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몰래 세상 돕는 ‘김장하 바이러스’…감염자가 100명, 1000명”

2023. 11. 1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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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줬으면 그만이지> ·다큐 <어른 김장하> 참여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인터뷰
<어른 김장하>에 출연한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 네이버 영화


“책이 나오고 난 뒤, ‘우리도 김장하 선생님한테 도움을 받았는데, 책에는 반영이 안 됐다’며 뒤늦게 제보를 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하나하나 다시 정리하고 있는데, 그것만 해도 책 한 권이 더 나올 정도다.”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의 말이다. 김 전 국장은 김장하 취재기 <줬으면 그만이지>(피플파워)를 쓰고, 2023년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받은 <어른 김장하>(김현지 PD) 제작에도 참여했다. <어른 김장하>는 지난 11월 15일 영화로도 개봉해 현재 전국에서 상영 중이다.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60여 년 동안 ‘남성당 한약방’을 운영했다. 남성당 한약방은 한때 약방을 찾는 손님들로 길거리 노천시장이 형성될 만큼 문전성시를 이뤘다. 김장하 전 이사장은 한 달에 단 하루만 쉬어가며 번 돈을 지역의 돈 없는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장학금으로 내주고, 지역 시민사회단체에 후원금으로 보냈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자동차도 없이 자전거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좁고 낡은 집에서 살며 안감이 다 헤질 때까지 옷을 입었다. 김 전 국장은 장학생 숫자가 “1000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4년에는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했고, 1991년에는 학교를 국가에 기부채납했다. 김 전 이사장은 퇴임 인사말에서 명신고를 설립한 이유에 대해 “내가 배우지 못했던 원인이 오직 가난이었다면, 그 억울함이 다른 나의 후배들이 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고, 그리고 한약업에 종사하면서 내가 돈을 번다면 그것은 세상의 병든 이들, 곧 누구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거둔 이윤이겠기에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김 전 국장은 김장하 선생의 나눔에는 ‘진주정신’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고 짐작했다. 김 전 국장은 “김장하 선생이 쓴 ‘진주정신에 관한 소고’라는 글에서 선생은 진주농민항쟁(1862년), 형평운동(1923년), 조선시대 남명 조식 선생의 실천적인 학문 정신 등을 강조하며 진주정신을 주체, 호의(好義), 평등 이 세 가지로 제시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가 심화하는 일련의 정치적 흐름 속에서 우리 진주시민들이 전통적인 진주정신을 잃어버리고 주체, 호의, 평등 정신을 살려내고 있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 같다”라며 “그 정신을 되살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장학금 지원이나 시민사회단체 후원 등은 ‘진주정신’을 살려야 한다는 소명의식의 실현이기도 했다는 추측이다.

김 전 이사장은 숱하게 많은 사람을 도왔지만, 간섭하지 않았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김장하 장학생인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2019년 후보자 청문회 자리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고 하신 선생의 말씀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김 전 이사장의 오랜 친구는 그의 인생을 ‘무주상보시’로 설명했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푼다는 뜻이다. 김 전 국장은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바라는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보시 이런 걸 실천해온 사람이 김장하였다”고 말했다. 김장하 이사장의 삶을 7년 동안 취재해온 김주완 전 국장은 자신이 해온 나눔과 지원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는 김 전 이사장을 대신해 진주 지역의 많은 인물을 만나며 증언을 들었다. 그는 취재 과정을 통해 ‘100명의 김장하, 1000명의 김장하’를 많이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장하 전 이사장을 만난 후, 그의 삶을 닮고 싶고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려고 하는 “‘김장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다.

-김장하 전 이사장의 삶을 조명한 책 <줬으면 그만이지>와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에 많은 사람이 감동을 표하고 있다. 김 전 이사장의 삶이 왜 반향을 일으킨다고 보는가.

