Rivalry (Sebastian Smee 지음), The Private Lives of Impressionists (Sue Roe 지음)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4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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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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