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이형!” vs “강형!”... 둘 중 한 명만 웃는다

이혜운 기자 2023. 11.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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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1억명 기다리는 게임 ‘롤드컵’ 결승 미리 보기
지난 12일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23 리그오브레전드 월드챔피언십’ 준결승. ‘페이커’(오른쪽) 선수가 이끄는 한국 리그팀 ‘T1’과 ‘더샤이’(왼쪽) 선수가 뛰는 중국 리그팀 ‘WBG’가 결승에 올랐다. 19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세계 1억명이 바라보는 가운데 챔피언이 결정된다. /라이엇게임즈, 그래픽=송윤혜

관중석을 가득 채운 6000명 모두가 숨을 죽였다. 지난 12일 밤 부산 사직실내체육관. 무겁고 팽팽한 고요를 뚫고 선수들이 마우스를 다루는 소리, 중계진이 해설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온라인 게임 ‘2023 리그오브레전드(LoL·롤) 월드 챔피언십(이하 월즈)’ 준결승. 한국 최강 ‘T1′과 중국 최강 ‘징동 게이밍’이 붙었다. 이날 만약 T1이 탈락하면, 자국에서 하는 롤드컵 결승에서 중국 팀끼리 우승을 다투게 된다. T1과 징동에 소속된 한국 선수들은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국가 대표로 한솥밥을 먹었다. 어제의 동지를 오늘은 적으로 만난 셈이었다.

2대1로 T1이 앞서는 가운데 4세트, 시작은 T1이 불리했다. 그러나 T1 ‘페이커(27·이상혁)’ 선수의 수퍼 플레이로 경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마침내 게임의 최종 목표인 징동의 넥서스를 파괴하는 순간, T1의 ‘케리아(21·류민석)’ 선수가 외쳤다. “징동 다운! 뉴진스 나와! 고척돔 나와!”

19일 ‘리그오브레전드 월드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오프닝 무대에 오르는 걸그룹 ‘뉴진스’. /어도어

◇‘롤’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제 19일이면 월즈 우승컵이 주인을 찾는다.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리는 월즈 결승에 세계 Z세대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09년 미국 라이엇게임즈가 개발한 ‘롤’은 5명이 팀으로 벌이는 전투 게임. 앉아서 하는 두뇌 게임이라는 점은 바둑과 비슷하다.

세계 아홉 지역에 프로 리그가 있고, 100여 팀에서 800여 명의 선수가 뛴다. 매월 1억여 명이 이 게임을 한다. 월즈는 리그 9개에서 선발된 22팀이 모여 최강 팀을 가리는 무대다. 2011년 스웨덴에서 첫 대회가 열린 후 올해로 13회째. 한국에서는 세 번째, 5년 만에 개최된다. Z세대에게는 월드컵 축구만큼 인기가 있어 ‘롤드컵’으로 통한다.

/연합뉴스 인사말하는 딜런 자데자 라이엇 게임즈 CEO와 티파니앤코에서 만든 트로피.

결승전 시청자는 약 1억명.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행사인 미식축구의 수퍼볼보다 많다. 젊은 팬들을 미래 고객으로 만들기 위해 마스터카드, 메르세데스 벤츠 등이 후원한다. 트로피는 ‘티파니앤코’가 만든다. 시장조사업체 리서치앤드마켓이 발표한 지난해 세계 e스포츠 시장 규모는 13억9000만달러(약 2조원)에 이른다.

올해 롤 결승전은 라이벌인 한중전이 성사됐다. 각 리그 최고의 스타인 페이커와 더샤이(강승록·24) 선수가 뛰는 ‘T1′ 대 ‘웨이보 게이밍 포 아우디(WBG)’의 승부. 축구에 비유하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전성기 리오넬 메시의 FC 바르셀로나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맞붙는 셈이다.

◇T1, 농심배의 이창호 되나?

“저는 오늘 T1의 우승을 기원하며 거리에서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저는 쓰레기 주울 시간이 없어, 보육원에 5만원 후원하고 왔습니다.”

최근 인터넷 게시판에 T1 팬들이 올리는 ‘선행 인증글’이다. T1이 우승할 수 있도록 공덕을 쌓겠다는 뜻이다. 경기 승리를 위해 쓰레기를 줍는다는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철학과 행동에서 영감을 받았다.

인터넷에는 “웨이보는 어떻게 강팀이 되었나” 같은 글도 올라온다. 어떤 팀이 잘할 때 언론들이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 성적이 하락한다는 징크스에서 나온 미신으로, 웨이보가 부진에 빠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우리 T1 월드클래스 아니에요”도 있다.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씨가 이렇게 말한 후 손흥민의 기량이 월드클래스로 올랐다.

팬들이 이토록 간절한 것은 T1의 월즈 우승이 2016년 이후 멈춰 있기 때문이다. T1은 최다 우승 팀(3회)이지만, 그 후 지금껏 트로피를 가져오지 못했다. 준우승만 두 번. 작년에는 언더독이던 한국팀 DRX에 패해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신화의 조연으로 남았다. 아버지가 프로 야구 LG팬인 한 20대 T1 팬은 “7년도 이렇게 힘든데, 아버지는 어떻게 29년이나 기다렸는지 정말 존경스럽다”고도 했다.

