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낙연 “국가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다, 두렵다”
“난폭한 인사·미래 없는 경제…퇴행하는 최악의 정부
민주당, 웬만한 잘못 뭉개고 지나가니 국민이 질리는 것
상대 정당 증오 ‘정치 양극화’…긍정·포용의 언어 써야”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정치 경험이 많다. 5선 국회의원, 전남지사, 국무총리를 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화려한 경력을 갖췄다. 그런데도 2021년 10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재명 후보에게 졌다. 총괄선대위 위원장을 맡아 대선을 치렀다. 국민의힘에 또 졌다.
2022년 6월7일 미국으로 출국해 1년 동안 조지워싱턴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한반도 평화와 국제정치를 공부했다. 지난 6월24일 귀국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나라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는 지경이 됐다.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된 데에는 저의 책임도 있다. 저의 못다 한 책임을 다하겠다.”
귀국 뒤 주로 강연을 하며 비교적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그가 말한 ‘못다 한 책임’이란 뭘까? 윤석열 정권과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년 총선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궁금했다.
인터뷰는 지난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카페에서 이뤄졌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단도직입. 가장 무거운 질문부터 던졌다.
“윤 대통령, 말 많고 술 많이 마시고…위험”
―정권 교체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너무 많은 변화에 당혹스럽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국민 자존 시대를 누렸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 인구 5천만명 이상 ‘3050클럽’의 일곱번째 멤버가 됐다. 코로나 방역의 모범국, 교과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방탄소년단(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인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다. 그런 시대에 윤석열 정부를 마주한 국민이 굉장히 당혹스러울 것이다.”
―윤석열 정부를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악의 정부로 기록될 것이다.”
―왜 그렇게 가혹하게 평가하나?
“이제까지 최악은 탄핵을 당했던 박근혜 정부였다. 박근혜 정부는 정체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퇴행이다. 서 있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가고 있다. 런던의 장하준 교수가 노동시간 연장, 성평등 포기를 사례로 들면서 1960년대가 아니라 1860년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동감이다.”
―왜 뒤로 갈까?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연설할 때 평생 직업을 검사와 대통령 두개밖에 안 가졌다고 했다. 본인을 정확히 본 것 같다. 검사는 지나간 일 중에서 범죄를 찾아내는 게 본능이다. 지금 국가 전체가 그러고 있다.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으니 검찰 본능만 여기저기서 번뜩이는 나라가 돼버렸다.”
—취임식에서 자유를 서른다섯번 외쳤다.
“철 지난 신자유주의나 뉴라이트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법대를 나왔기 때문에 헌법 시간에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헌법 정신이라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유만 강조하는 것을 보면 균형을 잃고 뭔가에 잘못 꽂힌 것 같다.”
―퇴행의 또 다른 사례는?
“홍범도 장군에게 이념을 들이댄 것은 대단히 즉흥적이고 잘못된 것이다. 학생 인권조례가 대한민국 붕괴 시나리오다, 종전선언을 추구한 것이 반국가세력이었다고 상식 밖의 얘기를 했다.”
―윤석열 정부의 인사를 평가해 달라.
“대단히 난폭한 인사가 계속되고 있다. 성평등 의식이 박약한 사람을 여가부 장관으로 지명했다든가, 북한이 미사일 쏘던 시간에 골프를 했던 사람을 합참의장에 지명한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여러 사람이 사퇴했는데 문제의 핵심으로 보이는 사람은 그대로 있다.”
―경제 분야 인사는 어떤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한 걸 봐라. 우리처럼 성장잠재력이 떨어져서 초저성장 시대에 들어간 나라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혁신밖에 없다. 그걸 누가 해먹은 것 아니냐고 의심하면서 16%를 삭감했다. 그건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은?
“균형 잡힌 식견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대단히 즉흥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이고 다변이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내가 전남지사 시절 목포에 갈 때마다 ‘목포생’이라는 막걸리를 마셨는데, 어느 날 아무 의미 없이 ‘이 술 좀 다네’라고 말했더니 그 뒤로 내 시야에서 그 술이 싹 다 사라지더라. 시골 지사가 그런데, 대통령의 말은 오죽하겠나.”
―1987년 이후 다른 대통령들과 비교해도 좀 심한 것 같다.
