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짜장면은 돌아오지 않아” 불어나는 이색 짜장면의 세계
2006년 방송된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주인공 나상실은 “지나간 짜장면은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일침을 놓는다. 극중 배신에 뒤따르는 기회비용을 설명하기 위한 대사였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니 이 말은 ‘한 그릇도 정성스럽게 배달하겠다’라던 철가방 홍보 문구와 특유의 진득함이 묻어 있는 ‘옛날짜장’을 그리워하는 현대인에게 고하는 예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민들의 음식, 물가 지표, ‘먹방’의 치트키로 자리매김해온 짜장면이 진화하고 있다. 배달 앱 ‘중식’ 카테고리까지 파고든 ‘마라 열풍’에 대적하기 위해 직접 방문을 유도하는 ‘재미 양념’을 한 큰술 더하고 다채로운 ‘부캐’ 메뉴를 곁들여 먹을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는 모양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인증은 기본이고, 입소문을 타고 불어나는 이색 짜장면의 세계를 둘러봤다.
# 맛있는 것 위에 또 맛있는 것
중국식 된장인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는 ‘작장면’에서 시작된 짜장면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재탄생한 ‘청출어람’ 음식 중 하나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기존의 맛 위에 새로운 맛을 더해도 어색함이 없는 메뉴라는 뜻일 것이다.
‘닭띠’ 3인이 창업한 경기 고양시 일산의 ‘닭짜장’은 간판부터 남다르다. 개업 초기 ‘닭’ 그림과 ‘짜장’이란 글자가 새겨진 이곳의 정체가 궁금해 방문하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시그니처 메뉴는 ‘닭 한 마리 쟁반짜장’이다. 어릴 적 퇴근길에 술 한잔을 걸친 아버지가 사 오던 노란 종이봉투 속 통닭을 해물 쟁반짜장면 위에 얹은 듯한 모습이다. 통으로 구워낸 한 마리가 부담스럽다면, 닭다리 하나가 추가된 짜장면이나 담백한 닭가슴살이 올라간 다이어터용 짜장면에 도전해 봐도 좋겠다. 전체적으로 소금 간이 세지 않아 아이와 함께 먹기에도 좋다.
그릇을 덮는 크기의 거대한 뚜껑도, 함께 따라오는 나무망치도 생경한 풍경이다. 경기 구리시에 있는 중국집 ‘리하’에서 판매 중인 ‘뿌셔뿌셔 해물 짜장’ 얘기다. 뚜껑을 망치로 부수고 먹어 일명 ‘망치 짜장’으로 불리는 이 메뉴는 “짜장면에 대한 좋은 추억을 남기고 스트레스를 풀고 가길 바라는” 사장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토르티야로 만들어진 빵 뚜껑은 동그란 그릇에 담아 모양을 잡고 180도의 기름에 30초간 튀긴 다음 식혀 틀을 잡아 만든다고 한다. 힘 조절에 실패할 경우 사방으로 떨어지는 빵 조각을 주워야 하는 수고는 각오해야 한다. 가격은 1만원. 가격조사 전문기관인 한국물가정보가 발표한 올해 짜장면의 평균 가격인 6361원보다는 다소 높은 편이다.
짜장면의 맛을 드러내는 숱한 표현 중 달달함은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단어다. 20년 경력의 수타 장인에 의해 탄생한 ‘객잔 바이 미쓰 꾸냥’의 ‘솜사탕 짜장면’은 설탕을 대신하는 솜사탕으로 단맛을 내는 이색 메뉴다. 눈, 코, 입 스티커가 붙은 솜사탕은 각종 해산물로 채워진 쟁반 짜장을 덮는 형태로 즉석에서 제작되는데 짜장면의 뜨거운 기운에 솜사탕의 형태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그대로 두어 서서히 자연스럽게 단맛이 녹아들게 하는 방법과 젓가락으로 푹 찔러 재빠르게 경계를 허문 다음 비벼내는 방법 중 양자택일해야 한다. ‘인증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는 고난도의 촬영 기술과 속도가 필수다. 가격은 2인분 기준 1만6000원. 일반 쟁반짜장과 비교해 1000원 비싸다.
#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짜장면은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흔한 음식이지만 ‘맛있는’이라는 세 글자가 추가되면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음식으로 둔갑한다. 한때 중국 음식 고수들은 맛있는 짜장면을 먹고 싶다면 간짜장을 주문하라 설파했다. 간짜장은 일반 짜장과 달리 주문과 동시에 조리되는데, 그 과정에서 물과 전분이 들어가지 않아 진득한 맛이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만약 이 질문을 현시점에 건넨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서울 서대문구에서 25년째 중식당을 운영하는 박선호 대표는 “기본에 충실한 식당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기본은 ‘맛’이다. 그는 “모든 음식점이 그렇겠지만 특히 중식당은 요리사의 손맛이 중요하다”며 “최근에는 힘든 일을 하려는 이들이 없는 데다 웍(중화요리용 움푹한 팬)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해 춘장과 채소를 적절하게 볶아내는 기술과 불맛을 조절하는 능력을 갖춘 요리사를 찾기 힘들어 직접 기술을 배우는 사장들도 많다”고 말했다.
