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퇴르는 생명 윤리를 위반했을까
루이 파스퇴르는 프랑스에서 큰 존경을 받는 과학자다. 화학에서 생물학까지 수많은 업적을 남긴 파스퇴르의 범상치 않았던 삶을 돌아보며 그의 업적 이면에 있는 의혹을 풀어보자.
● 의혹1. 정치적 성향 덕에 논쟁에서 이겼다?
파스퇴르의 유명한 업적 중 하나는 ‘거위 목 플라스크 실험’으로 자연발생설을 비판하고 세균설을 실험으로 보여준 것이다. 발단은 루앙 식물원 원장이자 자연사학자인 펠릭스 푸셰의 실험이었다. 1858년 푸셰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건초를 수은으로 끓여 ‘멸균’ 처리해 플라스크에 넣었음에도 미생물이 자연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했다고 보고했다.
파스퇴르가 쓴 노트에 따르면 이듬해 2월경 그는 젖산 발효에 관한 실험을 완료한 후 자신의 발견이 미생물이 공기와 같은 무생물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자연발생설과 배치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푸셰에게 그의 실험에 결함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하여 1859년 3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자연발생 문제를 규명하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학자에게 ‘알흠베르 상’과 상금을 수여하겠다고 발표했다. 두 학자의 자존심을 건 실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이 대결을 위해 1860년에 파스퇴르는 거위 목 플라스크 실험을 고안했다. 그는 설탕과 효모를 섞은 배양액을 가열해 살균한 상태에서 플라스크를 불꽃으로 녹여 거위 목과 유사한 S자 형태로 만들고 밀봉했다. 이 경우 플라스크 내에는 어떠한 미생물도 생기지 않았다.
이후에는 유리관 끝 부분을 깨트려서 공기를 유입시키고 재밀봉하는 방식으로 공기가 배양액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그는 20개의 플라스크를 준비해 다양한 지역에서 채취한 공기를 유입시키며 공기에 따라 미생물이 발생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음을 보였다. 결국 1862년 12월 1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파스퇴르에게 알흠베르 상을 수여하며 파스퇴르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파스퇴르가 승리한 이유가 수상 위원회가 그를 편애했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있다. 당시 판결을 내린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위원들이 무신론적이고 반기독교적인 함의를 지닌 자연발생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이유다. 반면 보수주의자이자 가톨릭 교도에다 한창 주가를 높이던 30대의 젊은 파스퇴르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가 좋아할만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위원회의 정치적 성향 등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퇴르가 푸셰보다 훨씬 실력있는 실험가였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파스퇴르는 푸셰 실험의 오류나 부정확성을 수차례나 발견하고 지적했으며 더 창조적이면서도 엄밀한 실험 설계를 보여줬다.
또한 이 대결의 평가 대상이 자연발생설이 아닌 실험이 얼마나 탁월한지에 맞춰져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가 파스퇴르의 정치적 성향을 그의 탁월한 실험들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 의혹2. 언론 플레이에 능수능란했다?
푸셰와의 논쟁에서 파스퇴르가 보여준 뛰어난 실험 능력 덕분에 파스퇴르가 언론 플레이에도 능수능란한 과학자였다는 점은 종종 간과된다. 내성적이던 파스퇴르는 실험실에서 실험할 때 가장 행복해하던 과학자였고 연구 경력 초기에는 언론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파스퇴르는 차츰 언론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과 자신의 연구 성과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를 본인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 노력을 꾀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1881년에 있었던 탄저균 백신 공개 실험이다. 1880년 파스퇴르는 독일의 미생물학자 로베르트 코흐의 탄저균 연구를 참조해 독성이 약해진 탄저균을 백신으로 만들었다. 그는 산소에 미생물의 독성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론하며, 병원체를 공기에 노출 및 건조시켜 독성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백신 개발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듬해 봄 백신 접종에 회의적인 수의사 히폴리트 로시뇰이 파스퇴르에게 백신 효능에 관한 공개 실험을 제안하자 파스퇴르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프랑스 북부 푸이 르 포르 지역에 있는 로시뇰의 농장으로 가 그곳의 양 떼와 다른 우제류 동물들을 대상으로 탄저균 백신 접종 실험을 진행했다. 먼저 50마리의 양 중 절반에게 탄저균 백신을 접종하고 이후 모든 양에게 탄저균을 접종했다. 이틀 후인 6월 2일 그는 백신의 효과를 확인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파스퇴르와 로시뇰은 물론, 농부, 수의사, 정부 관료와 지역 정치인, 신문기자들을 포함한 2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결과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백신을 접종한 양들은 모두 생존한 반면 접종하지 않은 양들은 대부분 바로 사망했으며 나머지도 곧 죽음을 맞았다.
