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임원실, 부족한 회의실, 따닥따닥 책상…사무실이 후진 이유[딥다이브]
넓은 책상, 세련된 인테리어, 쾌적한 네트워킹 공간, 고급스런 조명과 편안한 의자, 충분한 간식까지. 사무직 근로자라면 누구나 이런 사무실을 꿈꿉니다. ‘출근하고 싶어지는 사무실’이라는 로망이 있죠. 하지만 현실에선 사무실이 닭장이나 감옥처럼 느껴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좋은 사무실→업무 집중력·효율성 향상→생산성 증대’는 공식입니다. 비용 때문에 또는 기존 관성 때문에 이를 이루기 어려울 뿐이죠. 그래도 최근엔 사무 공간의 변화를 꾀하는 기업들이 국내에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는데요. 사무실 공간기획 전문가인 이재홍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코리아 상무를 만나, 좋은 사무실이란 무엇인지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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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리’ 없어져도 만족도 큰 이유
서울의 주요 업무권역엔 비는 사무실이 거의 없습니다. 서울 A급 오피스빌딩 평균 공실률은 꾸준히 하락해 9월엔 2.2%에 그쳤죠. 당분간 새로 지어질 건물도 많지 않아 새 사무실 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기업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기업들은 ‘우리는 계속 성장하는데, 과연 지금 공간을 재계약하는 게 맞나’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기 위해 저희한테 문의해오죠.”
자율좌석제로 바꾼 가장 큰 이유는 로레알이 업무 특성에 따라 최대 주 2회 재택근무가 가능한 하이브리드 근무를 하기 때문입니다. 회사에 출근하는 목적이 주로 개인 업무보다는 콜라보레이션에 있었죠.
기존 지정좌석제일 땐 책상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서 비좁았습니다. 자료나 샘플 박스가 공간을 차지했고, 미팅공간은 적었습니다. 그래서 쿠시먼은 개인 업무용 좌석을 줄이는 대신 책상 간격을 시원하게 넓히도록 공간을 설계합니다. 캐주얼 미팅을 위한 다양한 공간과 여러 크기의 회의실은 대폭 늘렸죠. 올해 7월 입주 뒤 로레알코리아 직원들의 새 사무공간에 대한 만족도와 이용도 모두 높다는데요.
업무 스타일에 맞춰 자율좌석제를 도입하는 기업은 늘고 있습니다. 도요타코리아는 지난해 강남에서 을지로 센터원으로 사옥을 옮기면서 자율좌석제를 도입했는데요. 주로 영업직이 많다 보니 자리에 앉아서 일하기보다는 회의나 미팅을 하러 회사에 온다는 점을 반영했습니다. 기존보다 면적이 60% 줄었지만 좌석 간격은 확 넓어졌는데요.
“그 전엔 회사가 직원이 일할 곳을 선택했습니다. ‘넌 임원이 되면 방을 가질 수 있어. 넌 막내니까 복도 자리에 앉아. 미팅은 여기서 해. 휴식은 밖에서 해’라는 식으로요. 그런데 사람마다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다르거든요. 조용한 곳에서 잘 되는 사람도 있고, 화이트 노이즈가 있는 데서 잘 되는 사람도 있고. 자율좌석제에선 직원이 자기가 일할 공간을 선택한다는 점이 가장 다릅니다.”
너무 큰 임원실의 문제
이 상무는 국내 대기업 사무공간의 특이점 중 하나로 임원실을 꼽습니다. 임원실이 상당히 큰 기업이 많죠. 국내 일부 대형 은행의 경우 본부장은 10평, 부문장은 15평으로 정해져 있다는데요. 대형 로펌 변호사 사무실이 2.5~3평, 외국계 금융사 CEO 방도 4평 이하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 큽니다.
