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축구의 미래, AFC 챔피언스리그 개편안에 있다 [경기장의 안과 밖]
아시아는 이제 세계 축구의 변방을 거부하는 분위기다. 손흥민(토트넘)과 김민재(바이에른 뮌헨)로 대표되는 이른바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속속 등장한 것이 신호탄이다. 2022년 손흥민, 2023년 김민재가 세계 최고 권위의 개인상인 발롱도르 최종 후보 30인에 이름을 올렸다. 프리미어리그 최초의 아시아인 득점왕 손흥민은 11위, 유럽 진출 2년 차에 최고의 센터백으로 도약한 김민재는 22위를 기록했다.
과거 발롱도르는 아시아 선수에게 별세상 이야기였다. 일본의 나카타 히데토시가 발롱도르 후보에 올랐지만(1998, 1999, 2001년) 당시엔 30인이 아닌 50인 후보 체제였다. 실제 득표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2005년 후보로 뽑힌 박지성도 마찬가지였다. 2019년 손흥민이 발롱도르 최종 후보에 등장해 4점을 얻기 전까지 아시아 선수 최고 득점은 이라크의 공격수 유니스 마흐무드가 2007년 획득한 2점이었다.
손흥민과 김민재의 활약상은 아시아 축구에 대한 세계의 시각을 바꿔놓았다. 이전까지는 편견이 강했다. 특출난 개인 기량이 아니라, 학구열과 소속감이 강한 아시아의 특성을 살린 조직력 위주의 팀플레이로 결과를 낸다는 시선이었다. 물론 지금도 아시아의 슈퍼스타들을 평가할 때 팀에 대한 헌신성이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수의 개성과 능력도 세밀하게 다룬다. 이강인(파리 생제르맹), 구보 다케후사(레알 소시에다드) 같은 차세대 스타들은 어린 나이에 유럽에서 성장한 케이스다.
2022 카타르월드컵에서 아시아 축구는 기념비적 성공을 이뤄냈다. 최초로 아시아축구연맹(AFC) 소속 3개 국가(한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가 16강에 동시 진출했다. 8개국이 16강에 오른 유럽 다음으로 많았다. 자본력에서도 아시아가 유럽 축구의 엔진이 되는 분위기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중국의 기세는 주춤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를 비롯한 중동의 자본력이 유럽 명문 클럽을 사들이는 중이다.
유럽에서는 연일 아시아 출신 선수와 중동 구단주들의 소식이 쏟아진다. AFC는 내부 역량 키우기도 도모하고 있다. AFC 챔피언스리그(이하 ACL) 운영 체제 개편이 대표적이다. 연중 치러지는 클럽 대항전 규모를 크게 확장해 아시아 축구 전체를 발전시킨다는 목적을 제시했다.
우선 시즌 일정을 봄에 시작하는 춘추제에서 가을에 시작하는 추춘제로 과감하게 바꿨다. 추춘제는 세계 축구를 주도하는 유럽 국가 대부분이 채택한 시즌제다. 혹한의 겨울을 보내야 하는 북유럽 국가 정도만 봄에 시즌을 시작한다. 혹자는 바레인 출신인 살만 알칼리파 회장이 장기 집권 중인 AFC가 지나치게 중동에 기울어진 선택을 했다고 지적한다. 아랍권은 살인적인 여름 더위를 피해 이미 추춘제를 시행하고 있다. 반면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등 동북아 국가들은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관제와 학제 등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상 춘추제가 익숙하기 때문이다.
AFC는 후속 개편을 통해 ACL의 변화가 단순히 ‘아시아 동서 편가르기’가 아님을 입증했다. 2024-2025시즌부터 ACL 엘리트 대회를 신설한다. 이 대회는 아시아 각 리그 최정상권의 24개 팀이 참가한다. 최근 유럽이 추진했다가 심한 반대 여론으로 실패한 유로피언 슈퍼리그를 연상케 한다. AFC는 이 대회에 엄청난 상금을 부여해 위상을 강화했다. 현재 기존 ACL 우승 상금은 400만 달러(약 54억원)인데, ACL 엘리트 상금은 그 3배인 1200만 달러(약 161억원)이다. 세계 클럽 축구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는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다. 이 대회 우승 상금이 2000만 유로(약 286억원)임을 감안하면 ACL 엘리트에 쏟는 AFC의 정성이 느껴진다.
