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 낙인찍힌 은행, 탈출구 없나

2023. 11. 17.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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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은행 ‘돈 잔치’에 여·야·정 모두 고통 분담 요구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 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주부, 회사원, 소상공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21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우리나라 은행들은 일종의 독과점이기 때문에 갑질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의 ‘은행권 때리기’가 거세지고 있다. 대통령은 ‘갑질’, ‘종노릇’이란 표현을 동원해 비판하고, 당정은 상생·서민 금융을 확대하라고 요구한다. 손쉽게 막대한 이익을 거뒀으니 그에 걸맞게 사회공헌을 확대하라는 것이다. 야당은 초과이익 환수를 위한 ‘한국형 횡재세’ 도입을 추진 중이다. 은행권은 바짝 엎드렸지만, 노조는 강하게 반발한다. 전문가들은 은행의 사회적 책임 확대 필요성엔 공감하면서도 지금처럼 은행권 팔 비틀기 방식은 부작용만 키울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권의 전방위 압박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은행권을 향한 발언은 직설적이고 강도가 세다. 윤 대통령은 지난 10월 30일 국무회의에서 “마치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한 소상공인의 발언을 전하며 ‘독과점 구조’에서 ‘고금리 이자이익’을 챙기는 은행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11월 1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는 “우리나라 은행들은 일종의 독과점이기 때문에 갑질을 많이 한다”, “은행의 독과점 행태는 정부가 그냥 방치해서는 절대 안 된다.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했다.

올 초 ‘은행은 공공재’, ‘돈 잔치’ 발언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은행권 압박의 강도가 최근 다시 격해지는 모습이다. 윤 대통령은 올 2월엔 “고금리로 서민들이 힘든 와중에 은행들은 돈 잔치와 이자 장사를 벌이고 있다”며 은행의 ‘돈 잔치’와 관련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앞서 1월 금융위 업무보고에서는 “은행은 공공재 측면이 있다”면서 은행권에 고통 분담을 요구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 발언 이후 정부·여당도 압박 강도를 높였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1월 7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서민층은 어려운 가운데 은행은 막대한 이자수익을 올리는 상황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곱지 않다”고 했다. 같은 날 유의동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시중은행은 별다른 혁신 없이 매년 역대 최대 이익을 거둔다. 지난해 은행권 당기순이익은 18조5000억원이었고, 올 상반기만 해도 14조1000억원을 기록했다”고 했다.

은행권 노조는 연일 이어지는 대통령과 당정의 압박에 불만을 제기한다.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풀어야 할 국민의 대출상환 부담 증가를 은행들의 ‘이자장사’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박홍배 금융노조 위원장은 “대통령의 금융에 대한 몰이해가 가장 큰 문제”라고 했다. 그는 “독과점으로 인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주장은 금융산업의 특성을 전혀 모르고 하는 얘기다. 은행산업이 완전경쟁체제인 국가는 없다. 대통령이 과점체제가 은행산업 전체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결론을 내리자 정부와 여당이 은행권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은행의 당기순이익은 14조1000억원이다. 1년 전 동기(9조8000억원) 대비 43.9% 늘었다.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만 보면, 올 들어 지난 3분기까지 누적 이자이익은 30조9366억원이다. 1년 전 동기(28조8052억원)보다 7.4% 늘었다. 은행권 전체 사회공헌 규모는 지난해 기준 총 1조2380억원이다. 2021년(1조617억원)보다 1763억원 늘었다. 다만 은행권의 당기순이익 대비 사회공헌 비중은 지난해 기준 6.5%로, 2021년 6.9%보다 0.4%포인트 낮아졌다.

