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관, 원각사, 태화관… 대한제국에도 ‘백선생’이 있었다[박종인의 ‘흔적’]
[박종인 기자의 ‘흔적’] 명월관에서 식도원까지 원조 외식사업가 안순환
21세기 대한민국 외식 산업계는 물론 TV를 휩쓸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백 선생’ 백종원(57)이다. 프랜차이즈 외식 사업가로 성공해 TV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더니 국정감사 참고인으로 소환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집안 사업인 교육 사업에, 외식 사업, 방송인에 지역 경제 컨설턴트까지 보기 드문 캐릭터다.
100년 전 대한제국과 식민 조선에서 백종원과 비슷한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 조선 최초 요리점 ‘명월관’을 운영하는가 하면 그 성과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요리장으로 활동하고 이후 서울 곳곳에 음식점을 열어 대성공을 거뒀다. 그 음식점 가운데 한 곳은 민족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읽은 곳이다. 번 돈으로 서예가를 후원해 작품을 남겼고 성리학 서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100년 전 ‘백선생’, 안순환 이야기다.
◇기생 명월이와 국과수
2010년 6월 14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관돼 있던 인체 표본 하나가 폐기됐다. 그해 초 한 시민 단체가 “보관된 표본은 일제 때 활동했던 기생 명월이의 몸 일부”라며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민간에 반환하라”고 소송을 냈다. 표본을 확인한 법원은 “표본을 적법 절차에 따라 처리하라”고 권고했고, 검찰은 이를 이행했다.
그해 4월 시사 잡지 ‘시사저널’이 소송을 낸 시민 단체와 동행해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松本) 시립박물관에서 ‘홍련(紅蓮)’이라는 기생을 그린 그림을 확인했다. 화가는 화가 이중섭의 스승으로 알려진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다. 이시이는 조선에 체류할 때 홍련과 친했다고 알려졌다(2010년 4월 20일 ‘시사저널’). ‘국과수 명월이’와 ‘기생 홍련’ 이야기는 당시 엽기적인 반일감정 발화에 크게 일조했다.
◇조선 요리점 명월관과 안순환
실존 인물이라는 기생 홍련은 광화문에 있던 조선 요리점 ‘명월관’ 출신이다. 화가 이시이는 조선에 올 때면 명월관을 즐겨 찾았다. 외식 문화가 갓 시작된 조선에서 명월관은 방한 외국인이라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식당이었다. 그리고 명월관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외식 식당이었다. 개점일은 정확하게 1903년 9월 17일이고 주인은 안순환이다. 이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강무라는 서예가다. 강무는 2009년 ‘한글+한문’ 1월호에 기고한 컬럼 ‘명월관’26에서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인용해 개업 날짜를 밝혀냈다. ‘그간 날짜도 없이 막연하게 1909년 설로 전해왔던 것을 이제 1903년 9월 17일임을 정확히 알았다.’(강무, ‘명월관’26, 한글+한자문화 2009년 1월호,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1871년에 태어난 안순환은 가난하게 살았다. 1891년 서화를 사고파는 화상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는데 1894년 동학전쟁 와중에 번 돈을 다 잃었다(이용선, ‘조선의 큰 부자’ 2, 하늘출판사, 1997, p153). 관립 영어 학교와 무관 학교를 다닌 안순환은 1898년 동전을 찍어내는 전환국 건축감독으로 취직했다.
그런데 1901년 12월 6일 ‘대한제국 관보’ 2063호에 이런 공고가 보인다. ‘전환국 기수 안순환은 불성실[行事不善]하므로 면직함’. 또 그런데 이듬해 4월 29일 자 관보 2186호에는 ‘추후 사정을 조사해보니 용서할 수준이므로 징계를 철회함’이라고 적혀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근무 태도가 불성실해 안순환은 정부에서 해직당했고 이의를 제기해 5개월 뒤 복직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가 1903년에 한 일이 있다. ‘조선요리옥(朝鮮料理屋)’ 개점이다. 1908년 9월 18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2면에 ‘명월관 기념’이라는 제목으로 ‘작일(어제)은 명월관을 설시하던 제5회 기념인 고로 국기를 달고 기념식을 설행하였다더라’라고 보도했다. 즉 5년 전인 1903년 9일 17일 ‘명월관’이라는 요리점이 문을 열었다는 기사다.
