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의대 증원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들의 현장 복귀가 최우선
기초의학 가르칠 교수 태부족
게다가 이공대는 또 어쩔 건가
의대 졸업생들이 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짐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고대 그리스에서 제정된 것으로 신화적인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주요 선서 내용을 아폴론, 아스클레피오스, 히게아, 파나케아 등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파나케아(Panacea)는 만병통치를 의인화한 존재로 여기서 유래된 영어 단어가 ‘panacea’(묘약)라고 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소위 ‘응급실 뺑뺑이’로 상징되는 필수의료의 위기로 온 나라가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현 필수의료 및 지방의료의 위기는 수십 년간 계속돼온 수도권 위주의 무분별한 병상 증설, 국민소득 증가와 물가 상승률에 미치지 못하는 저수가 정책 고착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의료 전달 체계 등 장기간 지속된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선결 과제를 제쳐두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치 의대 증원이 만병통치의 묘약인 양 매달리는 것 같아 뒤탈 걱정부터 앞선다.
필자는 1980년대 초 초법적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의해 도입된 졸업정원제와 의대 정원 증가를 학생으로 몸소 겪은 아픈 경험이 있다. 강의실이 부족해 칠판도 잘 보이지 않는 강당에서 수업을 듣고, 해부용 시신이 모자라 시신 한 구에 20여 명이 달라붙어 어렵사리 학점을 이수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폐교된 서남의대의 정원을 전북의대와 원광의대가 갑자기 떠맡아 의료교육 현장에 대혼란이 벌어졌던 일도 불과 몇 년 전이다. 의학교육은 강의실에 의자 몇 개 더 갖다 놓으면 되는 일이 아니다. 소규모 그룹 토의실, 실험실습 기자재, 해부용 시신, 인체모형, 교육병원 등 투입되어야 할 자원이 그야말로 막대한 사업이다. 당연히 교수 요원 충원도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기초의학교육을 담당할 교원은 기존 40개 의대의 교육에도 벅찬 상태로 신임 교수 요원 풀이 부족한 상태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의대 정원이 급격히 증가할 경우, 의학 교육의 질 저하와 교육 현장의 혼란은 자명한 일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미 의대 쏠림 현상이 심각한 상태에서 의대 정원의 급격한 증가는 수많은 예비 의대생들을 양산하여 이공계 대학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의대 증원 뉴스가 연일 나오며 이미 강남 학원가에서는 발 빠른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고 이공계 대학생들의 반수, 재수가 증가한다고 한다. 과거 의전원이 도입되었다가 폐지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의료계의 노력과 함께 이공계 교육의 정상화가 중요한 목표였다고 기억한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며 온 나라가 의대 입학 열풍을 겪게 만드는 것은 진정한 국가의 백년대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배출된 필수의료 자격증을 가진 의사들이 왜 자신의 전문 영역을 떠날 수밖에 없는지를 제대로 살피고 이들을 필수의료 현장으로 복귀시키는 길을 찾는 일이다. 그것이 수가가 되었든 법적인 보호장치가 되었든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그 효과를 지켜보는 것이 선행 혹은 전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정책 패키지에도 불구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필요하다면 증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도하고 급격한 증가는 많은 투자가 소요돼서 다시 감축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과학적인 데이터에 근거하여 증원 규모를 산출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수요 조사는 각 대학본부 및 지자체의 의욕을 반영한 희망 사항일 뿐이며 부실한 의학 교육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들이 될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효과를 보겠다는 조급함보다는 보수적인 접근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의료 현장 문제의 실타래를 푸는 데 묘약은 없을 뿐만 아니라 의대 증원이 그 묘약인 양 말하는 것은 신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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