중요한 건 맛에도 트렌드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중국요리 전문가 김형철씨는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맛의 기준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시대마다 다른 맛의 기준이 발생한다는 뜻”이라며 “중국요리는 재료, 조리 방식, 시간에 따라 맛이 변한다. 대중적인 음식이 결국 맛있는 음식으로 기록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경기 이천에 있는 ‘산타의 돌 짜장’은 ‘요즘 시대의 맛’을 재치 있게 표현한 곳이다. “주인도 세 번쯤 헤매는”이라는 소개처럼 잘못된 길에 들어서기 십상인 위치이지만 평일에도 ‘평균 1시간 대기’가 이어질 만큼 인기가 있다.
대표 메뉴는 ‘돌 짜장’ ‘양념게장’ ‘연어샐러드’다. 300도가 넘는 돌판에 올린 짜장면은 따뜻함을 넘어 뜨거운 맛이다. 맛집 블로거 유형선씨는 “느끼하고 달곰한 짜장면 위에 짭조름한 게장을 얹으니 말 그대로 ‘단짠단짠’한 맛이 났다”며 “남은 양념을 불판에 쓱싹 비벼 먹는 것도 이 메뉴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가격대가 있는 편이지만 무료로 제공되는 부침개와 라면이 있어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돌 짜장’ 중자 가격은 2만9000원, ‘루돌프 양념게장’ 반 접시는 2만3000원이다.
“요리는 진지해야 한다”를 모토로 대전에 자리한 퓨전 다이닝 펍 ‘청린’. 이곳의 ‘둥지 짜장’은 제육볶음과 고구마튀김, 짜장면이 조화를 이루는 메뉴다. 고구마튀김이 짜장면을 뒤덮은 모양이 꼭 새 둥지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작명됐다. 불향을 입은 제육볶음에 짜장면을 싸 먹거나, 짜장을 따로 비빈 다음 바삭한 고구마튀김을 곁들여 먹을 때 둥지 짜장은 진가를 발휘한다. 소스가 남았다면 공깃밥을 추가, 짜장밥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방법이다. 점심시간에만 한정 판매하는 메뉴이니 시간을 잘 체크해야 한다. 가격은 1만원.
매운맛 짜장면을 즐긴다면 ‘김치 짜장면’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남 여수에 있는 ‘린차이나’의 ‘차돌김치짜장’과 ‘김치짜장’은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입소문이 났다. 마트에서 살 수 있는 ‘김치 짜장 라면’과는 또 다른 깊은 맛이 있다. 볶은 김치의 매콤함과 꾸덕꾸덕한 짜장 양념, 면 위에 올려진 달걀부침이 삼박자를 이룬다. 고기도, 면도 푸짐하게 제공된다는 후기가 다수다.
제주 우도 ‘산호반점’의 ‘소라 톳 짜장면’은 지역 특산품을 활용한 좋은 예다. 지난 여름휴가 중 가족들과 이곳을 찾은 허만의씨는 “‘여행 와서 무슨 짜장면을 먹느냐’고 반문하던 부모님의 선입견을 깨기에 충분한 곳이었다”며 “한입에 먹기 좋게 썬 소라와 톳, 짜장면의 삼박자가 아삭하면서도 부드러운 오묘한 맛을 냈다”고 평했다. 직접 채취한 톳을 사용해 만든 메뉴인 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파라솔이 배치돼 해외 휴양지 분위기가 물씬 나는 야외 테라스 테이블 좌석이 ‘명당’ 자리다. 운이 좋다면 깜찍한 ‘길냥이’의 환대도 경험할 수 있다.
# 고기도 빠지고 면도 없는데, 어떻게?
“양파 향과 춘장 향이 오르는 짜장면을 비벼서 후루룩, 소리가 나게 한 입 먹었다. 면에 착 달라붙은 고기와 채소가 후루룩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잘게 갈린 고기에서 빠져나온 풍부한 기름 맛, 느끼한 게 아니라 따뜻하고 고소한 기름 맛이 가슴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시대에 뒤떨어진 요리 철학을 고집하다 결국 평생을 바쳐온 중국집을 폐업하게 되는 중식계의 숨은 고수 위광의 이야기를 다룬 김자령 작가의 장편소설 <건담 싸부>에서 ‘짜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이처럼 돼지고기는 짜장면의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재료다.
서울 이태원의 비건 레스토랑 ‘알트에이’의 짜장면에는 돼지고기가 없다. 대체육을 사용해 현대적인 맛과 풍미를 표현했다. 브런치 카페를 연상케 하는 첫인상과 다르게 구수한 ‘된장 짜장면’이 이곳의 간판 메뉴다. 수북하게 쌓인 된장은 의외로 맛이 강하지 않고, 매콤하면서 부드럽다. 차갑게 조리된 면의 탱글탱글함에 매료됐다는 평이 많다. 가격은 9000원.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시던 수제비를 짜장에 접목한 곳도 있다. 경기 시흥시 ‘자금성’은 갖은 채소를 한바탕 볶아내고 춘장을 넣어 불맛을 입힌 ‘해물 수제비 짜장’으로 유명하다. 24시간 숙성해 만든 쫀득한 반죽으로 만든 수제비는 젓가락보다 숟가락을 이용해 먹는 것이 편하다. 주문부터 반납까지 모든 것은 ‘셀프 시스템’으로 운영돼 불편함은 있지만 이를 충족시킬 만큼의 후한 인심의 양이다.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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