그 명월관 주인이 안순환이다. 전환국 공무원으로 징계를 받을 정도로 시간을 투자해 구상했던 일이 사업이고 그 사업이 요리점이었다. 훗날 안순환이 회고한다. “요리점과 병원과 공원을 한두 번 본 후라야 그 나라 진중함이 어느 정도에 이른 것을 알지니, 우리가 요리점이 없는 수치(羞恥)를 면코자 관민상하(官民上下) 없이 즐길 요리점을 만든 지 근 삼십년이다.”(조선유교회총부, ‘조선유교회선언서급헌장’, 조선유교회총부, 1933, p135. 주영하, ‘조선요리옥의 탄생: 안순환과 명월관’, 동양학 50집,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2011, 재인용) 이미 1880년대 조선에 진출한 일본식 요리점에 맞설 조선식 요리점을 차렸다는 뜻이다.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일민미술관) 자리에 있는 공터에 개업한 명월관은 순식간에 장안 최고 명소로 성장했다. 1907년 대한제국 궁내부가 폐지되면서 황실에 소속됐던 요리사와 기생들을 고용해 오늘날 ‘한정식’이라 불리는 조선 요리를 개발해냈다. 안순환은 명월관을 서울 사는 권력자는 물론 시골 부자들도 돈만 있으면 요리와 가무, 심지어 성욕까지 채워줄 수 있는 사업으로 키웠다. ‘궁흉극악 송병준은 명월관주 안순환의 각색 요리 얻어먹고’(1909년 4월 9일 ‘대한매일신보’) 같은 비아냥대는 창가도 등장했다.
명월관이 명성을 떨치자 안순환은 1908년 대한제국 전선사(典膳司) 장선(掌膳)으로 임명됐다.(1908년 12월 15일 ‘승정원일기’) 전선사는 궁중 음식 담당 부서고 장선은 그 책임자다. 품계는 정 6품이었다. 1909년 1월 순종이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조선 순행에 나섰을 때 안순환은 담당 요리관으로 임명됐다. 1910년 8월 19일 안순환은 정3품 당상관으로 품계가 3계단 올라갔다(1908년 12월 21일 ‘대한제국 관보’, 1910년 8월 19일 ‘순종실록’ 등).
전환국 9품으로 관직을 시작했던 성공한 사업가가 근무 태만을 이유로 징계받은 지 9년 만에 지금으로 치면 1급 공무원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사업은 겸업했고.
◇사업 다각화와 명월관의 흔적
조선 최초 근대식 극장이라는 ‘원각사’ 또한 안순환이 운영했다. 1908년 7월 개관한 원각사는 판소리와 민속춤, 판소리를 변형한 창극을 공연했다.
1915년 1월 인사동 이완용 별장에 ‘태화관’이라는 대규모 호텔이 들어섰다(1915년 1월 19일 ‘매일신보’). 호텔인데 음식과 술을 팔아 말썽이 많았다. 1918년 안순환은 이를 인수해 요리점으로 업종을 바꿨다. 명월관 분점이다. 대박이 났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들이 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종로경찰서로 압송됐다.
