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왜 ‘수박’으로 단결하나
강성 민주당 지지층엔 ‘배신자’
해외선 ‘팔레스타인 지지’ 상징
수박은 더불어민주당 강성 지지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과일이다. 수박은 ‘민주당 내 보수 인사’ ‘위장 보수’ ‘배신자’로 이용된다. 겉은 푸르지만(민주당 상징색) 속은 빨간(국민의힘 상징색) 수박처럼, 민주당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의힘 쪽 정치인을 가리킨다. 지난 3월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이 가결되자, 민주당 당사 앞에서 이 대표 지지자들이 ‘수박 격파’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국내에선 강성 민주당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됐지만, 해외에서 수박은 팔레스타인의 상징이자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를 드러내는 과일로 부상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X(옛 트위터), 틱톡 등 소셜미디어(SNS)에서는 수박 그림이나 이모지(emoji·그림문자)를 올리는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급증했다. 중동·북아프리카·유럽·북미 등 세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폭격과 지상전 반대 시위에서는 수박이 그려진 깃발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국기 못 들게 하자 수박 들었다
수박이 팔레스타인의 상징이 된 직접적 이유는 색깔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국기는 빨강·초록·검정·흰색 4가지 색으로 구성된다. 수박을 잘랐을 때 드러나는 과육·겉껍질·속껍질·씨의 색과 같다.
수박이 팔레스타인의 상징이 된 건 1980년부터로 알려졌다. 1967년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하고 동예루살렘을 합병했다.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국기 사용을 형사 범죄로 규정하고 금지했다.
1980년 요르단강 서안 라말라에 있는 ‘79 갤러리’에서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국기가 그려져 있거나 정치적 의미를 담은 작품들을 압수하고 전시를 폐쇄했다. 전시에 참여했던 화가 슬리만 만수르(Mansour)는 당시 일화를 회고했다. “전시를 폐쇄한 이스라엘군 장교가 ‘팔레스타인 국기뿐 아니라 국기에 들어간 색을 써도 안 된다’고 했다. 그에게 ‘빨간색·초록색·검은색·흰색을 사용해 꽃을 그리면 어떠냐’고 묻자, 장교는 분노하면서 ‘압수당할 것이다. 당신이 수박을 그린다 하더라도 압수당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수박은 팔레스타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벌어진 인티파다(反이스라엘 저항운동)에 참여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스라엘군의 탄압과 구속을 피하려 국기 대신 수박 조각을 손에 들었다.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오슬로 협정을 맺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국기 사용을 허용했다. 하지만 금지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수박 조각을 들고 있었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소년이 이스라엘군에 체포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예술가 칼레드 후라니(Hourani)는 이 사건에 분노한 팔레스타인 주민 중 하나였다. 그는 2007년 국기 사용 금지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아 수박 한 조각을 그린 ‘팔레스타인 깃발의 색(The Colours of the Palestinian Flag)’을 제작했다. 그림은 곧 유명해졌고, 많은 예술가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표시로 수박을 그렸다.
◇전쟁으로 되살아난 인기
수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불안정한 평화가 유지되면서 한동안 잊혔지만,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인기(?)가 되살아났다. 주로 온라인에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해외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은 이스라엘 정부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X(옛 트위터) 등 플랫폼 기업들의 검열을 우회하기 위해 온라인에서 수박 이미지와 이모지를 활용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은 SNS 플랫폼 기업들이 팔레스타인 관련 게시물에 대해 비판적 알고리즘을 적용한다고 의심한다.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30세 이하인 팔레스타인에서는 “팔레스타인 지지 게시물 수백만 건이 SNS에서 삭제됐다”고 주장한다.
플랫폼 기업들은 “기술적 결함”이라고 항변하지만, 많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신들이 “SNS에서 오랫동안 불리하고 불합리하게 검열·차단당하고 있다”고 분노한다. 팔레스타인 디지털 권리 운동가들은 “메타 등 SNS 기업들의 AI는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을 미국 흑인 활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취급한다. 계정을 차단해 버린다”고 주장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지지자들은 게시글 삭제나 계정 차단을 피하기 위해 수박 이미지 외에도 민감한 단어의 철자 일부를 누락하거나, 문자기호로 대체하거나, 배열을 다르게 하는 방법을 활용한다. ‘Palestine(팔레스타인)’을 ‘P@lestine’으로 표기하는 식이다. 국제 시민단체 아바즈(Avaaz)의 파디 쿠란(Quran) 디렉터는 “아랍의 봄(2011년 아랍권을 휩쓴 민주화 혁명)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SNS가 혁명가들보다 억압자들의 도구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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