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본토서 러브콜 K뮤지컬 한계는 없다
한국 영화의 초창기 해외 영화제 수상 장면을 되짚어보자. 2002년 임권택 감독이 '춘향뎐'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레드카펫을 밟던 순간, 주연 배우는 턱시도까지 다 맞췄는데 한복에 꽃신을 신어야 했고 숙소에 들어가 울었다고 최근 고백했다. 그 후 20년이 지나 박찬욱 감독이 2022년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다시 한 번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배우들은 그때서야 턱시도를 입고 시상식에 설 수 있었다. 우리 영화는 세계적인 영화제를 석권했지만, 해외 시장 흥행에 대한 갈증을 아직 완전히 풀진 못했다. 다행히 넷플릭스라는 세계적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우리가 만든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소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우리도 흥행 불발이란 갈증을 풀어내며 비로소 K콘텐츠에 대한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뮤지컬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국내 뮤지컬이 해외에서 공연한 첫 사례는 1997년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린 국내 창작극 '명성황후'였다. 당시 첫 진출이라는 의미는 컸지만 공연 기간이 매우 짧았다. 공연 시장의 경우 초기 설치비 등을 고려할 때 장기 공연 없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는 구조다. 국내 뮤지컬이 해외에서 장기 공연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배경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생각에서 나온 현지화 실패와 보편성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란 지적이 당시부터 나왔다.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당시 해외 진출은 브로드웨이의 평가를 국내에 홍보하는 일회성 전시행정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다"며 "국내의 마케팅 수단이 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과정에서 우리 뮤지컬은 아이돌 스타나 국제적인 인지도를 이용한 개인의 역량을 바탕으로 해외 진출을 시도해왔다"고 진단했다.
그 후 25년이 지난 지금 한국 뮤지컬 시장이 성장하며 올해 연간 5000억원 시장 규모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규모 면에서도 성장을 이뤘지만 투자나 제작, 연기, 배우 등 생태계 자체의 질적인 성장도 있다. 국내 시장 성장과 함께 국내 뮤지컬의 해외 진출 방법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공동 제작과 라이선스 수출은 물론 해외 원작을 국내에서 제작해 해외에서 공연하는 방식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뮤지컬이 해외 진출을 적극 시도하고 있다.
최근 5년 만에 한국 무대에 다시 오른 뮤지컬 '시스터 액트'는 한국 뮤지컬 기업 EMK컴퍼니가 직접 제작하는 '제1호 인터내셔널 프로덕션' 버전으로 돌아왔다. 배우들은 뉴욕과 한국에서 오디션을 통해 직접 캐스팅하고 국내 제작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햄릿' '오즈의 마법사' '레베카' 등 200개가 넘는 뮤지컬의 흥행을 이끈 세계적인 연출가 로버트 조핸슨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원작의 음악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안무와 무대 장치는 훨씬 신나고 밝은 톤으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뮤지컬 제작사 EMK컴퍼니는 뮤지컬 '시스터 액트'의 원작 공연권을 구매해 2023~2024시즌 국내 15개 도시 투어 후 2025~2026시즌 아시아 투어를 준비 중이다.
오디컴퍼니는 또 다른 방법으로 다시 한번 해외 진출과 브로드웨이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저작권이 만료된 F 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1925)를 뮤지컬로 창작해 지난 10월 12일부터 11월 12일까지 미국 뉴저지에 위치한 페이퍼 밀 플레이하우스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올린 뒤 내년 브로드웨이로 직접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국내 회사들이 해외 진출을 노리는 방식은 '공동 제작'이다. CJ ENM이 지난해 초연한 마이클 잭슨의 생애를 다룬 주크박스 뮤지컬 'MJ'가 대표적인 사례다. 2013년 '킹키부츠', 2019년 '물랑루즈'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공동 제작자로도 참여해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토니상 다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라이브러리컴퍼니도 브로드웨이 뮤지컬 '뜨거운 것이 좋아'와 '앤줄리엣' 등을 공동 제작했다. 이 회사는 브로드웨이 공연 첫 리드 프로듀서 참여작인 '어쩌면 해피엔딩'을 준비 중이다. 라이브러리컴퍼니는 지난 8월 브로드웨이 뮤지컬 진출 확대를 위해 현지에 법인을 설립했다. 해당 법인을 통해 뮤지컬 투자, 배급, 공동 제작 등을 늘리며 브로드웨이 진출에 좀 더 속도를 낼 계획이다. 이 회사는 내년 국내 상장에도 도전하는 등 뮤지컬 업계에서 새로운 형태의 시도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창작 뮤지컬로 해외 시장에 도전하는 국내 제작사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뮤지컬 제작사 라이브의 '마리 퀴리'다. 이 공연은 내년에 주인공인 여성 과학자 퀴리의 고향인 폴란드로 수출할 예정이다. 앞서 이 작품은 일본 제작사 아뮤즈엔터테인먼트가 라이선스를 구입해 지난 3월 일본어 공연을 선보였다. 지난해 이 작품은 2022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쇼케이스를 진행했다. 기존 아시아권에 머물던 해외 진출의 통로를 미국, 영국 등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다양한 장르의 소극장 창작뮤지컬도 세계 진출을 노리고있다. 공연 제작사 HJ컬쳐의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지난달 13일부터 22일까지 대만 타이베이 1500명 규모의 극장에서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이 밖에도 드라마로 선풍적인 한류를 일으킨 '사랑의 불시착'이 앞선 드라마 열풍을 이어가기 위해 일본 시장 문을 두드리고 있다.
원 교수는 "우리나라가 세계 시장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할 만큼의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며 "보편적이고 현지화된 공연으로 아시아를 넘어 유럽·미국 시장에 도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동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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