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세자의 공간은 어떻게 생겼을까[알면 쉬운 문화재]
일제강점기 거치며 완전히 철거
목재 건물에 팔작지붕 얹어
내부 전시 공간…죽책·교명 등 선보여
우리 ‘문화재’에는 민족의 역사와 뿌리가 담겨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도 있듯이 수천, 수백년을 이어져 내려온 문화재는 우리 후손들이 잘 가꾸고 보존해 나가야 할 소중한 유산이죠. 문화재는 어렵고 고루한 것이 아닙니다. 문화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 쉽고 친근하게 배울 수 있는 문화재 이야기를 전합니다.<편집자주>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최근 경복궁 동궁(東宮) 권역에 ‘계조당’이 복원 공사를 마치고 110년 만에 문을 열었어요. 계조당은 조선시대 왕세자의 집무 공간이자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인데요. 조선시대에 왕의 후계자를 정하고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일은 국가의 큰 행사였어요. 가장 좋다는 날을 골라 문무백관과 종친이 한자리에 모였죠. 왕은 그 자리에서 책봉을 알리는 문서인 죽책과 당부의 글인 교명, 도장 등 3가지를 내렸어요. 왕위를 안정적으로 이어받아 좋은 임금이 되길 바라는 바람을 담았죠. 왕실 잔치가 열리기도 했던 왕세자의 공간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계조당은 문종의 뜻에 따라 1452년 건물을 철거했어요. 그러다 1860년대 후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었고,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재위 1907∼1910)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 191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조선 왕실의 권위를 지우고 식민 통치 정당성을 알리는 조선물산공진회 행사를 준비하면서 완전히 철거됐죠.
계조당 권역은 흥례문을 지나 근정문 앞에서 오른쪽 쪽문을 지나면 들어갈 수 있어요. 정문인 명사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길게 늘어선 행각과 담장이 전각인 계조당을 둘러치고 있는 모습인데요. 명사문으로 들어가면 본당인 계조당을 만나볼 수 있어요. 계조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지어진 아담한 목재 건물이에요. 담장, 행각, 계조당 지붕에는 전통수제기와들이 이어져 있어요. 지붕의 기와를 잇는 장인인 번와장이 계조당 지붕을 겹처마 팔작지붕(여덟팔자(八字) 모양의 지붕)으로 올려 웅장함을 더했죠.
내부는 조선 왕세자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어요. 왕세자 책봉 과정에서 임금이 왕세자에게 내리는 죽책, 교명, 도장을 복제한 유물 등 10여 점을 선보이는데요. 1651년 효종(재위 1649∼1659)이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내린 죽책에는 ‘좋은 성품을 갖추고 학문에 힘쓰라’는 당부가 담겨 있어요. 계조당을 쓴 두 왕세자인 문종과 순종 관련 유물도 볼 수 있어요. 역대 국왕의 글과 글씨를 모아 놓은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문종의 글씨와 순종이 왕세자로 책봉될 당시인 1875년 만든 옥도장은 복제된 유물로 전시해 놓았죠. 이번 전시는 12월 18일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이윤정 (younsim2@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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