기존 ACL은 ACL2로 이름이 바뀔 예정이다. 32개 팀이 참가하는 대회로 아시아권에서 두 번째 위상을 갖는 무대가 된다. 유럽으로 치면 UEFA 유로파리그다. ACL의 하위 대회인 현재의 AFC컵은 AFC 챌린지리그로 명칭을 바꿔 진행된다. 클럽 대항전이 2개에서 3개로 늘고, 참가하는 클럽 수는 64개에서 88개로 확대된다. 브루나이, 동티모르, 몽골 등의 국가까지 클럽 대항전의 문호가 확대되는 것이다. 여기에 여자 축구에도 ACL이 신설된다. 현재 아시아 최고 레벨로 인정받는 K리그는 ACL 엘리트에 3개 팀, ACL2에 1개 팀이 나설 것으로 보인다.
질적·양적 파격 속에 아시아 각국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가장 눈에 띄는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다. 사우디는 과거 그들만의 축구 리그에서 월드스타들이 모여드는 화려한 무대로 탈바꿈했다.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파격적인 문화 개방 정책의 일환이다. 호날두를 비롯해 네이마르, 벤제마, 캉테 등 불과 반년 전까지 유럽 축구의 중심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속속 사우디로 모였다. 현재 진행 중인 2023-2024시즌 ACL에서 호날두의 골과 그의 시그니처 세리머니를 볼 수 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자국 리그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2034년 월드컵을 유치하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문제는 시즌제가 바뀐 쪽이다. ACL에서 중동세에 맞서 뛰어난 성적을 거둬온 한국과 일본은 불리한 처지가 됐다. 예선 격인 ACL 조별리그를 시즌 중반 이후 치러야 한다. 한창 리그 순위 경쟁 중일 때다. 또 성적을 결정짓는 ACL 토너먼트는 동계훈련 직후에 치러야 한다. 아직 경기력이 올라오지 않은 시점에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추춘제 딜레마 앞 한국과 일본의 선택은?
결국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국가들은 난제를 마주하게 됐다. AFC가 클럽 대항전으로 제시한 새로운 기준을 따를지, 익숙한 기존 시스템을 지킬지의 문제다. 변화를 따르기엔 현실적 문제가 적지 않다. 동북아시아의 겨울나기는 혹독하다. 추춘제는 기본적으로 12월, 2월에는 어느 정도 경기 진행을 해야 한다. 하지만 강설량이 많은 지역의 경우 이 시기 경기 진행을 환영하기 어렵다. 축구장에 깔리는 유럽 원산지의 잔디는 영상 5℃ 아래에서 생육을 멈춘다. 겨울에 경기를 하려면 인공 채광, 열선 등을 설치해 강제로 생육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인프라 구축에 어마어마한 비용이 든다.
현재 한국과 일본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일본은 축구협회가 중심이 돼 변화를 좇아야 한다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홋카이도 등 겨울나기가 혹독한 지역의 팀과 팬들이 강하게 반발하지만, 일본축구협회와 J리그 측은 해법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돔구장을 활용하거나 겨울 경기 일정을 남쪽 지역으로 배정하는 방식 등이다. 사실 일본은 AFC의 변화 이전부터 추춘제 도입을 논의했다. 궁극적으로는 유럽의 사이클을 따라가겠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프로축구연맹도, 대한축구협회도 모두 소극적이다. 반발을 잠재울 방안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대책 마련에는 큰돈이 드는데, 자생력이 약한 K리그는 미래를 위한 인프라에 투자하기보다 선수 영입에 우선 비용을 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추춘제로 전환하면 K리그는 경기 수를 줄여야 한다. 시즌 종료 후 여름에 2개월 이상의 공백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겨울에도 4주가량 휴식기를 갖는 게 바람직한데, 이렇게 되면 경기일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J리그에 비해 상업성과 비즈니스 모델이 약한 K리그는 스폰서, 중계권료의 일시적 하락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AFC가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변화를 선택한 만큼, 이를 거부하면 한국 축구의 진화는 멈출 수밖에 없다. 선수들의 성장과 발전의 최종 목적지도 유럽을 향하고 있다. K리그 클럽들에 대한 평가 중 ACL 성과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1부 리그 우승 상금이 5억원에 불과한 K리그 구단들이 ACL 우승에 더 집중하는 것도 오래된 현상이다. 모두가 따라갈 수밖에 없는 흐름을 거부하면 고립될지도 모른다. 아시아 축구의 풍향계는 이미 우리가 바라지 않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배진경 (<온사이드>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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