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키스트 아워’ 배경된 워룸…처칠의 빛과 그림자 담겨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2023. 11. 18.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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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원천] 영국 ‘처칠 전쟁박물관’
처칠 워룸을 배경으로 한 영화 ‘다키스트 아워’(2017)에서 처칠을 열연 중인 배우 게리 올드먼. [사진 iMDb]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이 다음주(20~23일)로 다가왔다. 환영 행사와 회담 외에 흥미로운 일정이 있다. 23일 ‘처칠 워룸(Churchill War Rooms),’ 우리에게는 ‘처칠 전쟁박물관’으로 알려진 곳을 방문하는 일정이다. 한국 대통령이 영국 공식 방문 중에 이곳을 찾는 것은 처음이다.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일 때부터 여러 차례 윈스턴 처칠(1874~1965) 전 영국 총리를 존경한다고 밝혔기에 이루어진 일정일 것이다.

처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 선정

처칠 워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사용된 거대 방공호를 전후에 박물관으로 만든 것이다. 나치 폭격기의 공습을 피해 처칠과 전시 내각이 이곳에서 숙식을 하며 수많은 회의를 했다. 1940년 됭케르크(덩케르크) 철수작전 당시 처칠의 고뇌와 결단을 그린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2017)가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역사적 획을 그은 작전들이 바로 이곳에서 논의되었다.

기자는 3년 전에 처칠 워룸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영국 의회와 정부부처들이 있는 런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지만 지하 방공호라 얼핏 눈에 띄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가면 1940년대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한 희미한 조명의 복도와 가구가 드문드문 놓인 방들이 긴박감을 자아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과 내각이 전략을 짰던 지하 방공호였던 처칠 워룸에 보존되어 있는 지도실. [사진 영국 전쟁박물관]
가장 인상적인 장소 중 하나는 ‘지도실(Map Room)’이다. 전쟁 정보 수집의 심장부로서 영국 육해공군 장교가 한 명씩 상주하며 24시간 운영되던 곳이다. 현대의 컴퓨터 대신 전화기와 지도, 서류로 가득하다. 지도에는 당시에 핀을 박고 표시를 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지도실 바로 옆 처칠의 개인 침실도 인상적이다. 올빼미형 인간이라 밤늦게 일을 하며 4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던 그는 오후에 반드시 한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잤다. 침대 맞은편에 있는 지도에는 독일 침략군이 상륙 가능한 지점들을 동그라미친 흔적들이 있어 마음 편한 낮잠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처칠은 가장 힘든 시기에 마치 독이 든 성배 같은 총리직을 맡았다. 그가 취임한 1940년 5월 10일 당일에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독일군에 포위되어 프랑스 해안에서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외무장관 핼리팩스는 처칠에게 히틀러와 평화협상을 촉구했다. 그러나 처칠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일찍부터 히틀러가 어떤 인물인지 꿰뚫어보고 있었고 평화협상은 임시방편에 불과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1년 후 나치 독일이 1939년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해 수천만 명의 러시아인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을 보면 처칠의 예견은 정확했다.

처칠은 히틀러와 평화협정을 거부한 채 프랑스 해안에 포위된 연합군 병사들을 바닷길로 탈출시키는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돌입했다. 화물선·어선·유람선 등 민간 선박까지 징발해 860척에 달하는 선박을 급히 모았고, 온갖 작은 배들의 선주들도 애국심으로 배를 몰고 도버 해협을 건넜다. 병사 10%도 구하지 못하리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지배적이었지만 결국 35만명 병사들을 거의 다 구출하는 ‘됭케르크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이 ‘기적’은 영국인의 사기를 용솟음치게 만들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로 관광명소 부상

처칠의 침실. [사진 영국 전쟁박물관]
처칠 워룸에는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도 나왔던, 화장실로 위장한 미국 대통령과의 직통 전화실, 그리고 대국민 연설 방송실도 보존되어 있다. 그의 대국민 연설은 프랑스마저 나치 독일에 항복한 후 홀로 남은 영국이 1941년 미국과 소련이 참전할 때까지 계속 버티며 싸울 수 있도록 격려했다. 일각에서는 그를 ‘허영심에 찬 전쟁광’이라 비난했지만 그는 나치와 파시즘 같은 시대의 광기를 마주했을 때는 타협이 아니라 싸워서 승리하는 것 외에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칠은 총리 취임 후 첫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인간 범죄의 어둡고 한탄스러운 목록에서도 최고봉에 있는 괴물 같은 폭정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냐고요?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승리,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 모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승리, 아무리 길고 힘든 길일지라도 승리입니다. 승리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칠이 언제나 옳았던 것은 아니다. 그의 빛과 그림자를 처칠 워룸에 마련된 그의 개인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처칠은 1945년 5월 7일 독일의 항복을 영광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그해 7월 총선에서 야당인 노동당에 완패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평화가 다가오자 유권자들은 노동당의 고용 증대, 국민보건서비스(NHS) 설립 등에 더 호응했기 때문이다. 그 후 처칠은 한 차례 더 총리직을 맡았으나 이미 심신이 쇠약한 상태였고 당시 정책은 평가가 엇갈린다. 어떤 사학자들은 처칠이 오로지 전시에만 어울리는 지도자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처칠은 2002년 BBC 설문조사에서 셰익스피어, 다윈, 뉴턴, 엘리자베스1세를 제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뽑힌 바 있다. 20년이 흐른 지금에는 그에 대한 존경이 그의 제국주의·인종주의 발언 논란 등으로 전보다 약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강하다. 가장 뛰어난 처칠 전기 중 하나로 손꼽히는 『처칠, 운명과 함께 걷다』(2018)의 저자인 영국의 사학자 앤드류 로버츠는 처칠의 인종차별 발언들을 현대가 아닌 당시의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면서 “처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반(反)파시스트였으며, 처칠이 없었다면 진정한 인종주의자인 아돌프 히틀러가 인종적 이유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처칠은 복합적인 인물이고 처칠 워룸은 그의 다면체적 면모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장소다. 그의 성공 못지 않게 실패를, 그의 시대와 현재의 세계사적 상황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헤아리며 처칠 워룸을 돌아본다면 이곳은 중요한 영감의 장소가 될 것이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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