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환상도 없이 전쟁을 이야기하기[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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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저주토끼'엔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기 힘든 환상소설이 주로 담겨 있다.
전쟁이 끝났지만 할아버지는 고통에 시달렸다.
"할아버지는 이미 지나간 전쟁을, 이미 사라져버린 수용소를 평생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죽고 난 뒤에야 정말로 자유롭게 자기 도시의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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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과 마주하게 만든다
◇저주토끼/정보라 지음/356쪽·1만5800원·래빗홀
‘재회’는 대학원 논문을 쓰기 위해 폴란드로 자료 조사를 떠난 한 여자의 이야기다. 여자는 도서관에서 폴란드 남자와 대화한다. 남자는 여자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말을 걸었다. 몇 번의 만남 끝에 여자와 가까워진 남자는 자연스레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이미 지나간 전쟁을, 이미 사라져버린 수용소를 평생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죽고 난 뒤에야 정말로 자유롭게 자기 도시의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어.”
‘재회’를 읽으며 여자 주인공에게서 작가 정보라의 모습이 보였다. 정 작가는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폴란드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이후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할 땐 폴란드 출신 작가 브루노 야시엔스키(1901∼1938)로 논문을 썼다. 한국에선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1892∼1942)의 ‘브루노 슐츠 작품집’(2013년·을유문화사)을 번역했다. 정 작가가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폴란드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잠시나마 폴란드에 살며 전쟁의 비극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는 많다. 하지만 이익과 엮일 때 전쟁 반대를 표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올해 전미도서상 시상식을 이틀 앞둔 1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난 기사를 읽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기사는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자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중동전쟁에 대해 의견을 발표하려 하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기업들이 전미도서상 후원을 철회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려가 무색하게 전미도서상 재단은 14일 성명을 통해 “정치적 발언은 전미도서상 역사상 혹은 그 어떤 시상식에서도 결코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니다”라며 작가들 편에 섰다. 15일 시상식에서 소설 부문 최종 후보인 미국 작가 알리야 빌랄은 단상에 올라 “우리는 반유대주의와 반팔레스타인 정서, 이슬람공포증을 동등하게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정 작가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동의를 표했다. ‘저주토끼’가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재회’에 담긴 작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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