“김장하 선생의 삶이 알려지면서 진주에 여행 오는 사람도 늘었다. 남성당 한약방을 둘러보고 선생이 강조했던 진주형평운동(1923년부터 일어난 신분해방운동)의 유적지들을 돌아보고 가더라. 한약방 옆에서 자전거포 하는 사장님에게 물어보니 셔터 내려진 한약방 앞에서 사진 찍고 가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고 한다. 김장하 선생의 삶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그동안 어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 사회에 굉장히 만연하지 않았나. ‘어른’은 사실 좋은 뜻인데 ‘어른’ 하면 ‘꼰대’라는 등식이 생길 정도다. 그러다 보니 세대 간 갈등도 첨예화되고, ‘노인’ 하면 즉각적으로 어버이연합의 ‘태극기부대’, ‘엄마부대’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실 ‘어버이’, ‘엄마’라는 말은 굉장히 포근한 말인데도 본래의 의미가 사라졌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이런 시대에 진짜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을 만나니까 사람들이 그만큼 반가웠던 것 같다. 어른과 ‘꼰대’를 동일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짜 어른’에 대한 갈망, 기다림 같은 것들이 은연중에 있었던 듯하다.”

<줬으면 그만이지> 표지/ 피플파워


-2015년부터 7년간 김장하 전 이사장을 취재했다.

“사실 ‘김장하’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91년이다.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헌납한다는 뉴스를 통해서였다. 그때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꾸준히 마음속에 담고 있다가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한 건 2015년 3월이었다. 2015년 2월에 포털 다음 ‘뉴스펀딩’을 통해 ‘시대의 어른’ 다섯 분을 소개했는데 그 다섯 분 가운데 김장하 선생도 있었다. 김장하 선생에게 허락받지 않고 쓴 글이었다. 그후에 선생을 찾아뵙고 허락도 없이 글을 썼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크게 화를 내실까봐 두려웠는데, ‘이미 써버린 걸 어떡하냐’고 하시고는 말았다. 그러면서 김장하 선생을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선생에 대한 취재와 기록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돌았다. 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이들도 선생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는데, 워낙 완강하게 싫어하시니 엄두를 못 내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이참에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 선생을 취재할 수 있도록 우리가 좀 도와주자’는 이야기가 암묵적으로 나왔다. 이분들이 김장하 선생이 참석하는 모임이나 밥 먹는 자리에 나를 끼워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선생과도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었다.”

“‘어른’ 하면 ‘꼰대’라는 등식이 생길 정도다. ‘노인’ 하면 ‘태극기부대’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진짜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을 만나니까 사람들이 그만큼 반가웠던 것 같다. ‘진짜 어른’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영어 제목이 ‘A man who heals the city’(도시를 치유하는 사람)이다. 김 전 이사장의 삶이 지역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줬다고 보나.

“우리나라 도시들의 특징이 익명성이 강하고, 파편화돼 있다. 그에 반해 진주는 공동체가 살아 있는 도시다. 물론 진주도 고령화가 심하고 보수적이긴 하지만 시민사회 또한 탄탄하게 살아 있다. 또 지역의 문화예술 활동 또한 활발한 편이다. 전문예술법인 극단현장도 진주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상근 단원만 10명이 넘고, 공연 횟수는 800회가 넘는 전국구 극단이다. 서울의 유명한 극단들과 견줘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전 세계적으로 공연하러 다니는 예술공동체 ‘큰들’은 산청군에 마당극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진주의 문화예술적인 특성이 김장하 선생 한 분 덕분에 이루어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밑바탕에는 선생의 대가 없는 지원이 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수많은 단체가 지원을 받았다.”

-책을 보면 진주신문을 비롯해 <친일인명사전> 편찬, 진주환경운동연합 등 정치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수많은 단체에 지원했다.

“책이 나오자 선생을 평소에 잘 알고 있던 분들도 ‘이 정도였는지는 몰랐다’고 이야기한다.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도 내가 도움을 받았고, 내가 소속된 단체가 도움을 받았다는 것 정도까지만 알지 어디까지 지원의 손길이 미쳤는지는 구체적으로 몰랐다. 선생이 스스로 말씀을 안 하니까. 책을 보고 ‘우리도 김장하 선생님한테 도움을 받았는데, 책에는 반영이 안 됐다’며 뒤늦게 제보를 하는 분도 굉장히 많다. 하나하나 다시 정리를 하고 있는데, 그것만 해도 책 한 권이 더 나올 정도다. 하나만 예로 들면, 행정고시 출신인 하승철 하동군수가 젊은 나이에 동장으로 재직할 때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범죄피해자지원제도가 없었다. 관내에 부모가 범죄 피해를 당한 집이 있었는데, 그 자녀가 당장 살 곳이 없어진 상황이었다. 동장 입장에서 지원해줄 제도적 장치도 없고 끌어올 예산이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한 직원이 남성당 한약방을 찾아가면 무슨 방법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한약방에 찾아갔더니 딱한 사정을 듣고 피해자의 자녀들이 살 수 있는 집을 전세로 바로 구해줬다. 빌려준 게 아니라 전세금을 그냥 준 것이다. 그런 일들이 끊임없이 제보로 들어오고 있다.”

