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6·25 민간인 학살…‘태안’의 눈물
[앵커]
6.25 전쟁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된,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입니다.
치열했던 전쟁으로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은 백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요.
여기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민간인들도 포함됩니다.
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70년이 흘렀지만 그 학살의 역사는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최효은 리포터가 잊을 수 없는 그 비극을 기록하고 있는 한 다큐멘터리 감독과 참혹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남겨진 이들을 ‘태안’에서 만났습니다.
함께 보시죠.
[리포트]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합동제례가 거행됩니다.
6.25 전쟁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단상에 걸린 펼침막에는 희생자 1,045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습니다.
전쟁 시기 포격이나 총격이 아니라 이념의 문제로 인민군이나 군경 등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입니다.
[한원석/태안유족회 : "총살을 할 때 내가 그때 중학교 1학년 짜리라 15살짜리라 생생하게 제가 그걸 다 목격을 했거든요. 우리 매형이 죽고, 우리 큰형님이 죽고 둘 죽었어요."]
특히 큰 형은 의용군에 강제 징집됐다 어렵게 고향에 돌아왔지만 북한군 부역자로 몰려 총살당했습니다.
이념이 포화상태였던 그 광기의 시대, 태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현대사의 비극인 6.25 전쟁 당시 이곳 충남 태안에서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의 참상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는 이 아픔의 역사를 최근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활기를 띄고 있는데요.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 있습니다.
올해로 19년째, 전쟁을 전후로 이념 대립이 극심할 때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의 기록자로 활동 중인 구자환 감독입니다.
전국 민간인 학살 사건을 그려낸 ‘해원’을 비롯해 그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들은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기록물로 영구 보존되고 있는데요.
이번 위령제에선, 그의 작품 ‘태안’이 상영됐습니다.
[다큐멘터리 ‘태안’ : "좌익이 경찰 나갈 적에 많이 죽고, 경찰이 그 사람들을 미리 잡아가지고 경찰서에 잡아놓고서 어디로 가서 총살 시켜 없앴는지 다 없애버리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시체도 못 찾어."]
구 감독은 어떻게, 태안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까요?
[구자환/다큐멘터리 감독 : "자료를 뒤지다가 태안 만리포 학살을 봤어요. 그 이야기를 제 개인 SNS에 올렸어요. 거기에 댓글이 달리는데 내가 거기서 나고 자랐지만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는지 나도 몰랐다. 우리 지역에 그런 게 있었느냐. 그런 댓글이 달려요."]
1년 넘게 현장을 고증하고 관련자들의 증언을 담은 <태안>에는 당시 같은 마을 사람들이 좌우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였던 비극이 오롯이 담겼습니다.
[구자환/다큐멘터리 감독 : "자기의 말 한마디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시고. 죽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험악하게 살해를 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증오가 어디서 나왔을까 저는 아직도 그 궁금증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현장을 직접 찾아가 봤는데요.
태안 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이 시작된, 백화산 자락의 사기실재입니다.
[강희권/태안유족회 상임이사 : "이승만 정권에 의해서 태안지역에 보도연맹원 115명이 이 자리에서 경찰에 의해서 학살됐습니다. 그 학살 방법도 총살한 후에 휘발유를 뿌리고 그 시신 위에 불을 지르고 그렇게 한 다음에 경찰이 후퇴했습니다."]
그 상황을 목격했던 지동기 씨는 당시 겨우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지동기/태안유족회 : "우리 매형이 한 분 계셨거든, 여기서 학살 당했어. 그래서 여기 와서 수습해서 찾았지."]
이후 태안을 인민군이 점령했고 이번엔 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복수로 공무원과 경찰 가족 등을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그리고 국군이 이 지역을 수복하면서 지동기 씨의 형제들은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총살당하는 등 가혹한 보복이 되풀이된 것입니다.
해당화 군락지로 여름이면 붉은 꽃이 아름답게 피는 이곳 모항도, 학살의 피로 물들었다고 합니다.
[정만호/태안유족회 : "(여기가 저번에 만리포에서 어머님하고 시신 모셨던 장소가 여깁니까?) 이 부근에 많이 가매장들을 많이 했어요."]
‘태안’의 증언자로 출연한 정만호 씨도 1950년 어머니와 함께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갔고, 결국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정만호/태안유족회 : "우리 큰형이 좌익활동을 조금 했어요. 그래서 큰형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하면서 그렇게 자식들을 위해서 살려고 했다가..."]
그 뒤 며칠 있다가 무참히 살해당한 큰형과 작은형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죽음의 위기에 몰렸지만 또 다른 희생자 유가족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밤과 낮을 바꿔 가며 좌우가 서로가 서로를 죽였던 민간인 학살의 상처는 7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았습니다.
물론 실체적인 진실을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고 계속 해나가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화해를 하고 화합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한지 않을까요.
정만호 씨의 비극은 고아가 된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연좌제로 인해 오랜 기간 감시를 받은 것입니다.
[정만호/태안유족회 : "인천으로 이사 갔는데도 형사들이 다 찾아다니는 거예요. 찾아와서 간간이 물어보고, ‘누가 찾아오지 않았느냐’ 이런 것도 많이 했죠."]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지 올해로 70년.
증언자들은 점차 사라지는 상황에서 자칫 참극에 대한 진정한 화해의 기회도 없이 아픔만 우리 기억에 남게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다행히 지난 8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태안군 이원면 주민 35명이 공권력에 의해 집단살해 됐다는 사실을 추가적으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책임자를 처벌할 수 없지만 진실을 알아가려는 국가와 사회의 노력이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구자환/다큐멘터리 감독 : "일단 민간인 학살을 기록하고 연구하고 하는 목적들이 최종적으론 화해에 있다고 보거든요. 화해를 향해서 나갈 수 있는 방법들이 결국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한다라고 생각을 해요."]
[정만호/태안유족회 : "화해가 제일 급선무 아니냐 우익이고 좌익이고 갈릴 때가 아니고 다 같은 국민이면 국민답게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그러고서 사는 것이 제일 급선무고 유족들은 앞으로 진실규명이 최우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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