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9월 26일 소련의 세르푸호프 위성 관제센터에 비상경보가 울렸다. 미국 몬태나주 미사일 기지를 감시하던 소련의 인공위성 코스모스호가, 미국이 소련을 향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1발을 발사했다는 긴급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곧이어 발사한 미사일이 5발로 늘어났다는 경보신호를 또 보냈다. 비상이 걸렸다. 급박한 분위기 속에서도 관제센터 당직사령인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 중령은 냉철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만약 미국의 미사일 기습공격이 사실이라면 반격 여부를 결정할 시간이 아주 짧아 소련 지도부는 전적으로 자신의 보고 내용에 따라 전쟁을 결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트로프는 휘하장교들의 ‘즉각 보고’ 주장에도 불구하고 신중했다. 미국이 정말로 전쟁을 시작했다면 소련이 반격하지 못하도록 수백발의 ICBM을 발사했을 텐데, 컴퓨터가 잡아낸 것은 고작 5개에 불과한 것도 그를 신중하게 만들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페트로프는 이 경보가 컴퓨터 오류이거나 인공위성의 판단오류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크렘린에는 ‘컴퓨터 오류인 것 같다’고 보고했다. 사실확인까지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난 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인공위성이 보낸 비상경보는 구름에 반사된 햇빛을 미사일 발사로 잘못 인식한 것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의 침착한 대응이 아니었더라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지 모를 아찔한 순간이었다. 소련 해체 후 1998년 이 사건이 공개되자 전 세계는 그에게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미국 세계시민협회는 세계시민상을, 독일 드레스덴우호협회는 드레스덴상을 수여했다.
구름에 반사된 빛 미사일로 오판해 경보
그러나 이 사건은 큰 우려를 낳았다. 자칫 인류 전체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고 갈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인공위성의 기계적 오류를 시스템적으로 막은 것이 아니라 페트로프 개인의 지혜로 극복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는 미국의 기습 핵공격 방어를 위해 대규모 정보수집사업인 ‘라이언 작전(Operation RYaN)’을 실행 중에 있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우발적 위기 상황을 예방하지 못했다. 당연히 비판과 자성이 뒤따랐다. 이는 독일통일 후 비밀해제된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Stassi) 문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슈타지는 KGB의 라이언 작전에 공조하면서 이 작전의 추진 배경과 시행 과정, 문제점 등을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라이언 작전은 1970년대 말 소련의 대미(對美) 불신과 핵전력 열등감의 산물이었다. 1978년 12월 미·중이 수교 선언에 이어 1979년 새해 첫날 공식수교를 단행하자 소련의 대미 불신과 경계감은 더욱 깊어졌다.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대중 수교로 전략적 여유가 생긴 만큼 핵전력 우위를 활용해 소련을 선제공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핵미사일 공격은 상대의 공격 준비를 미리 파악하지 못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소련은 미국의 핵공격 준비로 볼 수 있는 모든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수집하여 조기 대응하기로 했다. 이에 KGB는 1979년 ‘미국의 선제 핵 공격 조기경보를 위한 새로운 정보활동 방안’을 마련하여 라이언 작전에 착수했다.