“심하다. 게다가 술을 많이 마신다. 말이 많고 술을 많이 마시면 비극을 잉태할 요소를 갖춘 것이다.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게 낫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조언한다면?
“모든 변화는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그 생각을 빨리 하는 게 좋다. 쉽지는 않겠지만, 중요 인사들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 균형 잡힌 사람들로 정부를 채워야 한다. 그래야 국가적인 불행을 막을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행정부에 대한 평가는?
“작은 정부론은 신자유주의 쪽 사람들의 신념인데 좀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세밀하게 챙겨야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태원 참사, 태풍 피해, 잼버리 파행으로 이어졌다. 기본적으로 훨씬 더 세밀해져야 한다.”
―잼버리 사태 때는 창피하더라.
“국민 자존 시대가 무너지면서 국민이 당혹감과 분노를 느꼈다고 본다.”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는데 나라가 왜 이렇게 달라질까?
“우리 공직 문화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지휘자가 다른 쪽을 쳐다보면 시스템이 흔들린다. 그래서 끊임없이 챙겨줘야 한다.”
―우리나라는 시스템이 안정된 나라 아닌가?
“내버려둬도 완벽하게 굴러갈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공무원들은 기본적인 역량이 있다. 지휘자가 몇 가지만 얘기하면 챙겨진다. 사인만 줘도 금방 움직인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요구 집회가 매주 열린다. 어떻게 보나?
“오죽하면 그러겠나. 윤석열 대통령도 최근 발언을 보면 자신에 대한 탄핵 요구를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비상하게 노력하기를 바란다. 윤석열 정부가 어떤 식으로 끝날까, 뭘 남기게 될까, 그리고 그 과정에 국가는 어떻게 될까 걱정이다. 때로는 두렵다.”
―왜 두려운가.
“국가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다. 세우기는 어려워도 허물어지기는 쉽다. 그래서 때로는 두려운 생각이 든다. 한민족이 설마 여기까지인가, 다음 세대에 과연 뭘 넘길 수 있을까, 죽어라고 열심히 해온 것 같은데 이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든다.”
“이재명 대표 사법 문제로 당 도덕적 감수성 퇴화”
―민주당 지지도가 안 오르는 이유가 뭘까?
“이제까지 국민이 봐왔던 민주당과 다르고, 국민 일반이 가진 상식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좀 질려 하는 것 아닌가.”
―옛날 민주당과 지금 민주당은 어떻게 다른가?
“잘못했으면 바로바로 사과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굉장히 둔화한 것 같다. 김대중 정부 후반기에 당의 대변인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문제가 많이 터졌다. 거의 매일 기자실에 가서 사과하고 ‘법대로 처리하길 바란다’고 했다. 천하의 김대중 대통령 가족과 관계된 일이었지만 그랬다. 그게 국민에 대한 도리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웬만한 건 뭉개고 지나간다. 패널들이 텔레비전 나와서 그걸 또 오히려 옹호한다. 이런 게 국민을 질리게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민주당의 지도부 구성이 잘돼 있다고 보나?
“지나치게 획일적이다. 출입기자들 얘기가 ‘최고위원회 모두발언 한두명 들으면 그다음에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 똑같은 얘기를 하기 때문이다. 굉장히 안타깝다. 이제까지 민주당은 굳건한 면역체계를 갖고 있었다. 당내의 다양성과 민주주의다. 면역체계가 무너지면 큰 병이 든다. 그걸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재명 대표의 리더십에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보나?
“영향이 크다고 봐야 한다. 본인의 사법 문제가 민주당을 옥죄고 그 여파로 당 내부의 도덕적 감수성이 퇴화했다. 당내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억압되고 정책이나 비전을 위한 노력이 빛을 잃게 됐다. 이런 현상이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닐 텐데 잘 보이지 않는다. 사법적 문제가 다른 것을 가리는 현상이 장기화하고 있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고 있다. 굉장히 심각하다고 본다.”
―6월에 불체포 특권 포기를 선언했는데, 9월에 체포동의안 부결을 요구했다. 체포동의안은 가결됐지만,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그 과정을 어떻게 평가하나?
“그런 일이 딱 그때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굉장히 인상적으로 민망했던 국면이다.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서 공언했을 정도면 지켰어야 옳다.”
―총선 전망은?
