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100년 전 ‘바이올린의 神’ 하이페츠 연주회가 열린 날
누군가는 그를 ‘황제’, 또 다른 이는 ‘신’(神)으로 불렀다.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셰링, 아이작 펄만이 그 ‘누군가’다. 핀커스 주커만은 ‘우리들의 왕’이라고도 했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 왕, 황제를 넘어 신(神)으로 치켜세운 이는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 1901~1987)다.
영화 ‘아마데우스’음악을 연주한 지휘자 네빌 마리너(1924~2016)卿은 원래 런던 심포니에서 활약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미국 체류 중 하이페츠에게 몇 차례 레슨을 받은 뒤, 마리너는 지휘자로 완전히 전업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하이페츠만큼 연주할 자신이 없었다”는 게 이유 중 하나였다. 2013년 11월 구순의 마리너가 런던 자택에서 해준 얘기다.
◇앙코르로 ‘치고이너바이젠’ 연주
‘바이올린의 神’ 하이페츠가 스물두살 때인 1923년 경성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중국 연주를 마치고 일본에 첫 리사이틀을 하러 가던 길이었다. 11월5일 저녁 7시30분 현 조선호텔 맞은편 경성공회당에서였다.
‘손을 꼽아 고대하던 악계의 귀재 ‘하이프엣츠’씨의 연주회는 지난 5일 오후7시반에 시내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순서를 밟아 음악은 진행되어 위대한 그의 예술로 빈약한 조선 악계에 색채를 돋치었다. 천 여 군중이 집합한 그 장내에서 우러나는 묘곡(妙曲)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고 취하게 하였다. 한가지 두가지로 끝을 막을 적마다 남산 밑 한 모퉁이를 헐어내는 듯한 박수 소리는 ‘하이프엣츠’의 예술을 이해한다는 그것도 일종의 률같이 들리었다. ‘지고이네와이젠’으로써 끝을 마친 하씨 일행은 많은 인상을 남기고 그날 밤 11시 차로 신호(神戶: 고베)로 출발하였더라.’(‘천여 군중을 도취케한 하氏의 入神한 妙曲’, 매일신보 1923년11월7일)
청중 1000여명이 참석한 연주회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잃고 취하게’할 만큼 열연이었다고 한다. 하이페츠는 이날 무엇을 연주했을까.
◇도쿄 순회연주와 거의 같은 프로그램
테너 겸 음악사학자 이유선(1911~2005)이 쓴 ‘한국양악백년사’(165쪽)엔 하이페츠의 이날 연주회 프로그램이 실려있다. 참고문헌에 출전을 명시하지 않고, ‘음악회 프로그램’이라고만 나와있어 실물을 봤을 가능성이 높다.
이날 하이페츠 연주는 피아니스트 이시도르 아크론(Achron)이 반주를 맡았다. 헨델의 소나타 D장조로 시작, 비에니아프스키의 협주곡 D단조, 그리고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 모차르트 ‘미뉴에트’, 쇼팽의 ‘녹턴’ D장조(빌헬름 편), 베토벤의 성악곡 ‘아테네의 폐허’ 중 ‘터키행진곡’과 ‘데르비쉬의 합창’, 차이콥스키의 ‘멜로디’, 바치니의 ‘요정의 춤’순(順)이었다. ‘치고이너바이젠’은 앙코르로 연주한 것같다.
경성 프로그램은 하이페츠가 주말인 9~11일 도쿄에서 연주한 프로그램과 첫번째만 제외하면 일치한다. 도쿄 제국극장 초청으로 간 하이페츠는 공연장인 제국극장이 관동대지진으로 손상돼 사용할 수없게 되자 제국호텔 연예장에서 연주했다. 오후 4시 시작한 연주회 첫번째 프로그램은 레오폴드 샤를리에가 편곡한 비탈리의 ‘샤콘느’였다. 이날 티켓은 6엔, 10엔씩이었다.
하이페츠는 12일 제국호텔 근처인 히비야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자선음악회를 열었다. 입장료는 1엔씩으로 수입 3000엔(또는 2800엔)을 지진구호사업에 기부했다고 한다. 이 미담은 일본 언론에 두고두고 회자됐다.