파스퇴르의 공개 실험은 주의 깊게 조율된 시연이었다. 그는 탄저균 백신 개발의 경쟁자였던 장 조제프 투생과 우선권 경쟁이 치열하던 상황에서 자신의 백신 제조법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썼다.
파스퇴르는 공기 중에 오랜 시간 노출시켜 약독화시킨 탄저균을 양들에게 접종한 것처럼 소개했지만 실제로는 조수인 샤를 샹베를랑이 소독용 화학물질인 중크롬산 칼륨에 노출시켜 약하게 만든 탄저균을 접종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파스퇴르는 공기 중 노출을 통해 약독화된 백신의 효과가 다소 불분명하고 압도적인 결과를 보이지 못할 가능성을 걱정했다. 극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자신의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만든 백신을 쓰면서까지 실험을 성공시키려 한 것이다.
탄저균 백신의 성공은 파스퇴르와 동료들이 불러 모은 기자들 덕택에 전국 일간지뿐만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해외까지 신속히 퍼져나갔다. 공개 실험은 파스퇴르 백신 연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파스퇴르의 실험실에서 생산되는 탄저균 백신은 프랑스 농부의 필수품으로 빠르게 상업화됐다.
● 의혹3. 광견병 백신 개발 중 생명 윤리를 위반했다?
파스퇴르의 연구 가운데 언론의 혜택을 크게 입은 것은 바로 광견병 백신 연구다. 1885년 파스퇴르의 광견병 백신이 조제프 메스테르와 장 바티스트 쥐필이라는 두 소년을 치료하는 데 연달아 성공하면서 파스퇴르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듬해 겨울까지 2500여 명이 파스퇴르의 실험실에서 광견병 치료를 받았다. 파스퇴르와 그의 백신은 실험실의 기초과학 연구가 의학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파스퇴르의 몇몇 실험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생명윤리를 위반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파스퇴르는 메스테르와 쥐필 이전에도 두 명의 환자에게 광견병 백신 치료를 시도했다. 이 두 환자에게 접종한 백신은 어떤 동물 실험도 거치지 않았으며 파스퇴르는 죽을 때까지 이를 알리지 않았다.
이 같은 ‘인체 실험’ 문제는 물론, 광견병 백신 자체에 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이 존재했다. 처음 광견병 치료를 받은 메스테르와 쥐필의 경우 이들을 물은 개들이 실제로 광견병에 걸렸던 것인지에 대한 증거가 분명치 않았다.
1886년에는 광견병이 의심되는 개에게 물린 쥘 루예라는 열 살 소년이 백신을 접종받은 후 원인 불명의 이유로 사망했다. 소년의 시신에서 채취한 체액을 토끼에게 주입한 결과 모두 마비성 광견병으로 빠르게 죽었다.
이 결과는 백신이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소년이 백신 때문에 광견병에 걸렸을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파스퇴르 측은 실험 결과를 숨기고 요독증에 걸려 사망했다고 위증했으며, 이는 반세기가 지난 이후에야 밝혀졌다.
21세기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런 일들은 모두 생명 윤리나 연구 윤리를 중대하게 위반한 사례다. 오늘날 우리의 윤리적 잣대를 과거에 백신을 처음 개발한 선구자들에게 들이대는 일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파스퇴르의 연구 윤리 위반은 시대를 초월해 과학의 본성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파스퇴르의 조수들은 이 거짓말이 광견병 백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학이 정직할 것이라는 사회의 신뢰를 저버려도 되는 걸까. 오늘날의 우리도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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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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