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 위 패딩을 입고 어머니는 거리에 남았다···“9번째 영정이 놓이지 않도록”[노동사(死), 그 후의 이야기]
서울에 비바람이 불던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서대문역사거리 인근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맞아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최고기온 7도의 쌀쌀한 날씨에 시민들은 우산을 쓰고 외투를 동여맨 채 걸음을 재촉했다.
분주한 발걸음 속, 이숙련씨(70)는 홑겹 검은 상복 차림으로 DL이앤씨(디엘이앤씨·옛 대림산업) 본사 앞에 우두커니 섰다. 군데군데 하얗게 튼 손에는 “e편한세상 DL그룹은 내 아들 살려내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그의 딸 강지선씨(33)가 비를 맞으며 모친의 옆을 지켰다.
이날은 이씨의 아들이자 강씨의 동생인 고 강보경씨(29)가 세상을 떠난 지 97일, 또 이들이 서울에 올라와 보경씨가 죽은 건설현장의 원청 본사 앞에 분향소를 차린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대학원생이던 보경씨는 DL이앤씨의 하도급업체인 KCC 소속 일용직으로 한 달여 근무했다. 지난 8월11일 부산 연제구 신축아파트의 창호 교체작업 중 20m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추락 방지 고리·안전망 등 안전장치는 없었다.
경남 통영에서 살던 모녀는 가족의 죽음 이후 서울에 올라와 6평 남짓 천막 분향소를 차려놓고 회사에 ‘공개 사과 및 진상규명, 그리고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가족의 죽음 후 100일…“우리는 태풍 속에 서 있다”
강씨는 1시간쯤 이어진 점심 피켓 시위를 마치고 분향소에 돌아와 비에 젖은 몸을 난로에 말렸다.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날씨를 견디며 사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길어질지 모르고 조끼만 들고 왔다가 패딩도 생기고 살림이 늘어나네요.” 최근 감기를 심하게 앓은 강씨가 말했다.
어머니 이씨도 그제서야 상복 위로 패딩점퍼를 덧입었다. 옷이라도 따뜻히 챙겨입던가, 날이 너무 추우면 분향소 안에 머무르라고 해도 이씨는 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상경 생활도, 1인 시위도, 집회 참여도 이들에게는 모두 처음이다. 농성 시작 한 달,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은 성한 데가 없었다. 전태일 열사 53주기 전국노동자대회를 하루 앞둔 지난 10일, 이씨는 도심 행진 중 경찰과의 충돌에 휘말렸다. 놀란 이씨는 이후 위경련으로 응급실로 이송됐다. 강씨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했다. “경찰은 방패를 들고 막은 것이겠지만, 어머니를 10분 동안 밀친 셈”이라며 “이러다 우리 엄마까지 잡겠다”고 했다.
졸지에 유가족이 된 강씨는 막막하다고 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모녀가 점심 저녁으로 본사 앞 시위에 나서는 이유는 “이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다. 강씨는 “유가족이 되어보면 겪게 되는 것들이 있다. 경찰은 수사를 안 하는 것 같고, 회사는 사과는커녕 감시하고, ‘벽에 뭘 붙이지 마라’며 화를 내고···”라고 말했다. 그는 “태풍 속에 서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들이, 동생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누구도 명쾌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들을 거리에 묶어뒀다. 강씨는 “원청 디앨이앤씨와 하청 KCC가 경위를 공유하기보다 서로 과실을 떠넘기고 있다”며 “같이 일하던 분의 성함마저 알 방법이 없다”고 했다. 디엘이앤씨 측은 “KCC가 원청 승인을 받지 않고 임의작업하다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KCC 측은 “경찰 조사 중인 상황으로 답변이 어렵다”고 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난해 1월 이후 디엘이앤씨 산하 공사현장에선 중대재해 7건이 발생해 강씨를 포함한 8명이 숨졌다. 지난 8월 말 고용노동부는 디엘이앤씨를 압수수색 했다. 아직 기소된 사람은 없다.
지난달 1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마창민 디엘이앤씨 대표이사는 “사고를 막을 책임을 진 원청으로서 굉장히 안타깝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며 “피해자와 유가족께 깊은 유감과 위로를 전한다”고 했다. 증인으로 채택된 이해욱 DL 회장은 외국 출장을 사유로 불출석했다.
디엘이앤씨 관계자는 “국정감사 이후 유족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계신 자리에서 마 대표이사가 사과를 드렸다”며 “모친께서 계시지 않아 누나분에게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유족은 사측의 공개사과와 7건을 포함한 중대재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책임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 영정이 어디까지 늘어야 바뀔 것인가
6평 남짓의 분향소 한쪽에는 해병대 옷을 입고 웃고 있는 강보경씨 영정 뒤편으로 앞선 사고 피해자들의 빈 영정들이 걸렸다. 강보경씨 이외에 다른 7명은 이름도, 얼굴도 알려진 바 없다. 영정에 적힌 것은 사고 일자와 사인뿐이다.
이씨는 “이 분향소에 영정이 다 둘러서 채워지면 그때야 우리 이야길 들어줄까”라고 했다. 아들처럼 떠난 얼굴 없는 이들의 영정에 이씨는 안타까움을 담아 보라색 리본꽃을 달았다.
분향소엔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중이다. 날씨가 추워져 붙인 단열재와 새로 들인 히터, 쌍화차 등은 모녀의 건강을 염려하는 이들이 하나둘 가져다놓은 것이다. 강씨는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 최근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었다. 그는 “저는 촌사람이라 이런 걸 잘 모른다”며 “자꾸 정신이 없어 깜빡하니까, 이런 마음들을 잊어버릴까 봐 사진이라도 찍어 남겨두고 있다”고 했다.
모녀는 버틸 것이라고 했다. 강씨는 “사망 경위도 몰라, 회사는 책임을 인정 안 해. 이런 상황에 갈 데가 없다”며 “누구도 처벌받지 않고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나”라고 했다. 딸을 바라보던 이씨가 말했다. “버텨야지. 아들을 위해서 버틸 겁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김경민 기자 kim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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