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대이주 시대' ...국경은 존재할까 [책과 세상]

진달래 2023. 11. 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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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SF 작가 배명훈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
외교부 의뢰로 시작한 화성 이주 연구 3년
소설가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들 담아내
'지금 여기 우리' 돌아보게 하는 화성 이야기
2005년 SF 공모전에 단편소설 '스마트 D'가 당선되며 데뷔한 배명훈 소설가는 소설집 '타워' '안녕, 인공존재!' '미래과거시제', 장편소설 '신의 궤도' '은닉' '청혼'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 등을 내며 한국 SF 문학의 대표 작가로 떠올랐다. 래빗홀 제공

기압이 지구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곳. 최소 687일은 지나야 태양을 한 바퀴 돌아 1년이 되는 곳. 폭풍이 몰아치면 붉은 먼지가 높이 솟아올라 행성 전체를 뒤덮는 곳. 인류가 지구를 떠난다면 가장 먼저 이주 대상지로 꼽히는 행성, 화성의 이야기다.

배명훈(45)의 신작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는 그런 화성으로 인류가 본격적으로 이주하는 시대에 대비한 일종의 문학적 보고서다. 작가는 학사·석사 모두 국제 정치를 전공한 SF 작가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이번 소설집은 화성 이주가 본격화된 이후의 거버넌스를 주제로 외교부의 연구의뢰를 받아 보고서를 작성한 일을 계기로 총 3년간 "화성 연구자"로 지낸 끝에 수확한 문학적 결실이기도 하다. 작가는 과학도 인문학도 할 수 없는, 소설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들을 이 소설집에 담으려고 했다. 한 세기 전 '로봇'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카렐 차페크가 로봇의 반란을 상상하며 온갖 질문을 던진 것처럼, SF 문학의 상상력이 미래를 설계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서 유효하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수록작 6편은 화성 이주사를 시간순으로 배열했다. 인구 2,400명의 초기 정착 단계에서, 화성 면적의 1.3%가 거주민 정착지로 자리 잡은 시점까지를 배경으로 여러 각도에서 미래의 삶을 상상했다. 배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수록작 바탕에 깔린 일관된 메시지를 이렇게 전했다. “아무리 힘들고 두렵더라도 지구의 국제정치를 그대로 화성에 옮겨놓지는 말기를.” 기후위기와 빈곤 등 문제를 국경에 가로막혀 풀어내지 못하는 지구인의 우를 화성에서 또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종의 낙관, 혹은 기원"인 셈이다.

화성과 나·배명훈 지음·래빗홀 발행·304쪽·1만5,800원

첫 수록작인 '붉은 행성의 방식'은 그런 메시지를 충분히 담았다. 화성에서 발생한 첫 살인 사건을 다루지만 추리물은 아니다. 초반부터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공개되고, 작가의 시선은 살인 이후로 향한다. 사건은 스물다섯 명이 사는 주거지에서 벌어졌다. 광물학자가 온실 책임자를 살해했다. ’행성 공동 검역을 위한 식물 생태계 구성 예비 계획’을 작성하던 피해자가 깻잎 대신 샐러리를 들여온다고 했다는 이유로. 그럼 이제 광물학자를 지구로 돌려보내야 할까. 아니면 화성에 감옥을 만들어 수감해야 할까. 재판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겨우 2,400명이 사는 행성이다. 거주지를 떠나면 살 수 없기에 도피할 수도 없다. 지구의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토머스 홉스의 사회계약설에 기반한 어떤 제도도 화성에 맞지 않다고 보는 행정 관료 '희나'는 화성에 적합한 살인범죄 대응 제도를 만들려고 분투한다. 소설은 해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진다. 화성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과학기술이 아닌 소설적 관점에서 말이다.

동시에 작가는 지구인이 화성인이 되어도 불변하는 '무엇'도 탐구한다. 수록작 '김조안과 함께 하려면' '행성봉쇄령'은 그리움과 사랑이란 감정을 지긋이 응시한다. 닫힌 공간에서 누군가 배설한 감정도 영원히 순환하기에 "애정은 욕구가 되고 공감은 폭력이 된다"는 한 인물의 주장('행성봉쇄령')을 반박하듯 작은 우주선에서도 사랑이 싹튼다. 또, 그리움의 지속기간은 지구와 화성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기도 한다.

미국항공우주국(NASA·나사)이 화성에 보낸 탐사 로버 ‘퍼시비어런스’가 샘플을 수집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 영상을 재구성해 만든 사진. 나사 제공

그렇게 화성을 탐구하며 얻은 건 결국 지구의 인간, 그러니까 '지금 여기 우리'다. "다음 날 아침에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발견되는 것. 이 행성(화성)에서는 그게 사건"이라는 말에도, "무슨 일을 겪어도 화성인은 반드시 회복하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예요"라는 대사에도 화성 대신 지구를 넌지시 대입해 본다. 어색하지 않다. 작가가 국경과 국가 제도 때문에 생긴 모순과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 '화성'에 지구를 대입해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 낙관의 대상은 지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작가 특유의 능청맞은 유머러스함, 발랄한 상상력이 재미를 더한다. 예컨대 '위대한 밥도둑'에서 어려서부터 입이 짧았던 ‘이사이’가 화성 생활 11년 차에 간장게장이 떠올라 생기는 에피소드는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공감을 산다. 미래 식자재 도입 장기 계획을 바꿔보려고 전 세계에서 온 화성인들에게 ’밥도둑’ 의미를 진지하게 설명하는 이사이를 보며, 어느 순간 숙연해지기도 한다. 웃음 속에 허를 찌르는 질문을 담는 작가의 특기가 십분 발휘됐다.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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