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상실, 그러므로 사랑의 시간 [반려인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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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그렇다면 반려인의 오후란 가장 행복한 때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꾸만 이별과 상실에 관해 쓰는 걸까? 그것은 사실, 한쪽에게는 아직 오후인 시간이 다른 쪽에게는 자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시간은, 반려인의 시간은 아직 오후이기 때문이다.
오후는 이별과 상실의 시간이고, 그러므로 사랑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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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짝이 되는 동무라는 뜻이다. 반려인이라는 말의 마지막 글자는 불필요할 수도 있다. 반려인 또한 누군가의 짝이 되는 동무니까. 오늘은 ‘반려인의 오후’에 대해 생각한다. 오후의 쌍은 분명 오전이지만, 나에게 오후는 언제나 3시 전후의 애매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해가 가장 높이 있을 때는 아니지만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시간. 평화로운 햇빛과 나른함. 식물들이 가장 힘차게 태양을 향해 뻗어 있는 시간.
그렇다면 반려인의 오후란 가장 행복한 때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꾸만 이별과 상실에 관해 쓰는 걸까? 그것은 사실, 한쪽에게는 아직 오후인 시간이 다른 쪽에게는 자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넓고 깊은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수백 년을 살기도 하지만, 집에서는 수없이 많은 식물들을 먼저 떠나보낸다. 그래서일까. 식물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나보다 일찍 죽는 것을 사랑하는 일이란 무엇인지 생각한다. 나는 같은 숫자가, 같은 시간이, 서로에게 같은 의미이기를 기도한다. 이것은 인간 아닌 존재들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5년 전이었다. 한 친구를 떠나보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친했던 십년지기였다. 실없이 웃는 걸 누구보다 잘하는 친구였다. 학창 시절에 나는 걸핏하면 나보다 덩치가 큰 그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귀찮게 하곤 했다. 지금쯤이면 완연한 나무가 되었을까. 고개를 들 힘이 없어서 고개를 내리면 비스듬히 내 가슴에 기댄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다시는 친구의 영정을 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전, 또 다른 친구를 떠나보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함께한 동아리의 동기였다. 장애인권 동아리에서 활동한 나는 종종 친구들의 휠체어 팔걸이에 걸터앉아 함께 달리곤 했지만, 이 친구의 팔걸이는 높아서 앉을 수가 없었다. 휠체어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필요한 기능이 많다는 뜻이다. 필요한 기능이 많다는 건, 그만큼 몸의 상태가 불안정하고 약하다는 뜻이다. 그는 평균수명이 스무 살 정도 되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었고, 스물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남은 뼈는 함께 나온 의료용 보철보다도 작았다. 그가 담긴 상자의 바닥은 여전히 따뜻했다.
내일은 그의 수목장이 치러지는 장지에 가는 날이다. 이전에 보낸 친구도 수목장을 했다. 흙 속의 존재들은 나무로 된 유골함을 분해하고, 유골은 흙과 하나가 될 것이다. 나무는 그 사이로 뿌리를 뻗을 것이다. 유골은 흙이 되고 나무가 될 것이다. 그 나무는 우리 집 거실에 놓인 화분들보다 훨씬 넓은 땅에서 오랫동안 자랄 것이다. 이 지면에 내가 처음 쓴 글은 동네에서 자라는 나무도 반려 식물로 삼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집에서 몇 시간 거리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라고 못할 것 있나.
김소연 시인의 시 ‘여행자’에 나오는 구절들처럼,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다시는 다른 존재에게 그만큼의 사랑을 줄 수 없다고, 주지 않겠다고 절규한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사랑하게 된다. 우리의 시간은, 반려인의 시간은 아직 오후이기 때문이다. 오후는 이별과 상실의 시간이고, 그러므로 사랑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자꾸 나무가 된다. 앞으로도 우리는 짝이 되는 동무일 것이다.
안희제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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