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수수께끼의 능력자들
수수께끼를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등하굣길이 길었던 초등학교 때 친구와 함께 태양이 낮아지는 골목을 걷다가 말도 안 되는 문제를 내곤 즐거워했다. 출제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오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수께끼가 지루해지면 우리는 함께 무슨 복잡한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대개 현실에서 실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골목의 회합에는 검토할 줄 모르는 제안자들만 있었기 때문에 사업의 추진을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회는 어른이 된 뒤에나 하는 것이었고 우리들은 순간의 발견에 몰두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심코 한 뼘씩 커지는 자기 자신을 겁내지 않고 다음 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자라나는 사람들에게 후회를 먼저 가르치는 세계는 그다지 바람직한 세계가 아니다.
얼마 전 수수께끼 같은 책을 읽었다. 여러 시인들의 동시가 실린 <동시 유령의 비밀 수업>이다. 동시의 제목 또는 시의 구절 몇 칸을 비우고 답을 맞혀보는 양식으로 되어 있다. 잊고 있던 수수께끼 본능이 되살아나서 도전해보았는데 답을 맞히는 일이 쉽지 않았다. “둥근 알 속에 나를 가두었다가 그 알을 깨기 위해 힘껏 발 구르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알깨기의 이미지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대체할 무엇을 찾기 어려운 상태로 단단히 고착되어 있었다. 머릿속 생각이 방에 갇힌 것처럼 뱅뱅 돌기만 했다. 권기덕 시인의 동시였는데 끙끙거리다가 뒤편에 실린 정답지를 보고야 말았다. 답은 줄넘기였다.
또 다른 제목 수수께끼를 읽고선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오뚝이야. 쓰러졌다 일어나는 데 일 년이 걸릴 뿐이야”라는 동시였다. 나는 누구일까. 초광속 시대에 어떤 존재가 무려 일 년이나 걸려서 쓰러졌다가 일어난단 말인가. 정답은 세 글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주식도 아니고 비트코인도 아니다. 쓰러졌다 일어나는 존재에 대해 잠시라도 증권사 시황판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틀렸다. 이런 잡동사니들이 머리에 가득하다면 수수께끼 풀이 능력은 빠르게 추락할 수밖에 없다. 수수께끼 풀이 능력고사, 이른바 수풀능력시험이 있다면 난 최하등급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어느새 출제자 감각을 꿰뚫는 법을 잊어버리고 만 것일까. 이 문제 출제자는 이장근 시인이다. 정답은 ‘눈사람’이었다. 그렇다. 눈사람은 녹아서 쓰러지고 땅에 스며들고 세 계절을 견딘 뒤에 겨울이 되어 다시 일어선다. 그렇게 그는 우뚝 선 사람, 눈사람이 된다.
어린이들에게 문학이란 무엇일까. 책읽기는 낯선 관찰력, 생소한 언어를 가진 사람의 글을 만나 그의 감각을 엿보는 일에서 시작한다.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고 무릎을 칠 때도 있다. 뒷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귀 기울이는 마음도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묻고 답을 헤아려보는 것도 문학 감상자의 행위다. 무엇보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쓰여 있는 걸 통해서 쓰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다. 쓰여 있지 않은 낱말, 그 공간의 냄새, 쓰여 있지 않은 사건의 이면, 보이는 말 건너에 숨은 그 사람의 하루를 짐작하는 일이다. 좋은 문학은 빈칸을 사랑한다. 좋은 문학 감상자는 여백을 반기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수수께끼를 즐기는 그 시간처럼.
시드니 스미스라는 작가의 그림책을 몇 권 번역하면서 그가 글 없이 비워둔 몇 장면들 앞에서 눈물을 삼킨 적이 있다. 그의 모국어는 영어지만, 가장 잘 말하는 언어는 침묵이다. 그는 글이 전혀 없는 몇 장면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공백을 스스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공감의 역량이 되살아난다는 점에서 예술과 문학은 사회적 효능이 높다. 수학능력시험은 때가 있지만 수풀능력시험에는 접수기한이 없다. 수수께끼의 즐거움을 잊은 어른이라면, 수풀능력시험의 강자인 어린이들에게 한 수 배움을 청하면서 어린이책 읽기를 통해 공감의 복원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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