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연한 사건이 수없이 복제된 필연적 존재이다

2023. 11. 18.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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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곤조곤 얘기해 봅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자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글을 씁니다.
자크 모노. 위키피디아 커먼스

'우연과 필연'은 1965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자크 모노가 쓴 1970년의 작품이다. 부제는 현대 생물학의 자연철학에 관한 에세이이다. 여기에서 현대 생물학이란 분자생물학을 가리킨다. 물리학이나 화학과 생물학의 연구 대상은 분명히 구별되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분자생물학이라는 명칭을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분자는 물리학 내지는 화학의 연구 대상인 무생물이고, 생물학의 대상은 생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이란 무생물인 원소들이 미시적인 차원에서 우연한 조합으로 만들어진 분자들이 나름대로의 형태를 유지하다가 스스로를 복제하려는 의도를 가진 세포들의 집합체이다. 여기에서 미시적이란 10억 분의 1m인 옹스트롬 단위로 표현되는 크기의 세상이다. 자기복제라는 의도를 가진 생물은 대략 35억 년이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진화한 것이다. 첫 번째 세포는 허접하고 조잡했겠지만 이후 13억 년 정도 동안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다음 조금 더 정교한 세포로 진화했다. 그것이 진핵세포이다. 이후 다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구조를 가진 생물들이 출현했다. 그 복제 메커니즘의 중심에는 DN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암호 문서가 있다. 그 내용은 무엇을 어떻게 복제하라는 ‘지시 텍스트’이다. 그것이 어떻게 기록되었고 해석되어야 할지는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에는 종교나 철학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학적 사실이 담겨 있다. 생물은 무생물이기도 하며, 박테리아와 인간을 세포 차원에서 보면 별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생물을 구성하는 물질은 무생물과 다른 방식으로 변화한다. 무생물은 물리화학적 법칙과 조건을 따르지만 생물은 세포 집합체의 삶과 복제라는 목적에 맞춘 의도에 따라 변한다. 저자인 모노는 그런 생물체의 성질을 합목적성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합목적성은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우연한 물리화학적 사건의 발생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물질이 조합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제로는 아니다. 지구는 약 45억 년 전에 태어났고, 이후 10억 년 동안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원소들의 조합이 생멸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딱 한 번 ‘자기복제 메커니즘’을 가진 분자가 만들어졌다.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의도를 가진 자기복제 메커니즘이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생명체로 분화되고 진화하는 데는 그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 한 번의 우연이란 이런 정도의 확률이다. 높은 곳에서 해머를 들고 일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실수로 그 해머를 떨어뜨렸다. 한 의사가 위급한 환자를 보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 해머가 의사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두 번 다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우연한 사건이지만 의사의 죽음은 필연적일 것이다.

DNA. 게티이미지뱅크

여기까지는 다른 과학 책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과학적 설명’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다. 생물체의 자기복제 메커니즘은 DNA라는 문서에 쓰여 있는 텍스트를 통해 지시되고 구현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지시문이 단순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도대체 단순한 텍스트로 어떻게 구체적인 3차원 물질의 제작을 지시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정교하다 해도 텍스트만으로 주문자의 의도를 건축가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텍스트는 스스로 수많은 해석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물은 DNA의 텍스트가 의도한 구조와 형태를 정확하게 만들어낸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도깨비’ 때문이라는 것이다.

DNA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지는 단백질은 대개 비공유적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입체특이성을 갖는 복합체이다. 갑자기 조금 어려운 말이 튀어나온 것 같지만 의미는 간단하다. 지시문에서 언급한 재료인 구성요소들은 입체특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시대로 결합하면 만들어지는 형태는 단 하나뿐이다. 장난감 블록의 경우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니까 지시대로 조합되면 텍스트의 의도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지시대로 조합한단 말인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도 도깨비이다. 생명체가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이유가 도깨비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단백질을 만드는 요소들은 가까이 있기만 하면 ‘입체특이성’을 인식하고 정확하게 결합한다. 도깨비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런 요소들의 재료와 산물들을 관리하기 위한 조절 통제 장치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역할은 알로스테릭 효소가 맡고 있다. 이 효소가 작동하는 방식도 도깨비 같다. 효소에 의해 무엇인가가 만들어지면 효소는 덜 만들어지도록 통제한다. 스스로 필요한 양을 조절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들어진 대사산물이 사용되어 줄어들면 피드백을 통해 더 만들어 내도록 자극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거대한 대사산물이 공동제작될 때는 다른 구성 요소의 양에 맞추어 적절한 비율만큼 생산하도록 한다. 이 효소가 무엇인가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재료가 공급되면 그에 자극되어 제작한다.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작용들은 물리화학의 일반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이런 다양한 역할을 하는 도깨비를 단백질 분자에 의해 개발된 ‘공학기술’이라고 규정한다. 생체 내의 분자들은 생체의 합목적성에 따른 의도를 구체화하는 행동양식을 보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유기체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유기체 나름대로의 생리적인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자율적인 단위가 된다.

필자는 여기까지 읽고 일단 책을 덮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기한 SF 소설 같지 않은가. 이 책은 벌써 40년 전에 쓰인 오래된 과학책이다. 그동안 분자생물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저자가 비록 노벨상 수상자이지만 그것도 책 출간보다 조금 더 오래된 일이다. 출간 이후에 이 책의 내용에 대한 비판은 없었을까? ‘잘못된 지난날의 지식’은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1972년의 영문판과 함께 2022년에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을 세세하게 검증하며 다시 읽어 보았지만 필자의 능력으로는 그런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마존에서도 여전히 읽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자크 모노. 위키피디아 커먼스

흥미로운 점은 한국어판 번역자가 생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였다. 그것도 책 속에서 비웃음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베르그송을 전공했다. 그는 평생 철학을 공부했지만 이 책을 번역하면서 부끄러웠다고 한다. 저자인 모노의 철학에 대한 비판 앞에 너무나 무력했기 때문이었다. 그랬으니 역자도 책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2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모든 반대 측의 주장들을 깡그리 초토화시킬 만큼, 이 책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우연과 필연' 후반의 내용 역시 분자생물학의 중요한 개념들을 다룬다. 그러나 그의 설명에는 다른 과학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심원한 철학적 통찰력이 담겨 있다. 6장 ‘불변성과 요란’에서는 복제의 불변성에 발생하는 돌연변이는 양자적 사건이므로 ‘불확정성의 원리’에 지배된다. 그러므로 예측가능한 것이 아니다. 진화를 다룬 7장에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언어의 사용이 인간 신체의 진화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진단한다. 9장 ‘왕국과 어둠의 나락’에 이르면 7장의 논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언어의 사용은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진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 언어가 만들어낸 주류의 거짓된 가치와 사상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한다. 그것들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지식의 윤리를 제안한다. 진정한 사회주의 시스템은 참된 지식의 윤리에 기반해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중요한 고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우연과 필연·자크 모노 지음·조현수 옮김·궁리 발행·292쪽·1만7,000원

강창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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