“여당이 이기지는 않겠지. 잘 모르지만. 그런 일이 없겠지만, 여당이 이기게 되면 윤석열 정부가 다시 폭주하게 될 것 아닌가. 그런 비극은 막아야 한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크게 승리할 것 같지도 않다.”
―왜 그렇게 보나?
“그렇게 국민이 막 열광하는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좋다’고 지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라도 지지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하는 지지자들도 있다. 후자의 지지자들에게 응답해야 할 텐데, 그만한 매력이나 신뢰감이 없는 것 같다.”
―의석수 전망은?
“제3세력의 성적이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이다.”
―제3세력이 많이 진출할 가능성이 있나?
“역대 총선 평균보다는 더 많을 것 같은 느낌은 든다. 여론조사에서 ‘지지 정당 없다’는 응답자가 많다. 직접 만나보면 꽤 공고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무당층마저도 진영화하고 있다고 하더라.”
―다양한 신당 추진 움직임이 있는 데 성공할까?
“어떤 비전이나 메시지를 국민 앞에 내놓을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좀 더 봐야 할 것 같다.”
―조국 전 교수, 추미애 전 대표, 송영길 전 대표가 출마 의사를 밝히고 있다.
“알아서들 하시겠지. 그런데 그 한분 한분이 살아오면서 책임 있는 위치에서 책임 있는 일을 하셨던 분이다. 그런 본인의 위상에 걸맞은 판단을 하리라 기대한다.”
―이낙연 대표를 수박이라고 비난하는 일부 열성 당원들이 있다. 모욕감을 느끼지 않나?
“딱하다. 우선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을 향해서 적대적으로 또는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그분들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위해서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당에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2002년 대선 때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가 ‘지지자들을 보면 그 지지자들이 지지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정치인-팬덤, 안전거리 있어야”
―정치 팬덤이 갈수록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이유가 뭘까?
“최근 독서 모임에서 에즈라 클라인의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라는 책으로 토론했다. 미국의 정치 양극화를 다룬 책이다. 그분의 진단이 우리하고도 똑 맞아떨어진다. 양대 정당이 점점 양극화하고 있는데,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대한 사랑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 정당에 대한 증오가 커진다는 것이다. 투표도 지기 싫어서 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국민 사이에 적대감이 커지고 국가가 분열된다는 것이다.”
―에즈라 클라인이 대안 제시도 좀 했나?
“해결보다는 수정이라고 하더라. 우리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가 폭발을 방지하는 내폭 장치다. 양당의 대립 때문에 국정이 마비되거나 국회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지 않게 마지막으로 취할 수 있는 안전장치 같은 걸 말하는 것 같다. 국회선진화법 같은 것이다. 둘째는 민주화, 셋째는 균형, 넷째는 지역 정치에 대한 관심이다.”
―정치인과 팬덤의 바람직한 관계는?
“교통처럼 안전거리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인이 되면 사춘기 때와 달리 개인 간에 적정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런 거리를 두는 것이 어떤가 싶다.”
―너무 어려운 것 같다.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분노와 증오를 서로 표출하고 언론이 날마다 재생산하는 것은 안 된다. 에즈라 클라인 책에는 ‘분노하라. 그러면 1면에 나온다’는 말이 있다. 그날그날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긍정의 언어, 포용의 언어를 쓰면 좋겠다. 2020년 총선 때 황교안 총리와 종로에서 싸웠다. 명륜동에서 유세할 때 ‘여러분 황교안 후보 미워하지 마십시오. 저도 선거하다 보면 미운 마음이 생길 텐데 있는 힘을 다해서 그 마음을 억누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미워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이 얘기가 온종일 방송 자막에 나갔다.”
―정치 양극화 시대에는 ‘빌런’(악당)이 인기가 있다. 지난 대선은 양쪽 빌런의 대결이었다고 본다. 이낙연 대표는 빌런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이 시대와 안 맞는 것 아닌가?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 생각할 여지도 없고 ‘야지’도 없다. 나도 어떻게 하면 언론에 자주 나오는지는 안다. 그런데 그걸 위해서 내가 악당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악당 연기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혹시 그렇게 될 수 있는 약이 있으면 좀 소개해달라.”
―정치를 오래 하신 분인데 정치 양극화 완화를 위해서 역할을 하면 좋겠다.