-국가 제도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이 미비한 상황에서 한 개인이 이를 보완하는 역할까지 한 것 같다.

“지금은 인구가 감소하는 시대라 젊은 사람들은 학교를 설립한 의미에 대해 잘 이해를 못 한다. 굳이 100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학교를 설립해 국가에 헌납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1980년대는 학생 수는 엄청 늘어나는데, 학교가 늘어나는 학생 수를 감당하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한 교실에 수용되는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콩나물 교실’이라고 불렸고, 그나마 수용하지 못해 2부제 수업을 할 때였다. 그 당시 진주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시험인 연합고사를 치면, 진주뿐만 아니라 그 인근에 있는 학생들도 지원했다. 해마다 수천명이 연합고사에 떨어져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거나 외곽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야 했다. 학교 설립은 그 당시 국가가 감당하지 못하는 교육 수요를 대신 감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에 이미 여성 운동 분야에까지 지원했다. 1996~2000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진주지부 이사장을 맡으면서 가정폭력 피해여성 보호시설인 ‘내일을여는집’ 설립을 지원했다. 책에 수록된 내일을여는집 사회복지법인의 정행길 한울타리 이사장의 다음 말이 인상적이었다. “(당시) 그런 인식(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편견)이 경상도 남자는 더했는데, 김장하 이사장님은 ‘여성도 인간이다’ 거기서부터 출발을 하시더라고요. 너무나 놀라운 일이죠. 사람은 다 인간이고, 인간이면 똑같이 대접받아야 하고, 우리가 그런 서비스를 해줘야 한다. 우리 상담소는 무료로 변호사를 선임해서 변론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거든요. 그걸 활용해 여성도 사람답게 살도록 도와주자, 이사장님은 딱 그런 자세였어요. 참 드문 분이셨죠.”

“그렇다. 선생은 정치인들에게는 지원을 안 했지만, 어떻게 보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단체들은 지원을 해왔다. 사실 나는 ‘선생께서 진보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해도 그 연세, 그리고 경상도 남자라는 특성으로 여성관에 대해서는 가부장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지레짐작으로. 만약에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이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또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취재하는 과정에서 지레짐작이 완전히 깨졌다. 선생은 이미 그 시절에 호주제 폐지에도 동참하며 거리 캠페인에 나서기도 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전부 여성들 사이에서 선생 혼자 남자로, 그것도 나이 지긋한 남자로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걸 보면서 내 생각이 완전히 깨졌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김장하 전 남성문화재단 이사장/네이버 영화


-1992년부터 2004년까지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회장과 이사장직을 맡았다. 지역 단체를 주로 뒤에서 돕는 편이었고 공개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는 김 전 이사장에게 이례적인 일이었다. 형평운동은 무엇인가.

“1923년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해방운동, 계급철폐운동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전국단위의 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태동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거친다. 형평운동은 진주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했다. 진주의 역사에 있어서도 굉장히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형평운동의 기본사상이 평등이다. 1992년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선생이 앞장서서 설립하면서 구두로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과거의 역사를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그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지금도 잔존하는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했다. 남녀 간의 차별, 빈부의 차별, 장애인에 대한 차별 등을 없애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명확하게 규정했다. 모든 분야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평등정신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선생이 여성 문제에 대해서도 일찍이 그런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진주’라는 공간과 지역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 같다.

