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초 매진 ‘클릭 전쟁’ 끝나면 느긋한 1박2일 낭만 하이킹
1박2일 25㎞ 봉화·안동 산길 30명 함께 걷기
고수 동행에 보급소…“혼자선 못할 일, 한계 넘어”
산을 걷는 내내 오른쪽에는 경북 봉화군 청량산 주봉의 단풍 숲이 펼쳐졌다. 장인봉·선학봉·자란봉·연화봉을 곁에 두고 걸으니 노랗고 빨간 잎사귀들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했다. 마치 산봉우리와 함께 걷는 것 같았다. “이 바위에 서보세요. 사진이 잘 나옵니다.” 운영진은 여러 번의 사전 답사를 통해 사진이 잘 나오는 장소와 구도를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찍으니 근사한 기념사진이 되었다. 콧속으로 상쾌한 가을바람이 들어왔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뱉길 반복했다. 앞서 걷는 이들은 경쾌하게 거리를 벌리고 있었고, 뒤쪽의 일행은 쉬지 않고 비탈길을 올라왔다. 지난달 28~29일 봉화에서 열린 ‘아트워크트레일 에이비시(ABC) 봉화’ 풍경이다.
아트워크는 경북 안동, 봉화, 청송 일대의 산을 1박2일에 걸쳐 걸으며 문화유산과 자연을 느끼는 하이킹 페스티벌이다. 에이비시(ABC)는 하이킹의 기초를 의미하기도 하며, 안동·봉화·청송 세 지역의 앞글자를 딴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2회를 맞았다. 내가 참가한 아트워크 봉화에서는 30명이 이틀간 약 25㎞를 걸었다. 봉화 청량산 밀성대-축융봉-신선봉-높은대봉을 차례로 넘어 안동 왕모산에서 일몰을 보고 인근 야영지에서 밤을 보낸 뒤 다음날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가벼운 백패킹이 가능한 이유
경북 북부 지역의 오지를 걷고 지역의 역사·문화 이야기를 들으며 지역 특산품을 선물받을 수 있는 아트워크는 인기가 많다. 그래서 티켓 구하기가 어려웠다. 예매를 하려 웹페이지에 들어갔으나 이미 매진이었다. 행사를 며칠 앞두고 지인에게서 티켓을 겨우 양도받았다.
“아트워크 봉화는 오픈 후 3분 만에 티켓이 다 팔렸어요. 청송 편은 43초 만에 끝났고요.” 아트워크 프로그램을 만든 권우창(43) 대표의 말이다. 안동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서른살부터 백패킹을 했다. “국내외 유명한 하이킹 코스를 찾아다녔어요. 그러다가 2019년 안동에 91㎞ 길이의 ‘선비순례길’이 생겼는데 걸어보니 좋더라고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낚시했던 물, 삼촌과 캠핑했던 산이 다 그곳에 있었거든요.” 멀리까지 찾아다닌 아름다움을 가까이서 발견한 권 대표는 친구를 불러 같이 걷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한국정신문화재단 관광상품 공모전에 ‘아트워크’ 프로그램을 제출해 수상했다. 안동 고유의 하이킹 행사 소식에 소주와 맥주, 커피와 과일즙, 빵을 생산하는 안동의 기업들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협찬을 했다. “안동 출신 사람들과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다 보니 고향의 모습을 알리고 소개하는 데 뿌듯함을 느껴요.” 권 대표는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무리를 이끌었다.
아트워크 참가자의 나이는 2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까지이고 30대가 가장 많다. 여성과 남성 성비는 6 대 4 정도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했고, 봉화에서 가까운 부산과 경남에서 온 참가자도 있었다.
낮은 따뜻하고 저녁은 선선한 가을은 야외 행사 하기 좋은 계절이다. 경북 봉화에서 아트워크가 진행되던 날 경남 거창군 우두산에선 아웃도어 편집숍 문리버마운틴이 주최하는 문워크 트레일이, 전북 진안군 운장산에선 아웃도어 브랜드 트레일스기어가 진행하는 비피엘 하이크(BPL HIKE)가 동시에 열렸다.