네 번째 롤드컵 우승에 도전하는 T1/연합뉴스

이번 시즌 T1은 언더독에서 시작했다. 페이커 선수의 부상으로 1승 7패로 부진했지만, 그의 복귀와 함께 도장깨기로 올라왔다. 8강에서는 나머지 한국팀이 모두 탈락하고 중국팀만 남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팬들은 2005년 제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이창호 9단이 만들어 낸 ‘상하이 대첩’을 떠올린다. 당시 이창호 9단은 한국 기사들이 전부 탈락한 가운데 5연승을 거두며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중국 창하오 9단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 있다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이 상황을 떠올리며 지난 12일 전용준 캐스터는 말했다. “한국 팀을 모두 꺾어도 T1이 남았다면 다시 시작이다.” 팬들은 이 염원을 담아 당시 이창호 기사의 사진 위에 ‘T1′ 마크를 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페이커가 있다. 그는 현재 1020 남성들에게 농구의 마이클 조던 같은 전설이다. 류현진 선수도 “미국에서는 나보다 페이커의 인기가 더 많다”고 했다. 방탄소년단(BTS)도, 손흥민도 그의 팬을 자처한다.

취재진 질문에 답하는 '페이커' 이상혁/연합뉴스

2013년 데뷔한 페이커는 선수 생명이 짧은 롤에서 오랫동안 정상을 지켜온 ‘노장’이다. 박지성이 현역으로 뛰는 것과 같다. 그와 함께 경기하는 제우스(최우제·19)는 2019년 T1 연습생으로 출발했다. 다른 팀원 오너(문현준), 구마유시(이민형), 케리아도 21살이다. 그러다 보니 팬들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노장 메시와 그의 팬이었던 신예 알바레스가 한 팀이 되어 우승한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모두가 기대하는 월즈의 징크스. 지금까지 T1은 중국 리그 팀에 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중국의 스타가 된 한국 용병

이런 T1과 붙는 WBG는 중국 IT 기업 시나 웨이보가 모기업인 팀이다. 2015년 창단된 T베어스 게이밍이 전신으로, 2020년 쑤닝 시절 월즈 준우승 경험이 있다.

이 팀의 최고 스타는 ‘한국 용병‘ 더샤이다. 1999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그는 2014년 중국 ‘팀 WE’로 스카우트됐다. 당시 나이 15세, 중국어는 전혀 못 했다고 한다. 중국은 e스포츠를 미래 산업으로 보고 집중 투자해 왔다. 2015년에는 중국 텐센트가 라이엇 게임즈를 인수하기도 했다. 이렇게 공을 들였지만, 월즈에서는 한국의 벽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그래서 쓴 방법이 한국 용병 스카우트다.

질문에 답하는 웨이보 게이밍의 '더샤이' 강승록 선수. /연합뉴스

더샤이는 중국 리그에 공격적인 전술을 전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2018년 인터빅스 게이밍(IG) 소속으로 월즈에 진출해 중국에 첫 우승을 안겨준다. 당시 개최지는 한국. 국내 팬들은 이 사건을 ‘한국 천하가 끝난 충격’으로 기억한다.

중국에서 더샤이의 인기는 현지 선수들을 뛰어넘는다. 지난해 중국 리그 올스타 투표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국내 프로 야구 올스타전에서 용병 선수들이 받는 득표를 생각하면 그를 향한 중국 팬들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다.

WBG 감독 역시 한국인 양대인(30)이다. 배틀그라운드 선수 출신으로 롤에서는 ‘T1′과 ‘담원 기아’의 감독을 거쳤다. 이번에 4번 시드였던 WBG를 결승에 진출시키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만약 우승한다면, 지난해 한국 리그 4번 시드로 출전해 우승컵을 들어 올린 ‘DRX’ 스토리의 재현이다.

◇오프닝은 “뉴진스 나와!”

월즈 결승전에서 경기만큼 관심을 모으는 건 오프닝 무대. 수퍼볼의 하프타임쇼와 비슷하다. 지난해 미국 결승전에서는 빌보드에서 19주간 1위를 차지한 릴 나스 엑스가 ‘스타 워킨’을 불렀다.

국내에서 열린 결승전 무대에서는 2014년에 미 록밴드 이매진 드래곤스가 ‘워리어’를, 2018년엔 걸그룹 ‘(여자) 아이들’의 멤버 소연과 미연이 참여한 프로젝트 그룹 ‘K/DA’가 ‘POP/STARS’를 각각 불렀다. 2014년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북을 치며 등장한 이매진 드래곤스의 공연은 지금도 회자된다. 롤팬인 그들은 공연이 끝난 후 PC방으로 직행했다.

취재진 향해 포즈 취하는 뉴진스. 롤드컵 오프닝 무대에서 주제곡 'Gods'를 부른다. /연합뉴스

올해 결승전 무대에는 BTS를 배출한 하이브의 걸그룹 ‘뉴진스’와 프로젝트 그룹 ‘하트스틸’이 오른다. 뉴진스는 월즈 무대의 첫 완전체 K팝 가수, 공식 주제곡 ‘Gods’를 부른다.

“모두들 너를 찬양하고 있잖아/ 너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치잖아.”(Gods 中)

하트스틸은 ‘K/DA’의 보이그룹 버전이다. 엑소 백현 등이 멤버다. 결승전을 하루 앞둔 18일 오후 6시부터는 서울 광화문에서 전야제로 라이브 콘서트가 열린다. (여자) 아이들, FT아일랜드, 머쉬베놈, 앨런 워커, 니키 테일러 등이 출연한다. 이를 보려고 많은 중국 팬이 방한했다.

중국 팬들이 더샤이를 부르는 애칭은 “강형(강+형)”. 해외 K팝 팬들이 “오빠”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페이커 선수의 애칭도 “상혁이형”이다. 이번 일요일에 한 명은 웃고 한 명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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