“국내 한 금융사의 경우 임원 수는 전체의 5%도 안 되는데, 임원실이 사무실 면적의 20%를 차지하더라고요. 전체적으로는 임직원 1인당 면적이 3평이 넘게 나오지만, 실제론 업무공간이 너무 좁았죠. 사실 직원의 생산성을 높여야 임원도 성과를 내니까, 임원실을 줄여서 생산성을 위한 공간으로 되돌리는 게 맞을 텐데요. 그런 얘기가 통하지 않는 기업도 있긴 합니다.”
그는 “임원실 목적이 기밀유지와 중요한 대화, 직원 미팅인데 그 기능을 위해선 4~5평이면 충분하다”면서 “임원실은 그 2배이면서 직원들 책상은 작고, 공유 공간은 개수대 수준인 기업도 많다”고 덧붙입니다.
사실 이렇게 바꾸기 전엔 부정적 의견 많았습니다. ‘잘 될지 모르겠다’라는 회의적 시각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바꾸고 나서 만족도 평가에서는 평균 점수가 10점 만점에 8점이었습니다.
이번에 리모델링을 한 로레알코리아엔 임원실이 여전히 있습니다. 다만 임원이 사용하는 방이긴 하지만 임원이 없을 땐 다른 사람이 와서 미팅을 하는 공간으로 쓰인다는 점이 파격적인데요. “기존과 뭐가 다르냐면 ‘개인화’를 하지 않습니다. 임원이 그 방을 사용은 하지만 자기 가족사진이나 화분 같은 개인 물건을 갖다 놓지 못하죠. 언제든 그 임원이 없을 땐 직원들이 미팅을 할 수 있고요. 만약 임원이 출장을 가거나 하면 직원이 그 방을 예약해서 개인 업무도 할 수 있습니다.”
한때 국내 기업에서 임원 방을 없애는 게 유행이었죠. 방 밖으로 나오되 대신 높은 파티션을 쳐서 가리는 식으로요. 이 상무는 “그건 의미 없다. 차라리 방을 만드는 게 낫다”고 잘라 말합니다. 벽만 없앴지 임원이 쓰는 공간을 줄이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직원들이 ‘임원이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 나왔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거고요.
직원들도 모르는 공간의 비밀
자율좌석제, 스마트 오피스가 모든 기업에 답은 아닙니다. 이 상무는 “사전 분석과 기획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요.
사옥 이전을 위해 쿠시먼에 공간기획을 의뢰한 한 대형 게임회사는 지적좌석제를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임원 인터뷰와 전 직원 설문조사 결과, 직원 대부분이 평균 12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고 그중 11시간은 개인 자리에 앉아서 일한다고 나왔기 때문이죠. 그는 “자기 자리 없이 매번 앉을 자리를 찾게 하는 게 더 비효율적인 경우”라며 “개인 좌석에서 최대한 편하게 일하도록 하기 위해 이를 더 넓히고 대신 미팅룸은 줄이기로 했다“고 설명합니다.
직원 설문은 기획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 봐선 답을 알 수 없습니다. 직원들이 느끼는 것과 행동하는 게 다르기 때문인데요. 이 상무에 따르면 그동안 30여 개 기업의 컨설팅을 진행하면서 직원들에게 ‘생산성 향상을 가장 부족한 시설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미팅룸’이란 답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많이 이용하는 피크시간에 미팅룸 점유율이 얼마나 되느냐’를 보면 달랐습니다. 아무리 높아도 60%밖에 되지 않았죠.
최근 컨설팅 진행 중인 외국계 IT 기업도 그런 사례입니다. 직원 설문에서 ‘미팅룸이 너무 부족해서 예약을 못 한다’는 응답이 쇄도했는데요. 정작 피크타임 미팅룸 점유율은 43%에 불과했습니다. 왜 그런지 들여다보니 예약 뒤 ‘노쇼’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는데요. 미팅룸을 늘리는 대신, 노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고민 중입니다.