“그렇다. 국가에 기여하고 떠나고 싶다. 무엇이 기여하는 길일까 고민도 하고 상의도 하고 그래야지.”
“4월 재보선 공천 후회, 지금도 괴로워”
—정치부 기자들끼리는 이낙연 전 대표를 ‘엄근진’이라고 부른다. 너무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는 뜻이다. 이 별명을 좋아하나?
“좋아할 리가 있겠나. 나의 수양 부족이다. (국무총리를 마치고) 오랜만에 당에 돌아왔는데 지도부가 아니었는데도 언론이 많이 주목하던 시기였다. 대선 후보 지지도가 높으니까 나한테 질문을 많이 했다. 내가 답변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엄중히 지켜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그 ‘엄중’을 한겨레신문 기자가 부정적인 의미로 낙인을 찍어놓았다. 엄근진의 시작이 그것이었다. 사실 부드러움도 힘인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내가 요령부득이다.”
—공직에 있을 때 부하들에게 너무 무섭게 했다는 비판이 있더라.
“그렇다. 내가 말을 극도로 절제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숨 막히게 할 수 있다. 굉장히 낮은 톤으로 점잖게 얘기하는데 그러면 괜히 무섭다. 그게 상대에게 어떤 느낌을 줄지 안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날 중에 술 마시면서 풀려고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늘 후회하고 반성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1년 뒤에 책을 쓰면서 이낙연 의원이 말한 ‘태도 보수’, ‘생활 보수’ 얘기를 했다. 지금도 유효한가?
“그렇다. 2012년 대선에 대해 내 나름의 패인 분석을 해서 홈페이지에 올렸다. ‘우리가 인권, 소수자 보호, 민주주의, 복지 같은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추구하는 태도에서는 막말이나 거친 태도를 피하는 게 좋다. 그걸 태도 보수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썼다. 김대중 대통령이 말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과도 통할 것이다. 어떤 정치인이 평양을 방문했는데 북한의 나이가 많은 사람이 ‘생각은 진보적으로, 행동은 보수적으로’라고 하더란다. 같은 의미다.”
—태도 보수가 중요한 이유가 뭘까?
“사람이 고령화, 고학력화, 고소득화하면 거친 것을 싫어하게 된다. 2012년 대선 때 그것을 우리가 놓쳤던 것 같다.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이 태도 보수의 전형적인 사람이다. 말이 약간 어눌하면서도 진정성이 느껴진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초기 기초생활보장제를 도입할 때 진보 진영에서는 ‘왜 이렇게 소심하게 하느냐’는 불만이 많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시작이 중요한 것이다. 처음부터 욕심을 내서 반대에 부닥치면 시작도 어려워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여야 간에 국가보안법 개정 의견을 모았는데 원칙주의자들의 반대로 개정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대로다.
“디제이 때도 부분 개정하는 쪽으로 합의했는데 진보진영에서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대목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당 대표 시절 2021년 재·보선에서 전 당원 투표를 하고 당헌을 개정해서 서울·부산 시장 후보를 공천했다. 결과적으로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었다. 비판을 받더라도 원칙을 지켰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중에 후회했다. 그때는 대선을 눈앞에 둔 시점에 서울과 부산의 민주당 조직을 놓아버릴 수 없다는 것이 제일 큰 고민이었다. 굉장히 개혁적인 후배 정치인도 선거 포기하면 안 된다고 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 조직이 다른 후보자들에게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대선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꽂혔다. 그런데 더 큰 것, 더 가치 있는 것을 잃었구나 하는 후회를 하고 있고, 지금도 굉장히 괴롭다.”
—기자, 의원, 지사, 국무총리를 했다. 누구나 정치를 하면 대표처럼 잘할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할까?
“학생들한테 ‘정치를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똑같은 답을 한다.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라. 다수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그걸 우선 알고, 그걸 도와드리는 방법이 뭔지를 한번 찾아봐라. 혼자 하기 어려우면 주변과 같이하든지 그게 정치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리고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정치의 기교를 먼저 배우지 마라.’ 지금도 똑같은 생각이다. 유럽처럼 정당 내에서 청년들을 양성하는 그런 정당이 빨리 돼야 한다.“
—청년정치학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안 되고 있다. 그냥 줄 잘 서는 것이 첩경이지, 뭘 배우는 게 첩경이 아니라고 하는 풍조가 있다. 안 좋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트럼프를 둘러싼 가장 큰 쟁점이나 비판이 퍼블릭 마인드가 없다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북한 상대해야”
—미국에서 공부하고 ‘대한민국 생존 전략’ 책을 썼다. 내년 말에 트럼프가 당선될까?
