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냐 국내냐, 장거리냐 단거리냐… ‘태교 여행’이 문제로다
보편화된 태교 여행
행선지 두고 부부싸움
서울 직장인 A(37)씨는 며칠 전 임신 3개월인 아내와 크게 다퉜다. 발단은 태교 여행. 아내가 불쑥 “아기 태어나면 2년 가까이 해외 나가기 어려울 텐데, 태교 여행으로라도 유럽에 다녀와야겠다”고 말을 꺼냈단다. A씨는 “임신한 몸으로 10시간 넘게 비행기 타는 건 무리다. 혹시 이상이 생기면 한국처럼 곧장 병원 갈 수 있는 상황도 안 되지 않느냐”며 국내로 가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아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A씨는 “타협책으로 일본이나 동남아도 제안했지만 아내가 무조건 유럽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 냉전 상태”라고 했다.
A씨 부부만의 일이 아니다. 온라인에는 태교 여행을 두고 다투는 부부들의 고민 상담이 줄을 잇는다. 대부분 아내는 해외, 남편은 국내로 가자고 해 다툼이 벌어진다. 물론 정반대 경우도 있다. “시험관 시술로 힘들게 아기를 가져서 저는 매일 살얼음판 걷는 기분인데, 남편은 자꾸 해외로 가자고 해서 미치겠어요. 어쩌면 좋죠?”
의견은 남녀를 떠나 팽팽하다. “장거리 여행도 괜찮다”는 쪽에선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임신 5개월 때 파리, 런던 거쳐서 동유럽까지 쭉 돌고 왔는데 아기 잘 낳고 지금도 잘 크고 있네요.” “엄마가 무리만 하지 않으면 큰 상관 없어요. 저도 아내랑 하와이 다녀왔는데 너무 즐겁게 잘 보내고 왔고 아내에게도 좋은 추억이 됐네요.” “엄마가 행복한 게 아기에게도 최고의 태교 아닌가요?”
“장거리는 역시 무리”라는 쪽도 만만치 않다. “제 친구들은 임신 중에 일본 갔다 계단에서 넘어지고, 괌에 갔다 갑자기 혈압이 급상승해 현지 병원 갔다 돈 엄청나게 깨지고 왔어요.” “일반인도 장거리 비행하면 힘든데, 임신부가 그러면 아기한테도 악영향이 가는 거 아닌가요?”
태교 여행이 정말 태교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근본적 논쟁도 벌어진다. 한쪽에선 “무슨 상관이냐. 그냥 여행 가고 싶어서 핑계 대는 거 아니냐” “태교 여행은 그저 허세 문화”라고 공격한다. 반론도 있다. “임신하면 몸도 마음도 지치는데 해외여행 가서 기분 전환 하는 게 임신부랑 태아에게 다 좋은 거 아닌가요? 집안 어르신들은 임신 중에는 집에 가만히 있으라 해서 답답한데, 태교 여행이라고 해야 허락해 주시잖아요.”
태교 여행이 등장한 건 지금부터 10~11년쯤 전. 부유층 사이에서 “해외로 태교 여행을 다녀오는 게 태아 발달에 도움이 된다”며 하나둘 해외여행을 나서기 시작하고, 유명 연예인들도 너나없이 태교 여행을 떠나자 전국적 유행이 됐다. 여행사에서 태교 여행 패키지 상품을 만들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이제는 임신부 사이에선 거의 보편화된 상태. 코로나 사태로 한동안 하늘길이 막혔기에, 해외 태교 여행 행선지를 둘러싼 갈등이 더 잦아지는 양상이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해외로 태교 여행을 다녀와도 산모나 아이에게 큰 문제는 없다”고 말한다. 김문영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태교 여행이 태아에게 직접적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전제하면서도 “산모가 행복한 것이 가장 좋은 태교이기 때문에 태교 여행은 임신부와 태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임신 초기에는 태교 여행을 자제하고 태동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18~25주 정도에 가는 것이 좋단다. 초기에는 입덧이 심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여행을 가도 즐기고 오기 힘들다는 것. 김 교수는 “임신 초에 무리해서 유럽 갔다가 고생만 하고 후회하는 임신부를 많이 봤다”며 “16주는 넘어가야 입덧이 잦아들어 여행에 적합한 컨디션이 된다”고 했다.
임신 중기에 장거리 비행은 괜찮을까. 전문의들은 임신부들의 컨디션이 너무 악화하지 않는 5~6시간 이내 거리로 다녀오는 걸 권유한다. 수칙만 지키면 장거리 비행도 괜찮다는 의견도 있다. 김 교수는 “미국에서도 임신부들이 국내 이동 시 장시간 비행기를 타지 않느냐”며 “다만 임신부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장시간 앉아 있으면 혈전(핏덩어리)이 생길 가능성이 일반인보다 높아 비행기 탑승 시 압박스타킹을 신고 비행 중 한 시간에 한 번은 일어나 비행기 복도를 걷거나 제자리걸음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혈전 위험 때문에 해외로 여행 가실 거면 비즈니스석을 타는 게 좋다고 권하는데, 그러면 대부분은 해외로 안 가더라”며 웃었다.
임신 중에는 조금만 걸어도 금방 지치고 잠도 늘기 때문에 태교 여행 일정은 무리한 관광보다는 휴식, 휴양 위주로 짜는 게 좋다. 일부는 “비행 중 우주 방사선에 노출되거나 공항 보안 검색대의 전신 스캐너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태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근거 없는 얘기다.
임신부가 장시간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탄다고 유산이 된다는 건 잘못된 상식이라는 지적도 있다. 유산 원인 대부분은 애초 염색체 이상으로 정자와 난자의 수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수정란이 정상적인 세포분열을 하지 못한 경우라고. 김문영 교수는 “임신 초기에 시댁에 가느라 장시간 차를 탔더니 유산됐다거나 장거리 비행 후 유산했다는 경험담은 대부분 우연의 일치”라고 했다.
전문의들은 “임신부는 여행 가기 전 주치의와 상담을 거쳐서 여행 여부를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임신 초기 피가 비치거나 혈종이 관찰되는 임신부는 장시간 이동이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고, 임신 중기라도 조산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는 것. 지난 4월 괌으로 태교 여행을 간 임신 7개월 임신부가 현지에서 갑작스레 1.3kg의 신생아를 출산했는데, 괌에는 신생아 전문의가 없어 어려움을 겪다 국내 의료진 도움으로 40일 만에 귀국하는 일도 있었다.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태교 여행을 갈 때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취소하시는 게 낫다”며 “돈이 아깝다고 힘들게 가봤자 고생만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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