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 한 숟갈에 온기가 “이 정도면 충분해”
[정동현의 pick] 비프스튜
서울 양재천에 접어들자 도로가 왕복 2차선으로 좁아졌다. 바로 옆 야트막한 둔덕 너머로 양재천이 흐르고 있었다. 인근의 도로는 좁았고 건물들도 낮았다. 마치 악산에 폭포가 생기고 야산에 개울물이 생기듯이 건물의 높이와 도로의 통행량은 정확히 비례했다. 양재 근린공원 뒤편 언남고등학교 앞은 마을 버스 정도가 다니는 조용한 동네였다. 하얀색으로 칠한 외관을 봐서는 음식을 파는 곳 같지 않았다. 통창을 내어 밖에서도 안이 쉽게 보였다.
가게 이름은 ‘데일리 디(Daily D)’였다. 주인장 설명을 들으니 일상의 기쁨(Daily Delight)이라는 영어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앉을 자리는 많지 않았다. 겨우 여섯이 엉덩이를 붙이고 쉴 만한 공간이 나왔다. 미리 만들어 놓은 반찬이 카운터 옆 냉장고에 줄을 맞춰 들어가 있었다. 뒤로는 말끔하게 정리된 주방이 보였다. 한적한 동네 분위기 탓인지 이 집을 알고 드나드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문이 들었다.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점심 시간이 되자 말수가 적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이 집을 찾았다.
“생각보다 주변에 직장인이 많더라고요.”
주인장은 스스로도 놀란 듯 말했다.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한식 반찬, 샐러드, 샌드위치 그리고 비프스튜였다. 갑자기 차가워진 날씨에 사람들은 목도리까지 칭칭 감고 이 집을 들렀다. 앉아서 먹고 가는 이는 많지 않았다. 마치 오랜만에 안부를 묻듯이 조용한 목소리로 주문을 넣고 잠시 한편에 서서 기다리다가 포장된 음식을 받아갔다. 직장 동료와 함께 온 이들도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볼 수 없는 환한 얼굴로 작은 새처럼 재잘거리다가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두 손 가득 음식을 받았다. 자리에 앉아 음식을 기다렸다. 넓지 않은 주방에서 두 사람이 바쁘게 움직였다. 몸을 떨고 있으니 먼저 비프스튜가 나왔다.
스튜(stew)라고도 부르고 수프(soup)라고도 부르는 서양식 국물 요리는 한국의 찌개와 국의 중간 형태쯤 된다. 찌개와 국 사이에 수학적으로 엄밀한 경계가 없듯이 스튜와 수프도 마찬가지다. 건더기가 크고 농도가 짙으면 스튜, 건더기가 작고 묽으면 수프라고 하는데 어느 이름을 붙이든 큰 상관이 없다. 토마토를 우려낸 붉은 국물에는 마늘과 당근, 감자, 소고기가 골고루 들어 있었다. 국물 위에는 얇게 체더치즈를 올려 녹였다. 국물 맛을 보기 전에 우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오래전 매일같이 느꼈던 그 냄새가 작은 그릇에 담겨 있었다.
주방에서 먹는 음식을 서양에서는 ‘스태프 밀(staff meal)’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패밀리 밀(famaily meal)’이라 불렀다. 전자가 공장 같은 느낌을 준다면 후자는 그래도 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현실은 그때그때 남는 재료로 빨리 만들어 버려야 하는 음식이었다. 그래봤자 저녁 영업 시작 전 딱 한 번이었다. 온종일 서서 일하다 겨우 먹는 음식이 형편없다면 그때는 주방 옆 좁은 계단에 앉아 숟가락을 든 요리사들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하지만 빠르게. 이 금언은 스태프 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바쁜 날에는 ‘아차’ 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 바라만 보면서 아무도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늦게 깨닫기도 했다. 이런 날이 두어 번 있었을까? 점심 나절부터 주방장이 큰 솥 하나를 붙잡고 콧노래를 불렀다. 주방을 돌아다니며 손님에게 낼 수 없거나 남은 재료들을 긁어 모았다. 물러터진 토마토, 질긴 소고기, 시들어버린 셀러리, 말라 비틀어진 허브 다발, 조금 썩어버린 감자 같은 것들을 다듬더니 주방에서 흔한 닭육수에 집어넣고 부글부글 끓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이 살을 지지고 잘 벼린 칼이 살점을 베는 주방에 구수한 향기가 가득해졌다. 주문서를 살피며 속으로 욕을 하고 이마에 흐른 땀으로 눈이 따끔거릴 때도 그 향기의 존재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때 느꼈던 맛이 작은 그릇에서 얕게 찰랑거렸다. 순대국처럼 끓어오르는 열기는 없었지만 몸을 데우기에는 충분했다. 향신료와 소고기, 토마토를 우린 국물은 과하고 강한 감칠맛 대신 부드럽고 깨끗한 맛이 느껴졌다. 몇 번 저절로 눈이 감겼던 것 같다. 말끔히 재료를 다듬고 시간을 들이고 점심 한나절을 기다린 이들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 곳곳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거나 인생을 뒤엎는 무서운 욕심은 없었다. 대신 창밖으로 흘러드는 햇빛에 감사하고 느리지만 기필고 찾아오고 마는 계절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순한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이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처럼 작게 속삭였다. 이 정도면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해.
#데일리디: 비프스튜 5900원, 커리치킨샌드위치 4900원, 당근라페 5900원, 대파베이컨키쉬 6700원, 0507-1394-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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