이들은 왜 하이킹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됐을까. 아트워크 트레일에 참가하려 경남 창원에서 온 그래픽 디자이너 박경민(31)씨는 오디오 클립에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단편소설 ‘도보여행’을 듣고 배낭을 멘 하이킹을 꿈꿨다. “혼자 걸으며 여행할 때 비로소 나 자신을 볼 수 있다”는 문구가 마음을 움직인 것. 올해 6월에는 제주도 오름 백패킹을 다녀왔다. 산에서의 백패킹은 그에겐 이번이 처음이다. 혼자 걷던 그가 페스티벌의 무리에 합류한 데는 안전상의 이유가 컸다. “사람의 발자취가 없는 깊은 산길이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야간 산행, 맨발로 강을 건너는 일은 아무래도 여성 초심자가 혼자 하기 어려우니까요. 안전을 우선시하느라 도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여러 명이 함께니까 안심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20㎞를 넘게 걷는 동안 박씨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했다. “혼자라면 일단 쉬고 목표를 조정했겠죠. 하지만 앞서 걷는 사람이 있고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니 멈출 수가 없었어요. 한계를 넘어선 것 같아 기뻐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그는 다음에 더 길고 어려운 코스의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다.
페스티벌마다 난이도는 다르지만 모두 응급 상황을 대비하고 있다. 지피엑스(GPX·위치정보시스템 파일 포맷)로 동선을 사전에 공유하고 하이커의 안전과 입산 금지 시간을 고려해 컷오프 시간이 설정된다. 급할 때는 안전 요원이나 동료 하이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소수 인원으로 진행된 아트워크 봉화도 산악구조대 자격증이 있는 운영진 세명이 함께 걸었다. 이날도 점심을 먹은 뒤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진 참가자 한명이 바로 하이킹을 멈추고 야영장으로 이동했다.
백패킹 경험이 적은 초심자라면 페스티벌 참가가 경험치를 쌓는 데 도움이 된다.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을 모두 챙겨야 하는 일반 백패킹과 달리 페스티벌에는 중간 보급소가 있다. 아트워크의 야영지에서는 물과 맥주, 핫팩을 제공했다. 모두 무게가 나가 가방에 넣기 주저하는 물건이다. 또한 언제든 주변 고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날 나는 헤드랜턴을 가방 맨 아랫단에 넣는 실수를 했다. 산속에서는 해가 순식간에 진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땀이 식으면서 체온이 떨어지는 와중에 가방 속 짐을 모두 꺼내기 시작한 내게 권우창 대표가 자신의 헤드랜턴을 건넸다. 괜찮다고 사양했으나 이내 빛 없이 한발짝도 걸을 수 없는 어둠이 내렸다. 냉큼 받아 무사히 야간 산행을 마무리했다.
박경민씨 역시 어려움을 겪을 때 동료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1천원에 구매한 헤드랜턴의 광도는 야간 산행에 적합하지 않았다. 뒤에서 오던 커플이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박씨를 호위무사처럼 에워쌌다. 한명은 앞에서, 다른 한명은 뒤에서 밝혀 세명이 한 몸처럼 걸어 내려왔다. 참가자들이 야영지에 도착한 저녁 8시에 야간 산행이 종료됐다.
“여럿이 다양한 음식 먹을 수 있어”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아트워크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다. 2018년 영화 ‘와일드’를 보고 백패킹을 시작해 주말마다 장거리 하이킹을 다니는 회사원 서다래(31)씨는 서울에서 내려왔다. “다양하게 먹을 수 있어 좋아요.” 그가 말한 아트워크 참여 동기는 의외였다. “혼자만의 백패킹에선 즉석식품을 간단히 먹어요. 그런데 여러 명이 모이면 조금씩 여러 가지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이번에도 숙성 햄이 올라간 카나페, 양갈비, 삼겹살과 목살, 토마토 매리네이드, 어묵탕, 볶음밥을 원 없이 먹었어요.” 나는 몸이 좀 아파서 텐트에 누워 있느라 저녁 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지만, 서씨의 얘기를 들으니 이해가 됐다. 온종일 찬바람 속을 걷고 헤매다 뒤늦게 먹은 저녁 식사가 얼마나 다채롭고 따뜻했는지.
사람들과의 교제도 빼놓을 수 없는 아트워크의 매력 포인트다. 서씨는 “규모가 작은 행사라 모두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좋다”고 했다. 그는 일주일 전인 지난달 21일, ‘오티티’(OTT·On The Trail)에도 다녀왔다. 오티티는 웹진 ‘베러위켄드’의 하이킹 행사로 2015년 4월부터 시작했다. 이틀 동안 강원 태백 등지의 54㎞의 산길을 걷는 이 행사에는 500명이 참가했다.
