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회사 공용 서버에 여직원 불법 촬영물 저장…판결문 보고 알았다
내 옆자리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가 회사 화장실에 카메라를 몰래 설치해 내 모습을 불법 촬영했다. 그리고 그 영상을 회사 사람 모두 볼 수 있는 공용 서버에 올렸다. 그런데 내가 이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직장 동료로부터 듣고 판결문을 확인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상상이 되시나요. 최근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여직원이 고작 7명 있는 회사에 딱 하나 있는 여자 화장실에서 일어난 범죄. 피해 여직원들은 가해자가 체포돼 재판에 넘겨져 1심 선고가 나올 때까지 수사기관으로부터 한 통의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공용 서버에 여직원들 이니셜 딴 영상 저장…판결문 통해 확인
취재진은 이 사건 피해자 A 씨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A 씨가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건 지난 9월, 전 직장 동료를 만난 자리에서 입니다. 퇴사 전까지 무려 7년이나 함께 근무했던 남자 직원 B 씨가 사내 여자 화장실에 카메라를 설치해 불법 촬영을 한 혐의로 체포돼 1심 선고까지 이미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판결문에 적힌 범행 시기가 A 씨가 근무했던 시기와 겹치는 것 같다는 말에 황급히 판결문을 구해봤다고 하는데요. 그제야 자신도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지했습니다.
비록 이 사건 공소사실에서 피해자들이 특정되지는 않아(그러나 피고인은 직장 동료인 피해자들의 경우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들이 이 법원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표현하지는 못했으나, 피해자들이 자신이 범행의 표적이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을 것으로 보이고, 이 사건 촬영물이 유출되는 경우 더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1심 판결문 발췌)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은 B 씨가 범행을 저지른 기간 동안 근무했던 여직원은 A 씨를 포함해 고작 7명. 그러나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으로부터 연락 한 번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사기관에서 피해자들을 특정하지 않은 채 B 씨를 기소했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의 범죄 사실에만 집중하다 보니 피해자 의견조차 듣지 않고 기소했고, 그 결과 피해자들은 재판에서 아예 배제되는 결과가 초래된 겁니다. "내가 피해자인데 피해자가 없는 재판을 하게 된 거 아니냐"고 분노하는 A 씨. 판결문을 뜯어보면 그 심각성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피해자들이 자신이 범행의 표적이 됐단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을 걸로 보이고, 촬영물이 유출될 경우 더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는 대목이 대표적입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판결문에 나오는 '그 피해자'인데 왜 촬영물이 유출될 수 있다는 연락 한 번 받지 못한 건지, 화가 날 따름입니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가 배제됐던 이유는 뭘까요? 2차 피해 가능성 때문에 피해자를 특정하지 않았다는 게 검찰 설명입니다. 수원지검 관계자는 "경찰 단계에서부터 피해자를 특정하지 않은 채 사건이 넘어왔다"며 "직장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 피해자를 특정하려면 조직 내부에서 (영상 등을) 확인해야 하는데 2차 피해 가능성이 있어서 피해자의 재판 진술권과 2차 피해 가능성 중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2차 피해 우려가 더 크다는 판단에서 피해자를 불상으로 절차를 진행했던 것 같다"고 부연했습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이 원한다면 진술 기회를 보장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냈습니다.
피해자 재판 진술권, 법에 보장됐지만…현실에선 배제
현행법상 피해자의 재판 진술권은 법적으로 보장돼 있습니다.
헌법 제27조5: 형사 피해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당해 사건 재판 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제294조의2: 법원은 범죄 피해자 신청이 있는 때에는 그 피해자 등을 증인으로 신문해야 한다.
그러나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가 재판 기록조차 열람하지 못했던 것처럼 형사 절차에서 피해자가 배제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그간 형사 재판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검사, 피고인)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주변인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도 수사당국에서 사건에 대해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며 울분을 터트린 바 있는데요. 폭행으로 기억을 잃어 사건 경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던 상태였는데, 자신의 피해 영상을 1심 재판에서야 확인할 수 있었던 겁니다.
피해자들이 재판 진술권과 같은 권리가 있는지 잘 모르는 것도 문제일 겁니다. 실제로 부산 돌려차기 사건을 계기로 대검찰청은 지난 7월 범죄 피해자 재판 절차 진술권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살인, 강도, 성범죄 등 중대 범죄 피의자를 기소할 때 검사가 필수적으로 대면이나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해 피해자에게 재판 진술권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진술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겁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독일은 '공소 참가 제도'라는 걸 운영해 피해자에게 재판 출석권을 주고 있고, 피고인과 증인에 대한 질문권까지 보장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도 피해자가 직접 피고인과 증인을 신문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사건 수사 단계에서 수사 기관이 수사 편의를 추구하기 앞서 피해자 권리를 보다 우선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한 형사 전문 변호사는 "피해자에게 굳이 알리지 않아도 공소 유지에 어려움이 없고 자백도 하는 이런 사건들의 경우, 처벌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고 넘기는 경우들이 나올 수 있다"며 "이번 사건처럼 피해자가 특정 가능할 경우, 무리하게 조사를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피해자에 연락하고 의견을 밝힐 수 있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서 "수사 편의만 생각하면 피해자에게 알리지 않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겠지만, 수사 단계부터 피해자 권리 관점에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하정연 기자 ha@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탕탕' 눈앞에서 아들 잃고 절규…고스란히 기록된 현장
- "몸속에 유해물질" 종이빨대의 배신?…카페·편의점 보니
- "브레이크 안돼" 30초 만에 쾅…공유업체는 '이상 없음'
- 낯선 남성 다가와 "젤리 드세요"…구토·마비에 병원으로
- 자궁 없이 태어난 35세…첫 이식 성공해 "출산 도전"
- '와장창' 철근 드러난 주차장…부서진 기둥에서 웬 벽돌?
- 징역 5년·벌금 5억 구형…이재용 "기회 달라" 최후진술
- "유리창 깨질 정도로 쾅쾅"…우박·낙뢰·돌풍이 하루에
- [단독] '문재인 영입' 양향자에 "국민의힘과 연대하자"
- '개 식용 금지법' 만든다…"먹을거리 제한" 업계는 반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