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갑자기 찾아왔다, 꽃 몇 송이를 샀다

오지윤 작가 2023. 11.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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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오지윤의 리빙뽀인뜨] 꽃을 감상하는 요령

‘사이코패스 테스트’라는 문항들이 인터넷에 돌아다닌 적이 있다.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문장 앞에서 난 망설였다. 사이코패스가 되기는 싫으니 웬만하면 정답을 말해줄 수 있었음에도, 나는 솔직하게 ‘아니요’에 표시했다. ‘꽃을 보면’이라는 전제 조건조차 능동적으로 수행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언젠가 시들고 마는 것은 나라는 인간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다들 꽃을 주고받으며 기뻐하는 걸까. 실제로 나는 이런 의문을 가졌었다. ‘꽃다운 나이’인 10대에 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내게 꽃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집 안에는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식물이 여럿 있었고 현관문 앞에도 꽃과 채소가 널려 있었다. 부지런히 식물을 기르는 그들을 보며 자라서인지, 꽃은 노년을 보내기 좋은 소일거리라는 첫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선물로 꽃을 주는 일은 참 성의 없는 선택이라 믿었다. 그 사람에게 주고 싶은 선물을 백 번 고민해도 답이 없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보루 같은 거 말이다.

일러스트=비비테

요즘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 식물이 ‘힙함’의 필수 조건이 된 것 같다. 인스타그램의 ‘좋아요’를 올리는 핵심 보조 출연자가 된 것이다. 나 역시, 꽃 하면 ‘쓸모’부터 떠올리게 된다. 특히 내 돈으로 꽃을 살 땐 더 그렇다. 인테리어, 분위기, 기분, 장식, 기념, 있어 보이기. 꽃이 ‘재료’이자 ‘소품’이 돼버린 거다. 그렇게 꽃의 쓸모만 생각하다 보니 꽃 하나 사는데도 고르고 또 고른다. 그러다 어차피 ‘1주일 뒤면 죽겠지’라는 생각에 그냥 꽃집을 나와버리는 나다.

그러다 몇 해 전, 플로리스트인 지인이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가운뎃손가락이 달린 듯한 꽃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아주 귀했다. 꽃의 색은 왠지 모르게 야시시했다. 관능적이라는 어려운 말보단 야시시가 맞겠다. 내가 존경하던 팀장님이 망고를 잘 못 먹겠다고 한 기억이 났다. 그 이유가 아주 요란하고 신기했는데 망고 맛이 너무 야시시해서라는 거다. 대체 뭔 소린가 싶었지만 이 꽃을 보니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남들한테 설명은 못 하겠는 야시시함.

“이건 마사지라고 하는 거예요.”

꽃의 줄기를 조물조물거리며 지인이 말했다. 꽃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할 때 쓰는 기법이라고 했다. 꽃들도 마사지를 받는다니. 손끝의 체온이 꽃에 전해지자 줄기가 말랑말랑해지고 조금씩 방향을 바꿨다. 가위질을 하고 물속에 꽃을 놓아주고 지인의 손은 점점 바빠졌다. 꽃의 줄기만큼 야윈 손이 정교하고 진득하게 움직인다. 생명을 다루는 손이다. 다섯 손가락이 꽃의 잎사귀와 한데 어울린다. 손가락과 꽃잎은 참 닮았구나. 카메라가 끝도 없이 다가가게 됐다. 이건 뭐랄까. 외계적인 아름다움이다.

올봄, 벚꽃이 만발한 길을 걸었다. 그 앞에 화초를 파는 작은 수레가 있었다. 한 할머니 무리가 그 수레에 꿀벌처럼 몰려들었다. 바로 앞에 거대한 벚꽃 나무들을 앞에 두고. 할머니들은 작은 꽃들을 구경했다. 피고 지는 꽃의 생을 이미 살아본 사람들인지라. 인테리어를 할까 선물을 할까, 꽃의 구실부터 생각하는 나와는 출발부터 다르다. 나처럼 꽃이 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겠지. 그건 자연스러운 거니까. 꽃을 꽃 자체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가지고 사는 이유다.

지인이 꽃 줄기를 조심스럽게 마사지해주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듯이 조물조물. 그 애정은 내가 우리 강아지가 언젠가 죽을 걸 생각하며 슬퍼하고 그래서 더 잘해줘야겠다 결심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다. 언젠가 닥칠 소멸에 대한 불안이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과 야시시한 색깔, 그 모든 것에 충실한 마음. 순간을 가꾸는 마음. 정원사의 마음이다. 정원사의 마음으로 살면 나도 다음 테스트에선 당당히 사이코패스를 탈피할 수 있을 텐데. 연습하면 되려나, 정원사의 마음.

추위가 갑자기 찾아왔다. 시린 마음에 꽃 몇 송이를 샀다는 말을 하려다, 글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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