야당의 ‘한국형 횡재세’ 도입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1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대표는 회의에서 “횡재세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은행권이 지금보다 사회공헌을 확대해야 한다는 데엔 정부와 여야 모두 이견이 없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초과이익을 환수할지에 대해서는 서로 입장 차이가 있다. 정부와 여당은 은행권의 자발적인 사회공헌 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부담금 형태로 환수하는 ‘한국형 횡재세’ 도입을 추진 중이다. 횡재세란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과도하게 이익을 거둔 기업에 매기는 세금이다. 유럽 등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도입 중이거나 도입을 검토 중이다. 지난 3월 국회입법조사처가 공개한 ‘횡재세 도입 논의의 현황과 과제’ 보고서를 보면, 유럽연합(EU)은 지난해 9월 ‘연대기여금’이란 명칭으로 횡재세를 도입했고, 영국은 같은해 5월 영국 대륙붕의 석유 및 가스 생산으로 벌어들인 이익에 세금을 부과하는 ‘에너지 이익 부담금’ 도입을 발표했다. 지난해 3월 미국 상원에서는 석유회사들의 초과이익에 대해 소비세 형태로 과세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국내에서는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불로소득을 거둔 기업에 횡재세를 거둬야 한다는 여론이 컸다.

민주당이 택한 방식은 전통적인 의미의 횡재세가 아닌 부담금 부과 형태로 초과이익을 환수하는 방식이다. 지난 11월 14일 당 정책위 부의장인 김성주 의원이 대표 발의한 금융소비자보호에관한법률 등 개정안을 보면 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금융회사가 고금리 덕에 벌어들인 초과이익의 일부를 부담금(상생금융 기여금) 형태로 정부가 환수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채은동 민주연구원 연구위원은 “국가가 거둬서 재정에 쓰는 것(조세)과 특정한 사업에서 거둬서 특정한 사업에 쓰는 것(부담금)이 조세와 부담금의 큰 차이”라고 했다.

사실상 민주당 당론으로 결정된 개정안에는 이재명 대표, 홍익표 원내대표, 이개호 정책위의장 등을 포함해 강은미 정의당 의원, 강성희 진보당 원내대표, 용혜인 기본소득당 대표 등 모두 55명의 야당 의원이 동참했다. 앞서 11월 10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횡재세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해당 법안 발의 직후인 11월 15일 X(옛 트위터)에 관련 보도를 소개한 뒤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해…”라고 글을 달기도 했다. 채은동 연구위원은 “당정의 상생금융 확대와 야당의 상생기여금 도입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1년, 또는 2~3년 정도 효과를 보는 단기적인 처방에 가깝다. 은행권 입장에서도 횡재세를 도입하는 것이 안정적이다. 정부와 여론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기준치 이상의 초과이익이 발생할 때 정해진 룰에 따라 내면 된다”고 말했다.

서울 시내에 설치돼 있는 주요 은행들의 현금인출기 /연합뉴스


횡재세 도입에 선 긋는 당국


개정안은 지난 5년 동안 평균 순이자수익의 120%를 초과하는 순이자수익을 얻을 경우 해당 초과이익의 40%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기여금을 내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은행의 사회적 공헌 차원 기부를 정부가 은행의 팔을 비틀어서 걷는 관치 대신 법률에 따르도록 제도화시킨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김 의원실은 설명한다. 김 의원실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은행권(산업은행 제외) 이자수익에서 이자비용을 뺀 순이자수익은 약 28조원이다. 하반기에도 비슷한 추세가 이어진다고 가정해 단순합산하면 연간 순이자수익은 약 56조원이다.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평균 순이자수익 약 42조6000억원에서 기여금 수준을 최대치로 책정하면, 올해 대략 1조9600억원의 기여금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된다.

윤석열 정부는 횡재세 도입에 선을 긋고 있다. 법인세를 내고 또다시 횡재세를 내는 것은 이중과세이고, 시장경제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정부는 횡재세 도입보다는 은행권의 독과점 구조를 깨고 은행 자발적으로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횡재세 도입 추진을 밝힌 지난 11월 10일 한덕수 국무총리는 “횡재세보다는 환경이 좋아서 돈을 많이 벌었으면 기존 누진적 세금 체계를 통해 내는 것이 옳다고 본다. (횡재세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같은 날 ‘대통령실과 당국은 은행 독점구조 개선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이를 정리해 연내 은행 독점 완화 대책을 발표할 계획’이라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국회입법조사처도 지난 3월 보고서에서 횡재세 도입과 관련해 초과이익 과세 기준 설정과 소급입법 문제와 관련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적었다. 보고서는 어느 정도를 해당 기업의 초과이익으로 과세할 수 있는지 명확한 기준이 제시돼야 한다고 짚었다. 또 영업이익이 예년 동기 대비 일부 증가한 것을 두고 횡재세 부과대상이 되는 영업이익이라고 보아 일종의 초과이득세를 과세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을 수 있다고도 했다.