“짐작이긴 한데, 선생이 ‘진주정신에 관한 소고’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선생은 진주농민항쟁(1862년), 형평운동(1923년), 조선시대 남명 조식 선생의 실천적인 학문 정신 등을 강조하며 진주정신을 주체, 호의(好義), 평등 이 세 가지로 제시했다. 이 세 가지가 진주의 역사적 전통인데 자본주의가 심화되는 일련의 정치적인 흐름 속에서 우리 진주 시민들이 전통적인 진주정신을 잃어버리고 주체, 호의, 평등 정신을 살려내고 있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정신을 되살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또한 짐작이지만 그런 연장선상에서 형평운동기념사업회도 만들고, 그 세 가지 정신에 부합하는 단체들에도 지원하셨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냥 저 단체가 좋아 보이거나 지인이 부탁해서 지원해준 차원이 아니라 ‘진주정신’을 살려야 한다는 소명의식 내지는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원을 하신 것 같다.”

“선생은 단체에 지원을 하든 개인에게 장학금을 주든 일체 간섭이 없었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이런 당부나 훈계조차 들어본 사람이 한명도 없다. 남에 대한 우월의식이나 콤플렉스가 전혀 없었다.”


-뜻이 강할수록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선생은 단체에 지원을 하든 개인에게 장학금을 주든 일체 간섭이 없었다. ‘너,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이런 당부나 훈계조차 들어본 사람이 한명도 없다. 명신고를 운영할 때도 교장선생님이나 교사들에게 ‘이런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교사가 돼야 한다’ 주문을 한 적이 없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한 사람 중에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나만큼 노력을 안 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우월의식을 드러내는 이가 많다. 김장하 선생도 가난한 집안환경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에겐 그런 콤플렉스가 전혀 없었다. 얼마나 스스로 수양을 하면 저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김 전 국장은 30여 년 전 김장하 전 이사장의 존재를 알고 그 영향을 받아 자동차를 사지 않았다고 했다. 책에 나오는 주변 분들 모두 한결같이 조금이라도 김 전 이사장의 삶을 닮으려고 하고, 또 김 전 이사장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차를 사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검찰에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 1990년대 초반, 지역신문 기자 월급으로는 자가용 승용차를 모는 건 아무리 따져봐도 타산이 맞지 않았지만, 너도나도 차를 사는 분위기였다. 알고보니 당시만 해도 명절을 비롯한 이런저런 기념일들에 기자실로부터 ‘촌지’가 나왔던 것이다. 규모가 작은 지역 언론사일수록 검찰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는 어렵다. 또 그러기에는 약점이 많았다. 검찰의 정보라인은 언론사 사주의 비리뿐만 아니라 기자들이 어디 가서 돈을 받았는지 수집하고 있었을 터였다. 권력을 정면으로 비판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권력기관에 약점 잡힐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가 김장하 전 이사장의 존재였다. 돈이 그렇게 많아도 평생을 차 없이 살며 남을 돕는 분도 있는데, 나는 김장하 선생처럼 돈으로 사람들을 도울 순 없지만, 적어도 떳떳하지 못한 돈을 받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김장하 선생의 장학생들, 또 김장하 선생을 아는 분들은 모두 각자 자기 자리에서 선생을 가슴에 품고 선생만큼은 아니더라도 선생처럼 우리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겠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

-2021년 타계한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등 지역사회의 숨은 어른들을 발굴해 취재해왔다. 여기에 대한 남다른 소명의식이 있나.

“우리 주변을 찾아보면 훌륭한 어른들이 많다. 단지 우리가 찾지 않을 뿐이다. 또 어른이라고 할 만한 분들은 김장하 선생처럼 스스로 잘 나서지를 않는다. 돈을 많이 벌어 훌륭한 일을 할 수도 있지만,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훌륭한 삶을 살아오신 어른이 굉장히 많다. 김장하 선생과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정말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어른들을 계속 찾아서 취재하고 있다. 오히려 어른이라고 불리기 어려운 이들이 뭔가를 뻥튀기하듯 부풀려 부각하려고 해서 ‘진짜 어른’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언론이 그러한 어른들을 안 찾아서 그렇다. 얼마 전 모 대기업 회장이 초등학교 동창 등 고향 사람들에게 1억원씩 보내 화제가 되지 않았나. 포털에 몇 날 며칠씩 기사가 돌아다니던데 기업에서 홍보하는 내용은 그렇게 크게 쓰면서, 본인을 내세우지 않고 지역에서 묵묵히 역할을 해온 어른들은 찾아서 보도하지 않는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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