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일 수 있는 곳은 저 너머에…그래, 이제 어느 쪽이 ‘진짜 집’이지?[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문 너머의 세계
들섀넌 맥과이어 지음 | 이수현 옮김
하빌리스 | 244쪽 | 1만4000원
“스미의 심장엔 난센스가 깃들어 있었어. 그래서 스미에게 열린 문은 난센스를 숨기지 않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으로 데려갔지. 그게 스미의 진짜 사연이란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았다는 것. 너희도 그래. 너희 모두가 그래.”
섀넌 맥과이어의 <문 너머의 세계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마법에 대해 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기숙 학교는 마법 학교가 아니다. 이 학교는 마법의 세계에 갔다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쫓겨난 아이들을 위한 곳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태어나 쭉 살다가 어느 날 ‘문’을 발견하고 그 너머의 세계, 즉 마법 세계로 들어간 경험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 자신에게 딱 맞는 마법 세계로 빨려 들어가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가 갑자기 이유를 알거나 알지 못한 채 쫓겨나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마법 세계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 잘 살고 있던 아이들은 현실 세계로 돌아와 혼란과 우울을 겪는다.
그런 아이들은 부모님이 있는 현실 세계를 ‘집’이라 느끼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갔던 문 너머의 마법 세계가 ‘진짜 집’이다. 그들은 ‘진짜 집’이 그리워 병에 걸릴 지경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마법 세계에 다녀왔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사라졌던 것이 납치 같은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이가 마법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납치를 당했을 때의 충격으로 트라우마와 망상이 생긴 것이라고 이해한다.
부모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 아이들이 가게 되는 곳이 엘리노어의 기숙 학교다. 이 학교의 교장 엘리노어는 문 너머의 세계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들을 완전히 이해한다. <문 너머의 세계들>은 ‘문 너머’ 시리즈의 첫 권인데, 이 책의 주인공은 낸시라는 여자아이다. 낸시는 ‘망자의 전당’에서 살다 왔다. ‘망자의 전당’은 죽은 자들의 세계다. 낸시는 현실 세계에서 살았던 때보다 그곳에 있을 때가 훨씬 더 행복했다. 낸시는 그곳에서 석고상이나 죽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고 몇 시간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정지 기술을 익혔다. 그것이 낸시의 마법이라면 마법이다.
만약 <해리 포터>의 해리가 마법 세계에 갔다가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났다면 어땠을까? 마법 학교에서 친구도 사귀고, 신나게 경기도 뛰고, 사랑하는 여자친구도 생겼는데 갑자기 현실 세계로 내쫓기고 마법 세계로 가는 문이 사라져 버린다면? 그래서 다시 삼촌의 집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마법의 세계를 모르고 살았다면 그럭저럭 평범하게 살아갔겠지만, 한 번 마법 세계를 경험했다가 내쫓겨 현실로 돌아온다면 인생이 너무 힘들어지지 않을까?
낸시를 비롯한 엘리노어 기숙 학교의 아이들이 바로 그런 처지다. 엘리노어 교장은 자신의 학교에 온 아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연민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소설 속 이야기로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10대 시절을 돌아보면 같이 학교를 다녔던 아이들도 모두 각자의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만 살고 그 세계 외에는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지만, 자신만 아는 어떤 세계를 속에 품고 사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 몸은 현실 세계에 있지만 정신은 다른 세계에 가 있는, 현실 세계는 진짜 내가 속한 곳이 아니라고 느끼는 아이들 말이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아이에 속했다. <문 너머의 세계들>은 현실 세계가 자신의 세계가 아니라고 느끼는 10대들에 대한 이해로 가득 찬 책이다. 문 너머에 얼마나 아름답고 자유로운 세상이 있는지도 안다.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그런 세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C S 루이스와 유니콘과 뱀파이어와 망자들과 무지개와 미친 과학자가 뒤섞인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뛰어난 판타지 소설들이 종종 그러하듯 이 책도 독자를 또 다른 세상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때때로 책은 마법 세계로 가는 문이 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주인공이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똑똑히 밝히는 청소년 판타지 소설은 처음 봤다. 무지개 깃발이 커다랗게 휘날리는 판타지 소설이다. 2022년에 휴고상 최우수 시리즈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보다 샬레인 해리스의 추천사가 책 뒤표지에 들어가 있는 것이 더 부럽다.
이종산 작가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영상]마약에 대포차 500여대까지 미등록 외국인에 판매한 일당 45명 검거
- 코미디언 김병만 전처 폭행 혐의로 검찰 송치
- 최동석 ‘성폭행 혐의’ 불입건 종결···박지윤 “필요할 경우 직접 신고”
- ‘채식주의자’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 “한강 노벨상, 문학계가 공정한 시대로 나아간다는 희망
- 이준석 “윤 대통령 국정운영 ‘0점’···뭐든 할 수 있다는 착각에 정치 다 망가뜨려”
- “이과라서 죄송하기 전에 남자라서 죄송”… 유독 눈에 밟히는 연구실의 ‘성별 불평등’ [플
- 이재명 대표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재판부 생중계 안한다
- [속보]국내 첫 백일해 사망자 발생…생후 2개월 미만 영아
- [영상]“유성 아니다”…스타링크 위성 추정 물체 추락에 ‘웅성웅성’
- 보이스피싱 범죄수익 세탁한 상품권업체 대표…잡고보니 전직 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