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329] 존엄하게 사라지기
십 수년 전 이혼과 함께 루게릭을 선고받은 한 남자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처음 ‘디그니타스’의 존재를 알았다. ‘죽을 권리’를 주장하며 의사의 조력으로 죽을 수 있는 스위스 단체였다. 알츠하이머에 따른 긴 고통을 끝내기 위해 남편과 ‘디그니타스’로 가는 여정을 그린 ‘에이미 블룸’의 책은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이 책 제목이 ‘사랑을 담아’인 것은 절망을 통과하지 않은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테러 단체 ‘하마스’에 딸을 잃은 한 아버지가 ‘아이가 죽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인터뷰를 봤다. 딸이 살아있길 바라는 게 아니라, 끔찍한 고통 없이 빨리 사망했길 바라는 그 비통함을 우리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눈을 부릅뜨면 죽음보다 못한 삶은 도처에 있다.
의학의 발전에도 기대 수명만큼 건강 수명은 늘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초고령 사회 진입은 각종 말기 암, 치매,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다양한 기능 상실까지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의 증가를 의미한다. 어떤 진통제로도 통증을 참을 수 없던 날, 아들을 바라보며 아저씨는 누구냐고 묻던 날, 유일하게 움직이던 왼쪽 눈꺼풀마저 마비로 잠식당하던 날, 불치병으로 죽음을 유일한 희망이라고 부르게 된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 부르게 된 사람들 말이다.
2018년 나는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했다. 그 후 26만명 이상이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중단했다. ‘연명 의료 결정법’이 도입된 후,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등록한 국민은 164만명을 넘어섰다. 2025년에 대한민국은 노인 비율이 20퍼센트가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 24시간 켜진 인공 불빛 아래, 온 몸에 생명 연장 장치를 달고 수시로 주삿바늘에 몸이 찔리는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나 자신으로 존엄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좋은 죽음 없이 좋은 삶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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