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당나라엔 이백, 고려엔 이규보

박현주 미술전문 2023. 11. 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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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 11월 와인 기획전(사진=CU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고려의 23대 고종(재위 1213~1259)은 46년을 왕위에 있었지만 평생 밖으로는 몽골과 거란의 침입에, 안으로는 무신정권의 횡포에 시달렸다. 말년에는 아예 궁을 나와 신하의 집에 머물며 술과 바둑에 빠져 살았다.

‘한림별곡’(翰林別曲)은 고종 때인 1216~1230년 사이 이인로(李仁老), 김양경(金良鏡) 등 여러 유림이 함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규보도 저자 중 하나다. 한림별곡 제4장은 술에 관한 내용이다. ‘황금주’(黃金酒), ‘백자주’(栢子酒), ‘송주’(松酒), ‘예주’(醴酒), ‘죽엽주’(竹葉酒), ‘이화주’(梨花酒), ‘오가피주’(五加皮酒) 등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종류의 술 이름이 등장한다.

‘국선생전’에 나오는 ‘도잠’(陶潛, 도연맹)과 ‘유영’(劉伶)은 신선을 뜻하는 ‘선옹’(仙翁)으로 칭했다. 예종 때 이자겸이 송나라에서 ‘계향어주’(桂香御酒)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고려사 김인존 열전’), ‘고려도경’과 ‘속동문선’에는 이를 그의 동생인 이자량(李資諒)으로 적고 있다. 기록이 뜸한 고려 초기에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1075~1151)이 술을 노래한,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술잔을 기울일 때 봄이 따뜻함을 더한다”고 썼다.

고려 중후기에 지어진 문집을 보면, 당시의 술 문화와 풍속을 읽을 수가 있다. 25대 충렬왕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가요 ‘쌍화점’(雙花店)에는 고려 여인이 술을 사러 술집에 가서 주인에게 손목을 잡히는 내용이 나온다. 작자미상의 ‘청산별곡’(靑山別曲)에는 술 빚는 냄새에 과객이 발길을 멈춘다. 농가의 4계절을 읊은 김극기(金克己)의 ‘전가사시’(田歌四詩)에는 들에서 농부가 탁주(濁酒)를 권하는 풍경이 묘사돼 있다. 고려 시대에도 농사를 지을 때 막걸리를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탁주를 ‘농주’(農酒)라 부르는 배경이다.

‘제왕운기’(1287)에서 주몽신화의 술 이야기를 인용한 이승휴(李承休, 1224~1300)는 1290년 ‘빈왕록’(賓王錄)을 지었다. 1273년 원나라 황후와 황태자의 즉위식에 참석한 후, 와인 등 각종 술이 등장하는 몽골제국 황실의 ‘지순연’(質孫宴) 파티 현장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이때 충렬왕은 고려 세자로서 원나라 수도인 대도에 머물고 있었고 파티에도 참석했다. 원종이 죽자 1274년 몽골의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충렬왕이 고려로 돌아온다. 충렬왕은 원나라에서 와인을 마셨고, 고려에 돌아온 후에도 원 황제가 여섯차례나 와인을 보냈다. 조선 초기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온다. 우리 역사서 최초의 와인에 대한 기록이다.

고려 말 술 이야기가 등장하는 여러 사람의 시가 남아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규보는 단연 독보적이다. 이백과 두보를 빼고 당나라의 문학과 술을 이야기 할 수 없듯이, 그를 빼고 고려의 문학과 술을 이야기할 수 없다. 술을 논하기는 더욱 어렵다. 국선생전과 한림별곡이 아니라도 그는 수천편의 글을 지었다. ‘동국이상국집’에만 2000여편의 시와 산문이 실려 있다. 그 중에는 술과 관련된 시가 많다. 그의 시를 보면 고려시대의 사회상과 술 문화가 생생하게 보인다. 술과 시를 사랑한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에 비유해 ‘죽림칠현’ 혹은 ‘강좌칠현’(江左七賢)으로 불렸던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 이인로 등과 19세 때부터 교유했다. ‘국순전’을 지은 임춘은 이규보가 국선생전을 쓰는데 영향을 주었다. 임춘은 예천(醴泉) 임(林)씨의 시조인데, 예천은 단술이 나는 샘이라는 뜻이라 흥미롭다. 임춘도 죽림칠현답게 국순전을 비롯해 술에 관한 많은 시와 글을 남겼다.

이규보가 강좌칠현에 속하지 않은 이유는 단지 나이 차가 많아서였지만, 선배들은 그를 같이 대우했다. 오세재가 고향에 머물자 죽림칠현이 빈자리를 채우도록 권했지만 거절하기도 했다. 당시 조정의 중요한 문서는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려사 이규보 열전’). 창의성도 뛰어났다. 대나무로 만든 정자에다 네바퀴를 달아 ‘4륜정’이라는 모바일 정자를 만들었는데, 아직 실물이 남아 있다.

그는 11세에 이미 술을 마셨는데, 삼백이라는 아명을 가진 어린 아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는 ‘아삼백음주’(兒三百飮酒)라는 시에서 아들이 날마다 삼백잔을 마실까 두렵다며 고주망태 아비를 닮지 말라고 했다. ‘주패’(酒旆)에서는 봄바람에 나부끼는 주막의 깃발이 푸른색이라 묘사했다. 푸른 깃발을 달고 손님을 부르는 술집 풍경이 눈에 선하다. 막걸리(白酒)를 즐겨 마셨지만 지위가 높아지자 청주를 마셨는데, 벼슬에서 물러난 후 청주 구하기가 어려워짐을 한탄했다(‘백주시’(白酒詩)).

유혹을 참기 힘든 ‘색마’(色魔), ‘시마’(詩魔), ‘주마’(酒魔)를 ‘삼마’(三魔)로 칭한 시에서는 “나이 들어 색마는 없앴지만 시마와 주마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우음’(偶吟)에서는 “시와 술이 서로 필요하다”(상치양상득, 相値兩相得)고 했다. “술은 시흥을 돋우는 날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화주’(花酒)).

와인이 번성했던 원나라에서 유학한 후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근재(謹齋) 안축(安軸, 1282~1348)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귀국해서도 와인을 마셨다. ‘근재집’과 ‘목은시고’에 이에 대한 시가 남아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와인을 마신 것을 직접 묘사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색은 봄나들이 나왔다가 친구를 만나자 창고담당 관리에게 부탁해 즉석 와인 파티를 열었다. 당시 상류층에서 와인을 마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와인은 원나라에서 수입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이름 있는 학자들 중에서도 술에 관한 시를 남긴 사람이 많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음주’(飮酒)라는 시를 지었다. 조선의 건국을 두고 정몽주와 정치적 입장이 갈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정몽주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지었다. “술동이에 술은 넘치고, 손님들은 돌아갈 생각이 없네”(酒滿金尊客未歸).

고려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조선이 시작됐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ybbyu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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