5월 23일 오전 6시 광화문 명월관이 화재로 전소됐다. 될 사람은 되는 법인지, 안순환은 불과 몇 달 전 이 명월관 본점과 지점인 태화관을 다른 사업자에게 팔아넘긴 상태였다(1919년 5월 24일 ‘매일신보’). 빈터로 있던 명월관 땅은 자본가 김성수가 매입해 훗날 ‘동아일보’ 사옥을 지었다(1932년 4월 ‘삼천리’ 4권 4호). 안순환은 이후 남대문에 식도원이라는 또 다른 요리점을 개점했다. 식도원은 ‘내국인보다 외국인 손님이 더 많았고’ ‘기생의 장고 소리를 들으며 꿈속 같은 몇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다(’삼천리’ 앞 기사).
이러저러 사업을 정리한 안순환은 이후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해강 김규진 같은 서예가들과 전국을 주유하며 곳곳에 현판 글씨를 남겼다. 1933년에는 경기도 시흥에 ‘녹동서원’을 세우고 유학 선양에 몰두했다.
인사동 태화관은 1921년 개신교 미국 남감리교 여자선교부가 매입해 ‘태화여자관’을 설치했다(1921년 2월 27일 ‘동아일보’). 1942년 태평양전쟁과 함께 태화여자관은 ‘독이빨을 휘두르고 있던 미영계 교회’의 적산(敵産)으로 지정돼 총독부에 수용됐다(1942년 8월 1일 ‘경성신문’). 화신백화점 사장인 자본가 박흥식이 이를 매입했는데, 종로경찰서 요구로 경찰서 옛 부지와 맞바꿨다.(반민특위 박흥식 피의자 신문조서) 해방 이후에도 종로경찰서로 쓰이던 옛 태화관은 반환됐다. 지금 옛 명월관 지점 태화관 자리에는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의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태화, 옛 이름 그대로다. 대한제국 백선생이 만든, 난해한 역사였다.
[안순환이 마지막 숙수(熟手)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안순환’과 ‘명월관’ ‘태화관’ 항목들은 모두 중대 오류가 있다. 언론을 포함한 기존 소개 글도 마찬가지다.
우선 이 사전은 안순환을 ‘1907년 대한제국 궁내부가 폐지되고 정3품 이왕직 사무관에 올랐지만 몇 달 뒤 스스로 사퇴했다’고 소개한다. 틀렸다. 1907년에는 이왕직 조직 자체가 없었다. 이왕직(李王職)은 1910년 한일병합 후 12월에 설립된 조직이다. 안순환이 이왕직 사무관에 임명된 때는 1911년이다(1911년 2월 1일 ‘조선총독부 관보’ 130호).
‘사퇴할 때 궁내부 소속 궁중 남자 요리사인 대령숙수(待令熟手)를 모아 1909년에 명월관을 열었다’는 설명도 틀렸다. 명월관은 전환국 기수 안순환이 1903년 9월 17일에 개업한 요리점이다.
‘명월관이 1918년 화재로 소실됐다’는 설명도 틀렸다. 명월관 화재는 1918년이 아니라 1919년 5월 23일에 발생했다. ‘주요 손님은 일본과 조선 고관대작과 친일계 인물들’이라는 서술도 틀렸다. 돈 있는 손님은 누구나 다 받았다. 1935년 9월 30일에 조선어학회가 490회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을 명월관에서 열었다(1935년 9월 27일 ‘조선일보’, 10월 1일 ‘동아일보’).
사전은 또 ‘태화관이 명월관 소실 이후 설립됐다’고 설명한다. 틀렸다. 태화관은 명월관 화재 전에 설립됐다. 태화관 폐업을 ‘기미독립선언이 계기’라고 하지만 태화관은 만세운동에서 2년이 지난 1921년 미국 선교단체가 매입해 교육시설로 사용했다.
끝으로 안순환이 ‘대한제국 마지막 대령숙수로 망국 궁중요리사와 관기를 데리고 나와 명월관을 차린 사람’이라는 기존 언론 및 포털 설명은 모조리 틀렸다. 전환국 기수 안순환이 외식사업으로 성공을 거두자 1908년 대한제국에서 그를 전선사(典膳司) 장선(掌膳)으로 채용했다. 거꾸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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