라이언 작전은 순조롭게 출범했다. 무엇보다 소련 지도부의 의지가 강해 사업추진이 탄력을 받았다. 안드로포프 KGB의장이 1981년 5월 전(全) 소련연방 KGB회의를 주재하면서 라이언 작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 자리에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이 직접 참석했다. 라이언 작전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강한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작전의 규모도 신설 직위가 300개에 이를 정도로 KGB 역사상 최대였다. 핵미사일 방어는 촌각을 다투는 만큼 정보의 수집, 분석, 대응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도록 설계했다. 위성이나 인간정보를 통해 수집한 미국의 핵 활동 움직임을 즉각 분석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군 지휘부와 바로 공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집할 정보도 치밀하게 기획했다. 우선 정보활동이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중점 정보수집 분야를 군사, 정치, 정보, 경제, 민방위 5가지로 범주화하여 체계화했다. 미국이 선제공격을 준비한다면 이 5가지 분야에서 반드시 이상징후가 나타날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일상에서 나타날 수 있는 놓치기 쉬운 전쟁 준비 징후를 중요한 정보수집 목표로 선정했다. 가령, 백악관·국방부·국무부 등 전쟁 주무부서의 회의가 비정상적으로 증가하거나, 대통령·하원의장 등 고위 정치지도자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휴가·행사를 취소하는 것도 체크 대상이었다. 심지어 육류 도축이 갑작스레 증가하는지 여부도 정보수집 대상에 포함시켰다. 장기(長期) 보관이 가능한 육류 도축량의 증가는 전쟁 준비의 중요한 지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방위와 의료분야도 중점 수집 목표였다. 전쟁준비를 위해서는 민간인 대피시설 점검, 혈액비축량 확대, 병상확보 등 분명히 이상징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선정한 정보수집 목표가 292가지였다. 이를 ‘292개 전쟁징후 지표(the 292 Indicators)’라고 불렀다. 미국 CIA도 소련의 선제공격 가능성을 조기 식별하기 위해 국가지표센터를 운영했으나 정보수집 목표를 이처럼 상세하게 지표화하지는 않았다.
미·소 우발적 충돌 막으려 탈냉전 시작
그러나 라이언 작전은 문제점도 많았다. 무엇보다 실제 전쟁 여부를 결심할 미국 지도부의 의중 파악에 소홀했다. 세르푸호프 위성센터의 비상경보 사건에서 본 것처럼 인공위성과 같은 기술정보만으로는 미국 지도부가 진짜 전쟁을 원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심각한 오판위험이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정보를 보강할 필요가 있었으나 이 노력이 부족했다. 또한 정보와 군사작전을 일치시켰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보완도 미흡했다. 라이언 작전은 정보·군사 합동 운영을 통해 경보 정보만 있어도 보복 핵 공격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오류·오판 가능성을 막을 수 있는 고민은 소홀했다. 영국 MI6의 이중스파이로 활약한 KGB의 올레그 고르디옙스키가 “라이언 작전은 경고정보가 군사적 조치로 즉각 비화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고 회고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라이언 작전에 대한 소련지도부의 지나친 관심도 부작용을 낳았다. 소련 지도부의 관심이 집중되다 보니 미국의 기습공격 가능성에 관한 정보가 쇄도했다. 정보의 쏠림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슈타지 문서도 소련 지도부가 미국의 선제 핵 공격 가능성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사소한 것도 미국의 기습공격 관점에서 보는 등 스스로 위기를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라이언 작전은 긍정적 측면과 문제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선제공격 신호로 볼 수 있는 것은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는 정보 책무의 충실한 태도인 동시에 특유의 철저함을 보여 준 것이다. 예상치 못한 부수적 효과도 얻었다. 미국 사회의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기 위해 곳곳에 협조망과 스파이를 심어 놓았는데, 이는 당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러시아의 대미 정보자산 토대가 되었다. 반면 앞서 말한 것처럼 미국의 선제공격 가능성을 전제로 정보활동을 하다 보니 모든 것을 선제공격 준비로 보는 등 자기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했다. 정보는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정(假定)의 상황에 집착하면 마치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이는 착각을 불러온다. 더욱이 정보 업무는 외부 간섭이 제한되어 이 같은 병리적 현상이 더 쉽게 나타난다.
실제로 이 같은 문제들은 세르푸호프 위성센터 비상경보 사건이 있은 지 불과 2개월 후인 1983년 11월 또다시 터졌다. 미·소간 일촉즉발의 위기를 불러온 소위 ‘소련의 전쟁공포(Soviet War Scare)’ 위기였다. 그때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 핵전쟁 공포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다만 그때는 미·소가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대화 필요성을 인식했고, 이것이 탈냉전의 싹을 틔우는데 기여했다. 위기가 인류 역사를 늘 후퇴시키는 것만은 아니라, 역사발전의 기회도 제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계속〉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