서다래씨는 이런 형태의 하이킹 페스티벌이 점점 늘어나는 게 즐겁다고 했다. “저도 첫 백패킹을 혼자 섬으로 다녀왔고, 작년엔 아트워크에도 참가했어요. 같이 다니며 즐거움을 나누는 기쁨이 있더라고요. 취미가 같은 사람을 알게 되는 것도, 평소 주변에서 만나기 어려운 또래 외의 연령·직업·배경의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나는 것도 재밌어요.”
아트워크 참가자들은 “블로그 잘 보고 있어요”, “실제로 보니 반갑네요” 같은 인사로 말문을 튼다. 평소 알던 지인끼리 모임을 만들어 하이킹을 하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블로그와 유튜브, 인스타그램으로 취미 생활을 공유하던 ‘랜선 지인’을 오프라인 이벤트에서 처음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오랜 백패킹 경험자들도 하이킹 페스티벌 참가를 즐긴다. 13년차 하이커인 자영업자 오진곤(40)씨는 지난달 문워크 트레일에 참가해 우두산을 올랐다. 그는 “하이킹 페스티벌이 늘면서 지역의 중소 도시를 방문할 수 있어 좋다”며 “지역에서 평소 야영이 어려운 장소를 제공하고, 하이킹 관련 브랜드에서는 용품을 협찬해주니까 좋다”고 했다. 오진곤씨는 평소 부인과 둘이서 백패킹을 다닌다. 서로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고 둘의 속도에 맞춰 산을 오른다. 하지만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건 거의 오씨 혼자서다. “행사에 와서 다른 하이커의 스타일을 구경하는 게 재밌어요. 혼자 와서 옛 친구나 ‘온라인 지인’을 만나기도 하고, 새로 누군가와 친해지기도 하죠.” 그는 페스티벌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이커, 아웃도어 편집숍과 매체의 에스엔에스를 팔로하고 공지를 눈여겨본다. “가을엔 아웃도어 행사가 몰리니까 일정이 겹치지 않도록 신경을 써요. 가장 중요한 것은 티케팅을 성공하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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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보다 티케팅이 어려워”
행사 이튿날 아침, 깊은 잠을 자고 속이 가라앉았다. 근처에 텐트를 친 하이커들끼리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핫초코에 주최 쪽에서 제공한 드립백 커피를 내렸다. 달고 진한 카페모카가 몸에 에너지를 만들었다. 안동 출신 운영진 강종현씨는 다른 방식으로 드립백을 활용했다. “뜯지 않은 드립백 커피와 물을 텀블러에 넣고 하산하면 콜드브루 커피처럼 마실 수 있어요. 차가운 물밖에 없는데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유용하죠.” 하이커의 창의력은 끝이 없다.
아침을 먹고 다시 짐을 챙겼다.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인 맨발로 물을 건너는 길이 남아 있었다. 낙동강 줄기가 안동 맹개마을 앞을 흐르고 있었다. 머뭇거리며 등산화와 양말을 벗었다. 기세 좋게 흐르는 물은 영상의 온도에도 한겨울처럼 차가웠다. 돌은 미끄럽기도 뾰족하기도 해 종잡을 수 없었다. 발이 시려 빨리 건너가고 싶어도 중심을 잡기 어려워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고려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내려온 일이 있어요. 그때 안동도 초겨울이었는데 이런 물이 흐르고 있었대요. 왕과 왕후인 노국공주가 맨발로 천을 건너는 게 딱해 주민들이 나섰어요. 허리를 굽혀 다리를 만들어 공주가 그 등을 밟고 건너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져요. 그 이야기에서 시작된 놀이가 ‘놋다리밟기’예요. 발목을 튼튼하게 하고 몸의 균형을 잡는 데 좋아요.” 권우창 대표가 물을 건너며 설명했다.
요즘의 하이킹 페스티벌은 영화나 음악 페스티벌과 같다. 분초를 다투며 티켓을 예매한다. 요즘 하이커들 사이에선 ‘하이킹 페스티벌은 완주보다 티켓 예매가 어렵다’는 얘기가 정설이다. 티켓 가격은 행사마다 차이가 있다. 아트워크 트레일은 4만원, 오티티와 문워크 트레일은 각각 9만원이다. 행사 참가자에게만 주어지는 ‘웰컴기프트’로 티셔츠, 손수건, 스티커, 캠핑과 하이킹 장비 등을 받을 수 있다. 행사 때마다 다른 로고와 디자인으로 굿즈를 만들어 수집욕을 자극하기도 한다. 아트워크 트레일은 내년 봄, 여정을 이어갈 예정이다.
조서형 지큐코리아 웹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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