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모두 끌어안는 애도’ 디흘레 까데 메모아
와인은 그림과 비슷하다.
와인 양조가들은 매년 새 작품을 만들고, 이 작품들은 경매에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작가 생전보다 사후에 높은 평가를 받는 점도 유사하다.
양조가들에게 포도는 물감이다. 어떤 화가들은 한가지 색으로만 그림을 그린다. 단색화(monochrome)라 부르는 화풍이다. 이들처럼 일부 양조가들은 한가지 포도 품종이 가진 특성을 오롯이 살리는 방식을 좋아한다.
와인 대부분이 단색화에 가깝다. 포도 한 품종만 사용한다. 많아야 세가지 이상 섞지 않는다. 세가지 포도를 섞더라도 그 가운데 한 품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중에 팔리는 와인 가운데 열에 아홉이 그렇다.
와인 종주국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엄격한 원산지 통제 명칭(AOC·appellation d’origine contrôlée)법으로 포도 품종 사용에 제한을 둔다. 특정 지역에서 ‘좋은 와인’이라는 정부 인증을 받으려면 오로지 지정한 한 가지 품종 포도만 사용해야 한다.
세계 최고가 와인이 즐비한 부르고뉴 지역이 대표적이다. 이 지역에서 가장 좋은 밭을 뜻하는 그랑크뤼(Grand cru) 등급 와인 레드 와인은 모두 피노 누아라는 품종 포도로만 만든다. 화이트 와인은 오로지 샤르도네를 써야 그랑크뤼 등급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갖가지 색채가 주는 기하학적 배열을 선호하는 화가들 역시 많다. 세계 현대미술 시장에서 최근에는 단색화 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유구한 미술사에서 주류는 항상 이런 여러 색을 사용한 채색화였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렸던 마르크 샤갈, 그와 쌍벽을 이뤘던 앙리 마티스, ‘기쁨의 화가’ 라울 뒤피 작품에서는 나라와 세대를 초월해 미묘한 감성과 힘찬 에너지,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갈 동력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와인에 이런 다채로움을 살리고 싶어하는 와인 생산자들은 수확철이 다가오면 비슷한 고민을 한다.
포도 생산지 기후는 매년 변한다. 어느 해는 비가 많이 오기도, 때로는 지나치게 가물기도 한다. 강수량과 일조량 뿐 아니라, 산불과 전염병 같은 자연 재해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들은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에서도 매년 비슷한 품질로 와인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여러 포도 품종을 섞는 블렌딩(blending)을 통해 예년과 비슷한 품질을 이끌어 내는 좋은 방법이다. 한 가지 포도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 때 생길 수 있는 결점을 여러 가지 품종을 섞어 보완할 수 있다.
프랑스 알자스 지방 와이너리 디흘레 까데(Dirler-Cadé)가 선보이는 메모아(memoire)는 매해 5종에서 많게는 10여종에 달하는 포도 품종을 사용한다.
1871년 설립한 디흘레 까데는 5대째 한 가문이 줄곧 와인을 생산하는 가족경영 와이너리다. 5대 장 디흘레(Jean Dirler)는 그 이름을 1대이자 고조할아버지 장 디흘레로부터 물려 받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가문을 이끌어 갈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그 이름을 물려주는 경우가 잦다.
메모아는 프랑스어로 ‘기억(memory)’을 뜻한다. 5대 장 디흘레는 아버지부터 고조할아버지까지 선대에 대한 기억을 모두 아우르는 와인을 원했다.
이 와인은 와이너리 창립 초기부터 키웠던 알자스 지방을 대표하는 화이트 포도 품종을 모두 섞어 만든다.
이 지방을 대표하는 화이트 와인 품종은 리슬링과 게뷔르츠트라미너, 피노 그리, 뮈스카, 피노 블랑, 실바너 등이다. ‘알자스 와인의 왕’으로 일컫는 리슬링은 강인함과 부드러움, 매혹적인 꽃 향기를 지녔다. 게뷔르츠트라미너는 달콤하지만 남성답다. 피노 그리는 이국적인 느낌이 강하다. 뮈스카는 상큼한 청춘 드라마 같은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각 포도는 때로는 좋았던 기억, 달콤했던 기억을 한편으로는 씁쓸하지만 강인하게 이겨냈던 기억을 담았다. 장 디흘레는 좋은 기억 뿐 아니라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남겨야만 하는 기억’을 위해 선대가 키웠던 포도를 모두 한 자리에 모았다.
이런 시험적인 와인 양조 기법은 다른 와이너리는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양조법이다. 너무 많은 포도 품종을 한꺼번에 섞으면 조화를 이루기보다 불협화음을 빚기 쉽다. 그러나 장 디흘레는 자기 주장이 강한 와인보다 음식을 감싸 안을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와인을 추구한다.
장 디흘레는 여러 기억을 포용하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 푸드르(foudre)라고 부르는 거대한 참나무통을 사용한다. 보통 전 세계적으로 와인을 숙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참나무통에는 와인이 200리터 남짓 들어간다.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는 225리터가 들어가는 ‘바리크’를, 부르고뉴 지방에선 228리터가 들어가는 ‘피에스’를 선호한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간혹 ‘혹스헤드’라는 300리터짜리 참나무통을 쓰기도 한다.
장 디흘레가 사용하는 참나무통은 이보다 35배 정도 더 크다. 무려 7800리터가 들어간다. 눕혀 놓은 참나무통 하나가 사람 키보다 크다. 이 거대한 참나무통을 사용하는 효과는 와인에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큰 참나무통을 사용한 와인에서는 진한 나무향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로지 나뭇결 사이로 들어오는 미세한 공기에 의한 숙성 효과만 거둘 수 있다. 와인 질감과 향을 중성적으로 바꾸면서도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는 비법이다.
이 와인은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구대륙 화이트와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수입사는 하이트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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