“현재 바이든과 대결하면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만약 트럼프가 당선되면 또 방위비 올리라는 얘기를 할 것 같다. 그리고 대외 정책을 즉흥적으로 할 것이다. 그래서 안정감이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질 것이다. 그게 좀 두렵다.”
—북미정상회담 재개가 가능할까?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에 대한 미련 같은 게 남아 있을 것 같다. 지난번처럼 쉽게 들뜨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2018년 6월에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트럼프 두 사람이 처음 만나서 4개 항을 합의했다. 너무 쉬운 합의였다. 1번, 북미 간의 새로운 관계 수립, 2번,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3번, 북한 비핵화, 4번, 미군 유해 송환이다. 대단히 선언적이지만 사실은 그게 본질이다. 30년 동안 북한과 미국의 협상 내용이다.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민생에 직결되는 다섯개 항의 경제제재만 풀어주면 영변 핵시설 해체 용의가 있다’고 했다. 트럼프가 그걸 차버렸다. 만약 합의가 이뤄져 협상이 진행됐다면 북한 핵무장 스케줄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수 있었다. 경제제재 다 풀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섯 개를 얘기한 건데. 트럼프가 왜 그랬을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억측이 있다.”
—존 볼턴이 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또 하필 그날 트럼프를 사기꾼으로 몰았던 변호사 코언 청문회가 있었다. 트럼프가 회담장에 들어가면서 ‘스몰딜보다 노딜이 뉴스가 더 크지?’라고 물어봤다는 것 아닌가. 아무튼 김정은은 28시간 기차를 타고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갔다. 굉장히 상심했을 텐데 트럼프가 또 ‘나 판문점 갈 텐데 나올래?’ 이렇게 트위터를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과 셋이 만났다. 비유하자면 남자친구한테 퇴짜 맞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남자친구가 ‘너희 집 앞인데 안 나올래?’ 그러니까 또 나온 여자친구 같은 그런 신세가 된 거다. 그런데 역시 아무것도 못 얻었다. 그러고 나서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내가 각하를 만난 뒤에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것을 나의 인민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겠는가’라는 대목이 있다. 투정, 하소연, 항의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김정은 위원장의 마음은) 미련과 미움 근처에 가 있을 것 같다.”
—바이든은 아무것도 안 했다.
“오바마는 ‘전략적 인내’라는 포장이라도 하면서 아무 일도 안 했지만, 그때 부통령이었던 바이든은 대통령이 된 뒤 포장도 없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트럼프는 뭔가 할지도 모르겠다.”
—트럼프가 당선돼서 대화가 재개되면 북한과 미국이 일괄협상을 해야 할까?
“그렇게 해야지. 그런데 트럼프라는 사람이 즉흥적이고 좀 게으르다. 일을 계속 추진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신문 기사가 되는 일은 간간이 생길지 모르겠는데 체계적으로 추진할지는 확신할 수 없다.”
—우리 정부의 태도도 중요할 텐데 2027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다시 집권하면 가능성이 좀 열리지 않을까?
“그래야 한다. 그런데 북한이 핵을 갖기 전과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 지금은 우리의 접근이 달라져야 할 거다. 똑같은 소리를 할 수는 없다.”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나?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북한이 어떤 상태일 거다. 그러니 어떻게 접근해야 그나마 대화가 된다’는 생각은 있어야 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처럼 비핵화하면 도와주겠다는, 이런 비현실적이고, 담대하지도 않고, 구상도 아닌 제안을 하면 안 된다. 내가 그동안 제안했던 것은 북한과 미국의 수교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것인데, 이제는 최종적인 목표는 비핵화로 두고, 거기에 가는 발걸음은 ‘상호위협 감축’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면 좋겠다. ‘뮤추얼 스레트 리덕션’.(Mutual threat reduction) 1999년 페리 보고서에 나왔던 얘기다. 페리는 ‘미국이 원하는 북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하라고 제안했다. 상호위협 감축이라는 개념에서 접근하면 접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북한에도 대화에 임하기가 조금 쉬울 것 같다.”
