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자랑이었는데"…취업 구덩이에 빠진 '알파걸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다 때려치우고 일본에 가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살래."
폭탄선언을 한 딸 아영(이하 가명)의 말에 엄마는 가슴이 철렁였다.
딸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외국어고등학교를 거쳐 명문대에 입학했다. 조금 과장해서 '속 한 번 썩여본 적 없는' 딸이었다. 아들이 있었지만 딸보다 공부를 못했기에 딸에 대한 기대가 훨씬 컸다.
그러나 그런 아영에게도 취업전선은 만만치 않았다. 준비를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청년 구직자들 사이에선 '취업 9종 세트'란 은어가 있다. 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 공모전 입상, 인턴 경력, 사회봉사, 성형수술 등 취업에 필요한 9가지 조건을 의미한다.
아영 같은 여성 청년들은 20대 내내 '노동을 위한 일' 사이클을 거친다. 취업설명회, 인턴, 정부 지원 프로그램 훈련생, 예비 사회적 기업 인턴 등 수십 개의 '일 아닌 일'을 경험한다.
신간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봄알람)를 쓴 김현미 연세대 교수는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 자란 20대 '알파걸'들이 취업전선에서 인생 첫 시련을 겪는다고 말한다.
"소위 좋은 일자리인 전문직 정규직은 구조적으로 여성에게 좁은 문이다. 아무리 딸의 가치가 상승해도, 딸의 능력이 월등해도, 딸에게 투자를 해도, 딸에게는 쉽게 열리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취업이 용이하다는 주장도 있다. "게임할 것 다하고 취직하더라", "여자는 전문성과 능력이 있어도 필요 없다. 남자인 게 스펙"이란 자조 섞인 넋두리까지 여성들 사이에선 나돈다.
아르바이트하며 비싼 학비와 용돈을 마련해야 하는 저소득층 출신 여성들도 취업이 어렵긴 마찬가지.
1990년생으로 지방에서 고교를 졸업한 하영 씨는 서울 소재 대학에 와 졸업할 때까지 수십 개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민선 씨도 마찬가지다. 수업료를 벌기 위해 야간까지 일하다 보니 수업 시간에 자는 날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요요 이행에 시달린다.
요요 이행이란 청년들이 "장기화되는 이행기 동안 취업-실업-교육-훈련 상태를 반복적으로 오고 가는" 현상이다. 청년들은 교육에서 취업으로 이행한 후 다시 교육 및 훈련을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꿈을 실현하거나 정규직 일자리를 얻기란 쉽지 않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설사 그런 어려움을 모두 뚫고 정규직 일자리를 잡아도, 일하고 있는 여성 선배들을 보면 눈앞이 깜깜하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40대 중반 이상 시니어 여성들은 남성 중심의 회사문화에서 악착같이 버텼다. 그 과정에서 "명예 남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일부는 높은 자리에 올랐다. 이들 시니어 여성의 특징은 "남성 화법"을 쓰거나 "틈만 나면 자기 업적, 일상, 가족, 일, 취향 등을 시시콜콜 설명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남성의 관점으로 하는 얘기"가 주니어들에게 불편함을 준다.
"정작 남자 임원은 안 시키는데 이분은 커피 타와라, 술 따라 드려라 시키세요. 남자들이 입으로는 저렇게 점잖은 척하지만 그래도 막상 해주면 좋아한대요. '너희 승진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하면서요. 자신이 올라간 방식을 그대로 강요하는 것 같아요." (직장인 선희 씨)
'나는 사다리를 기어서 올라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시니어 여성들은 "너무 많은 말을 하고, 그것이 털털하고 성격 좋은" 모습인 양 착각한다. 또한 여성 후배보단 남자 후배를 편애하는 경향도 있다. 저자는 여성 관리자의 남성 선호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조직에서 축적되어온 성차별과 관리직 여성이 소수인 구조에서 기인하는 심리"라고 설명한다.
이 때문에 20~30대 여성들은 여성 선배를 남성 선배들보다 오히려 더욱 꺼리는 경우가 많다. "회사의 여자 선배를 보니 희망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시니어 여성들은 그런 후배 여성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염려한다. 그러면서 점점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고 외치는 '늙은 캔디'가 되어 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은 취업 현장에서 경험하는 20~6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들은 직장 생활을 하며 삼중고를 겪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일단 진입이 쉽지 않다. 진입한다 해도 돌봄을 병행하며 직장 내에 팽배한 남성 중심주의 문화를 헤쳐 나가며 버티기도 어렵다. 버틴다 해도 그 과정에서 남성중심주의적 직장문화에 동화되기 일쑤다.
저자는 "서로 다른 여성들 내부의 이질적인 경험과 위계 관계가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행한 지속적인 젠더 배치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하며, 공동의 대안을 구성해가도록 사유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며 "공동의 대안은 일터의 불의와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실업, 직업 훈련, 조세, 가족, 연금, 복지 제도에 뿌리 깊은 성 불평등을 인식하며 모든 이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314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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