김성주 의원실 관계자는 “초과이익을 거둔 은행들에 무조건 돈을 걷겠다는 것이 아니다. 횡재세는 사회 환원이라는 목적도 있지만, 은행들 스스로 과도한 예대마진을 줄이는 유인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도입 그 자체로 가격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29일 서울 시내 한 은행에 대출 금리 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은행권은 바짝 엎드린 모양새다. 정부와 여당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내부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주변에선 올해 역대급 실적을 거둬서 성과급도 많이 받을 것이라고 부러워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금 분위기에서 성과급을 받으면 얼마나 받겠나. 다른 업종과 비교해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 성과급을 받는 다른 대기업이 이런 비판을 받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고금리로 서민은 고통받는데 은행원들만 배를 불리고 있다는 프레임 때문에 많은 직원이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위축돼 있다”고 말했다.

노조에서는 경영진의 안이한 대응과 인식이 현 사태를 불러왔다고 지적한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최근 노사 단협 과정에서 우리가 사측에 제안한 내용이 있다. 각 금융사가 금융산업공익재단에 기금을 출연하고, 이를 통해 사회공헌 활동을 적극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측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별로 이미 사회공헌 투자를 하고 있는데 굳이 한꺼번에 모아서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재단을 통하면 각사의 브랜드 마케팅과 홍보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해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노사 참여하는 사회적 책임 확대”


하지만 대통령의 은행권 비판과 당국 압박이 본격화된 이후 금융사들은 사회공헌 투자를 확대하는 방안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하나은행은 지난 11월 3일 소상공인·자영업자 30만명에 대한 1000억원 규모의 금융 지원 계획을 내놨고, 신한금융그룹도 11월 6일 약 1000억원 규모의 취약 금융 계층(소상공인·자영업자·청년) 지원 방안을 내놨다. KB금융·우리금융·NH농협금융 등도 이자 이익의 기부나 출연 확대, 취약계층 고금리 대출의 저금리 전환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20여개 회원기관(은행·보증기금·한국주택금융공사)은 2019년 1조1059억원, 2020년 1조929억원, 2021년 1조617억원, 2022년 1조2380억원 등 4년 연속 1조원 이상을 사회공헌에 썼다. 지난 2월에는 3년간 취약계층에 10조원(보증 재원 승수 효과 포함) 이상을 지원하겠다는 상생 방안도 추가로 발표한 바 있다.

박홍배 금융노조 위원장은 “지난해 사회공헌 기금 규모가 1조2000억원이 넘고 올해는 지난해 수준을 상회할 정도로 매년 사회공헌 규모를 늘리고 있지만, 여전히 은행들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이나 금융지주를) 방문할 때마다 상생금융 보따리를 풀고 있다. 당국이 금융산업의 건전성·안정성이라는 중차대한 이슈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했다. 그는 민주당의 상생금융 기여금 도입 추진에 대해서도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박 위원장은 “기여금이란 표현을 쓰고 있지만 사실상 횡재세와 마찬가지다. 야당 안대로 하자면 올해만 1조9000억원 넘게 기여금이 발생하는데, 그렇다면 이 기여금만 내면 사회공헌 명목의 추가 출연금은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지 되묻고 싶다. 횡재세 도입 논의가 부상하면서 노조 차원에서 도입의 적정성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민주당이 현장의 의견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국장은 “금융의 공공성이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있고, 은행권 역시 이에 대한 이견이 없다. 문제는 정부가 상생금융이라는 명분 아래 윽박질러 토해내게 하는 방식이다. 당장은 효과를 거둘 수 있겠으나 중장기적으로는 금융사뿐 아니라 금융시장 전체에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노사가 참여하는 금융산업공익재단이나 기금 마련을 통한 통합적·사회적 책임의 확대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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