“그때그때 인기·여론에 포획된 민주당”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경제에서 실패했다고 한다. 동의하나? 특히 부동산 정책은 실패했다고 하는데?
“부동산 정책은 실패했다. 국민에게 많은 실망과 상심을 드렸던 게 사실이다. 그 점은 지금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러나 경제 실패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소득주도성장이라고 한마디로 매도하면 안 된다. 이름이 무엇이든 저소득층의 소득을 올려서 불균형을 조금이나마 완화한 기간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이외의 방법이 과연 있는가, 대안이 있는가, 그걸 묻고 싶다. 미래를 위한 전략산업으로 바이오·반도체·미래차를 제시했다. 그건 지금도 유효하다. 국가가 할 수 있는 지원을 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혁명에 가까운 경제발전을 가져올 만한 기술혁신은 국가가 주도했다. 민간이 주도할 수 없다. 언제 흑자가 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터넷도 미국 국방부 산하 연구소에서 나왔다. 국가 주도 연구개발 투자는 엄청나게, 대담하게 지원해야 한다. 미래 전략산업이 그 세 가지보다 더 있어도 좋다. 문재인 정부는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임 정부가 했다고 무너뜨리면 안 된다.”
—민주당은 그런 논쟁을 안 하는 것 같다.
“그렇다. 그래서 그냥 문재인 정부가 실패했다는 주장이 함부로 나도는 것이다. 소득 격차를 줄이는데 다른 방법이 과연 있나? 소득 불균형을 완화하는 방법은 혁명이나 전쟁을 하지 않는 한 누진세밖에 없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거두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 역사적으로 그렇다. 그런데 지금 ‘부자 감세하겠다. 복지는 미래 세대 약탈이다’ 이딴 소리나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민주당에도 오히려 문재인 정부가 잘못했다는 주장은 있더라.
“정신 나간 사람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다른 예산 돌려서 약자들 도와주려고 했더니 탄핵하자고 그런다고 했는데, 그거 오도 아닌가? 복지가 미래 세대 약탈이라고 그러는데, 진짜 미래 세대 약탈은 알앤디 예산 삭감이다. 그나마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경제성장 방법, 그리고 유일한 방법, 완전한 방법은 혁신밖에 없고, 혁신의 방법은 알앤디다. 국가 주도 알앤디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한 책이 있다. ‘기업가형 국가’라는 제목이다.”
—15년 집권 경험이 있는 민주당인데 왜 논쟁을 안 할까?
“그때그때 인기나 여론에 포획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민주연구원을 당으로부터 독립시켜서 긴 호흡의 뭔가를 하도록 해줘야 한다. 대표 바뀌면 민주연구원도 확 바꿔버린다. 안타깝다. 싱크탱크가 없어서 당연구원을 하는 것이다. 예산도 몇 퍼센트 이상 쓰게 되어 있다. 민주당이 지향했던 가치가 옳았는지, 실수가 있었다면 뭐가 잘못된 것인지 평가해서 내놓는 작업이 상시로 이루어져야 한다.”
—총선 때 후보들이 지원 유세를 요청하면 도와줄 건가?
“그래야겠지만 왜 도와줘야 하는지를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엉망이니까 이쪽 찍어달라’는 말만 해야 한다면 내가 나가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서로 네거티브 전쟁하는데 용병처럼 끌려들어 가는 건 별로 의미가 없지 않나?”
—민주당이 총선을 치르기 위한 비전과 국가 미래전략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직은 그렇다. 지금까지 행태가 국민 눈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민주당이 어떻게 하면 좋겠나?
“줄기차게 말하면 반영이 된다. 알앤디는 상당한 정도로 복원될 것 같다. 나도 다급해서 ‘미친 짓’이라는 용어까지 썼는데 그렇게 몇 가지를 집중해서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면 반영될 수 있다. 몇 가지에 집중해서 바로 잡으면 좋겠다. 저소득층 증가나 이런 문제는 좀 세게 붙어도 될 것 같다.”
—민주당이 뉴스의 중심에서 자꾸 멀어진다. 앞으로 활동을 할 건가.
“할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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