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문장을 빨아먹는다”…쓰레기 파묻혀 책읽던 노인, 반역자가 됐다 [나쁜 책]
곰팡내 나는 지하실, 주황빛 전구 불빛. 폐지 압축기 기계음이 괴성처럼 울립니다. 체코 맥주에 잔뜩 취한 한 노인이 천장에서 쏟아진 종이를 쓸어 담습니다.
시궁쥐들은 종이책을 갉아먹고 파리떼가 주변을 맴돕니다. 천장 뚜껑문을 열고 소장이 고함을 칩니다. “한탸! 거기 있나? 제발 술 좀 그만 마시게.” 노인 한탸는 장갑 안 낀 맨손이지만, 좀 지저분해도 괜찮습니다. ‘맥주와 책’만 있다면 세상은 천국이니까요.
말단 노동자인 노인 한탸가 ‘뜻하지 않게’ 프라하 최고 철학자가 되는 이야기. 이로써 공산주의 노동당의 무지(無知)를 지적으로 ‘공격’했던, 체코 20세기 최고의 금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줄거리입니다.
‘체코 소설의 왕’으로 추앙받는 작가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을 소개합니다.
지하에서 폐지를 처리하는 한탸는 35년간 같은 일을 했습니다. 결국 고된 노동과 탁한 공기에 머리털이 다 빠져버릴 정도였지요. 한탸가 ‘초록불은 전진, 빨간불은 후진’인 압축기에 더러운 종이를 넣고 철사로 묶어낸 폐지뭉치는 지붕 없는 열차에 실려 도시 프라하 인근 제지공장으로 실려갑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폐지는, 그러나 한탸에게 ‘물질로서의 종이’만은 아니었습니다. 정부가 검열해 폐기를 명령한 진귀한 도서, 지상에서 구경하기 어려운 사상서·문학책이 뒤섞인 상태였습니다.
한탸는 배운 건 없었지만, 압축해야 할 고서(古書)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그는 폐지 압축 전에 마치 미사를 올리듯 ‘독서 의식’을 치렀습니다. 죽어가는 책들을 향한 마음이었지요.
그러고도 읽지 못했던, 그래서 버릴 수 없던 책을 한탸는 방에 쌓아뒀습니다. 침실엔 종교서와 철학책이 2톤이나 쌓여 있었고, 너무 많은 책들 때문에 화장실엔 변기만 남을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집안 전체가 책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35년을 축적한 독서력으로, 한탸는 ‘뜻하지 않게’ 체코 프라하 최고의 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회 최하층부 말단 노동자이면서 사상, 문학, 이념, 종교를 전부 섭렵한 비밀의 현인이었습니다.
수 리터들이 맥주를 마시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죽음의 운명을 앞둔 책을 기쁘게 음미하는 삶, 그것이 한탸의 생활이었습니다.
맥주에 취한 건지, 책에 취한 건지 모를 정도로 혼몽한 한탸는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어떤 날은 지하실에 젊은 예수가 앉아 있고, 또 어떤 날은 우수에 젖은 노자가 압축통에 몸을 기댔습니다.
니체와 괴테, 셸링과 헤겔, 에라스뮈스와 칸트, 쇼펜하우어와 사르트르가 유령의 모습으로 지나갑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환영들이 출몰했습니다.
◎ 젊은 예수에게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맥주를 단지째 들이켰다. 반면 노자는 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덤을 찾고 있었다. 곤죽으로 짓이겨진 파리떼와 뒤섞인 핏방울이 튀는 와중에도 예수는 그윽한 황홀경에 빠져 있고, 노자는 깊은 우수에 젖어 무심하고도 거만한 자세로 압축통 모서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52쪽)
파리떼와 쥐떼가 우글거리는 지하실에서 한탸는 책을 사랑하고 사상을 존경합니다. 그는 책 문장을 ‘쪼아대고 빨아댐으로써’ 현실 저 너머의 삶을 바라봅니다.
◎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10쪽)
전입 온 젊은 압축공들은 신입 사회주의 노동당원들이었습니다. 어린 그들은 한탸처럼 책의 가치를 분류하기는커녕 컨베이어 벨트에 종이를 올린 뒤 장서들을 무참하게 ‘살해’합니다. 마치 “살아 있는 닭들의 내장을 신속하게 뜯어내는 숙련된 여공같은”(95쪽) 모습이었지요.
누군가 전생(全生)을 걸고 쓴 문장들, 책의 판형을 결정하고 교정을 보고 삽화를 넣고 제본하여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책 제작의 모든 순간이, 사회주의 압축공에겐 가치 없는 일로 취급됩니다.
한탸는 사회주의 노동당 당원인 젊은이들에게 밀려납니다. 소장은 한탸에게 다른 지시를 내립니다. “마당에 나가서 일단 비질부터 하라”고 말이지요.
이어 먼 인쇄소로 가서 백지(白紙)를, 즉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 종이를 다루는 업무를 배우라고도 지시합니다. 백지엔 한탸가 추앙했던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적혀 있지 않았지요.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을 한탸는 빼앗겼습니다.
울분에 찬 한탸는 최후의 반역(反逆)을 계획합니다.
작가 보후밀 흐라발이 이 책을 쓰던 시기는 소련을 포함한 바르샤바 조약군 4개국(소련,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이 체코를 침공한 직후였습니다. 이 침공으로 체코에 자유화 열기가 불었던 ‘프라하의 봄(1968년 1~8월)’은 끝장이 났고, 공산주의 점령이란 긴 암흑기가 도래합니다.