미팅룸이 실제와 달리 부족해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내 눈앞에 보이는 미팅룸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라는 게 이 상무의 설명입니다. 멀리 있는 방이 비어있어도 직원들은 바로 앞에 있는 미팅룸만 본다는 거죠. “물론 전반적으로는 국내 기업의 미팅룸은 외국계와 비교할 때 현저하게 적은 건 맞습니다. 왜냐면 임원실이 크니까요.”
자율좌석제가 잘 맞는 기업이 점점 많아지고, 만족도도 비교적 높다고 하지만 단점은 없을까요. 그가 꼽은 단점은 이겁니다. “신입사원이나 다른 회사에서 이직한 사람이 새로 들어오면 기존 사람과 어울리기가 어렵다.” 자칫 회사 적응이 쉽지 않을 수 있죠. “따라서 자율좌석제에 맞춰 기업이 신규 입사자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더 늘리고, 적응을 돕기 위한 ‘멘토 시스템’ 같은 걸 도입해 보완하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합니다.
공간엔 스토리가 필요하다
좋은 걸 알아도 실행이 어려운 건 보통 돈 때문이죠. 정해진 자리 없이 어디서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스마트한 사무실을 구축하는 데는 돈이 꽤 많이 듭니다. 이 상무는 “인테리어보다는 돌아다니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IT 네트워크 인프라에 돈이 많이 든다”고 설명합니다. IT 시설 투자비용이 일반 사무실보다 20% 정도 더 들어간다는데요.
그래도 기업의 관심은 점점 늘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오피스 신규물량이 줄어든 게 한 요인이고요.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반강제적으로 한 경험 덕분에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최근 이 상무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잘 쓰기 위한 스마트 오피스를 넘어서 직원과 외부인까지 공감할 만한 스토리가 있는 공간 기획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건축·디자인과는 전혀 관련 없는 분야, 예를 들어 광고회사와 강사 출신의 직원들도 영입했다는데요. 사무공간을 기획하는 데 스토리텔링 역량이 풍부한 문과 출신이 필요하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기업이 아무리 좋은 공간, 멋진 사무실을 만들어도 스토리가 없으면 직원이나 외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아요. ‘돈 많이 벌었나 보네’, ‘이번에 이익 낸 거 저기 다 들어갔겠구먼’, ‘연봉은 동결인데 왜 이런 데 돈을 쓰지’라는 차가운 반응이 돌아오죠. 아마존이나 애플 같은 기업이 사옥을 지을 때 반드시 기업 철학과 연결해 스토리를 만들어가려는 이유도 그래서이죠. 스토리가 있으면 그 공간을 사람들이 궁금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부동산 업계가 숫자에 집중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스토리의 중요성이 부각될 거라고 봅니다.” By.딥다이브
공간에 대한 갈망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남이 어떤 집에서 사나’ 못지 않게 ‘남이 어떤 사무실에서 일하나’를 참 궁금해합니다. 기사엔 로레알코리아와 도요타코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기업 이름은 공개할 수 없어서 그 점이 좀 아쉽네요. 인터뷰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서울 주요 업무권역에 빈 사무실이 없습니다. 사무실 부족현상 때문에 기업들의 공간에 대한 고민이 커졌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일하고 있나’를 분석해 어떤 공간이 필요한지를 알아보는 기업들이 많아진 이유입니다.
-최근엔 지정좌석을 없애고 자율좌석제로 바꾸는 기업이 많습니다. ‘자기 자리’는 없어지지만 대신 더 쾌적하고 다양한 공간이 늘어나는 데다, 내가 일할 곳은 내가 정하는 선택권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대체로 만족도가 높은 편입니다.
-사무실을 좁고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너무 넓은 임원실입니다. 임원실은 두되, 공간은 줄이고 ‘개인화’하지 않아서 언제든 다른 직원이 미팅룸으로 이용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스마트 오피스로의 전환엔 투자비가 꽤 듭니다. 하지만 원격근무 경험이 쌓인 덕분에 기업의 관심은 커지고 있죠. 앞으론 더 나아가 공간에 스토리까지 입히는 기업이 더 많아질 겁니다.
*이 기사는 1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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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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