◇하이페츠 초청한 김영환
한국인 첫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김영환(1893~1978)은 하이페츠 리사이틀을 성사시킨 주역이었다. 조선인 최초로 관립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한 김영환은 1918년 귀국해 연희전문 음악과장을 지냈다. 유학 시절 동경에서 대가들의 공연을 많이 본 그는 경성에서 이런 공연을 선보이고 싶었다. 훗날 남긴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이 때 마침 바이올린의 거장 야사 하이페츠가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나는 즉시 동경으로 달려가 우에노 동창생을 통해서 경성에 데려 올 수 있도록 교섭했다. 동경에 머무르는 1주일 동안 하루만 경성에서 연주회를 갖도록 한 것이다.’ ‘개런티는 하룻밤 무대에 2000원을 줘야했다. 게다가 동경-경성간의 여비와 조선호텔에 묵는 숙박비까지 전담해야 했으니 부담이 큰 것이었다.’(김영환 ‘양악백년’ 109쪽)
그는 ‘쌀 한가마 값인 3원씩 받았지만, 500석을 다 팔아도 개런티 정도도 안나왔다’고 했다. 우리나라 청중은 적었고, 대부분 일본이나 서양인이었다고 한다.
◇세계적 연주자 첫 주인공 프리츠 크라이슬러
오스트리아 명 바이올리니스트 프리츠 크라이슬러(Kreisler, 1875~1962)는 하이페츠보다 5개월 여 앞선 1923년 5월23일 밤 경성공회당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작곡가로도 이름난 연주자였다. 경성의 외국인들로 이뤄진 국제친화회가 초청했다.
‘23일 오후8시40분에 국제친화회 주최로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세계적 제금가 ‘크리이슬너’씨의 연주회를 개최하였는데, 청중은 정각전부터 들어밀리어 세계적 제금가의 미묘한 현악을 최초겸 최후로 한번 듣기를 다투어 그 수효 천여명에 달하였다. 크라이슬너씨는 예복을 입고 한 손에는 제금을 들고 연단 중앙에 오르매 박수성리에서 인사를 마친 후 곧 연주가 시작되었는데, 씨의 신기한 묘곡은 청중을 취케하였으며 악성이라는 칭호를 듣는 이만큼, 군중을 놀라게 하였다.’(‘천여의 청중을 도취케한 악성의 入 神한 美曲’, 매일신보 1923년5월25일)
◇정무총감, 총독, 경무국장 부인 등 참석
최초의 세계적 연주자 내한 공연에 대해 한글 민간지도 환영했다. ‘예술적으로 많이 주리고 있는 우리 곳에도 차차로 세계의 명가를 맞아들이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만장한 청객의 적조하던 영혼에 한 생명을 부어주었다.’ ‘그같은 유명한 음악가를 우리 경성에 맞이하였다 하는 사실은 실로 우리 적막한 악단의 한 자랑이라 하겠다더라’(‘四絃琴의 세계적 명수 크라이슬러씨’, 동아일보 1923년5월24일)
크라이슬러의 연주곡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영환씨 회고처럼, 연주장에는 조선인들보다 일본이나 서양인이 더 많았을 것이다. 티켓값도 비쌌거니와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조선의 상류층은 적었다. 매일신보가 전한 주요 참석자로는 총독부 2인자인 아리요시(有吉 忠一) 정무총감을 비롯, 헌병사령관, 고등법원장, 식산은행 두취, 총독부 병원장, 총독·정무총감·경무국장 부인 등이 참석했다.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이완용이 포함됐다.
◇세계적 대가 속속 내한 연주
1924년에도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에프렘 짐발리스트가 내한 연주를 가졌다. 김영환은 이런 연주자들의 내한 공연을 기획하면서 빚도 많이 졌던 모양이다. ‘여러 차례 외국 연주가를 데려오다 보니 처음부터 이익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사업에는 소질이 없어 적자가 말할 수없을 정도였다. 이 때쯤은 고향의 조부님이 돌아가신 다음이어서 땅을 팔아서라도 돈을 댈 수는 있었다.’ 천신만고끝에 모셔온 세계적 연주자들의 리사이틀 뒤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 음악춘추사, 1985
김영환, 양악백년, 비온후, 2023
‘1923.11.9 야사 하이페츠 첫 來日’, 마이니치 신문 1922년11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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