정부가 불허하는 공식 금서임에도, 이 책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생명력은 길고 끈질겼습니다.
이 책은 1976년 사미즈다트(самиздат)로 첫 출판됩니다. 사미즈다트란 ‘지하출판’을 말합니다. 네다섯 부쯤 인쇄해 지인에게 한 부씩 비밀리에 돌리고, 책을 받은 지인이 다시 이를 네다섯 부쯤 복사해 다시 나눠주는 방식이 바로 사미즈다트였습니다.
소설 속 한탸는 오래 전 프로이센 왕실 도서관 인장이 찍힌 금장 도서가 폐기처분되던 끔찍한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1945년 폐망 직전의 나치가 프로이센 왕국의 귀중한 장서를 ‘뚜껑’ 없는 무개화차에 싣고 떠나던 모습이었지요.
금박을 입힌 책은 당초 프라하 외무성 부속건물에 숨겨졌지만 누군가 책의 은신처를 발설하는 바람에 책들은 ‘전리품’으로 규정돼 기차에 실린 채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히틀러의 나치는 사라졌지만, 이 소설은 1970년대 체코를 점령한 소련이 나치와 다를 바 없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자동화 압축기는 ‘생각의 도살자’와 같았습니다.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이념과 체제가 만들어낸 소련의 사상 억압(②)까지 고발한 것이지요. 한탸가 보여준 ‘마지막 선택’을 통해 ‘그들이 책을 폐기하더라도 사상의 자유는 절대 폐기할 수 없다’고 책은 지적합니다.
보후밀 흐라발과 밀란 쿤데라는 같은 체코 출신 작가이면서 여러 면에서 대조적 위상을 지닙니다. 위기의 시대를 문장으로 견뎌낸 작가란 점에서 두 사람은 동질적이지만,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고, 흐라발은 끝까지 체코에 체류하며 체코어를 고집했습니다.
이는 단지 거주지 차이만이 아닙니다. 쿤데라와 흐라발의 소설 속 주인공도 차이를 보이니까요.
쿤데라가 창조한 문학적 인물이 ‘시대를 내려다보며 고뇌에 빠진 허주무의 지식인’인 반면, 흐라발의 피조물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사회에선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바보’로 묘사됩니다.
사실 작가 흐라발은 프라하 소재 체코 국립대 카렐대 법대 출신 엘리트였습니다. 심지어 흐라발은 법학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1348년 개교한 카렐대는 중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흐라발이 작가와 겸했던 직업은, 그의 학위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작가 보후밀 흐라발은 제철공장 노동자, 선로 감시원, 전보 배달부, 장난감 가게 점원, 약품상 대리인, 단역 연극배우, 폐지 수집상, 공증사무소 서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정권으로부터 탄압 받는 작가에게 세상은 가혹했습니다.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한탸 역시 폐지를 꾸리는 인부였던 흐라발의 생업적 경험이 녹아든 캐릭터인 것이지요.
‘Too Loud A Solitude’로 유튜브에 무료 공개되어 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결말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다소 다르지만, 지하공간을 구경하는 재미가 넘치는 작품입니다. 영화가 소설보다 좀 더 종교적이란 점도 특기할 만합니다. (자막 때문에 걱정이실 수 있지만 비언어극이어서 누구나 시청 가능합니다.)
특히 흐라발의 소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는 영화 ‘가까이서 본 기차’란 제목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영화는 1967년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입니다.
‘가까이서 본 기차’를 연출한 이르지 멘델 감독은 역시 흐라발의 작품인 ‘영국왕을 모셨지’를 2006년 영화화합니다(제목 ‘나는 영국왕을 모셨다’). 흐라발이 창조한 영화 속 인물은 원작에서와 같이 하층민 정서를 다룬 블랙 유머로 가득해 그 유쾌함이 매력적입니다.
시끄러움은 세계의 혼돈과 소음을, 고독은 자기 안으로의 침잠을 의미합니다. 비극적 운명에 처한 소란스런 세상. 나치의 열차와 소련의 압축기가 당대인의 정신을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세계에서, 한탸의 유일한 선택은 다름 아닌 ‘책’이었습니다.
책은 한 권 한 권이 모두 다른 세계로의 이탈을 경험하도록 돕는, 낱권짜리 ‘정신적 티켓’입니다. 책의 세계는 고요해서 문장을 읽는 순간만큼은 다른 세계로 떠나볼 수 있으니까요.
◎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 순간 나는 내 꿈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에 가닿게 된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16쪽)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바로 그런 책을 사랑하는 마음, 종이와 잉크의 물성을 가졌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종의 ‘정신적 티켓’인 책에 대한 헌사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일은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결코 헛되지 않다는 걸, 지옥과도 같은 세계에서 벗어날 일종의 출구가 책이라는 걸 작가 보후밀 흐라발은 지하실의 한탸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장은, 그 사람의 인생을 말해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아니었던가요. 책은 한 사람이 지나왔던 시간을 입증하는 가장 아름다운 알리바이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한탸와 같은 사람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소수라 할지라도요.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책이라는 형식에 삶을 바쳤던 작가들, 책과 함께 한 공간에서 삶의 어느 한때를 보냈던 독자들을 위한, 고요하고도 빛나는 걸작입니다.
※다음주에는 척 팔라닉 ‘인비저블 몬스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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