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하지만 무해’한 여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책과 삶]

최민지 기자 2023. 11. 1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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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우위 노동시장 환경 속에서
여성은 개인화된 능력주의 신봉
일하는 여성들의 일·삶 경로 추적
‘액팅’ 쇼잉‘ 등 새로운 개념 눈길
서울 시내의 젊은 직장여성들이 야외에서 점심을 먹기위해 김밥과 커피를 들고 길거리를 걷고 있다. 정지윤 기자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김현미 지음 | 봄알람 | 316쪽 | 1만8000원

‘유능하지만 무해할 것’, ‘겸손하지만 (적당히) 나댈 것’, ‘누구에게나 친밀하게 굴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지만 이성적 호감으로 오해받지는 않을 것’,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일을 잘할 것’.

노동시장에 진출한 많은 여성들은 자신도 모르게 위와 같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수행하고 있다. 그 자신이 페미니스트이건 아니건, 남성중심 문화에 문제의식이 있건 없건 상관 없다. 남성이 기본값인 일터의 높은 장벽을 뚫으려면 ‘젠더 각본’의 수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노동시장의 성 불평등은 수많은 통계로 입증되지만 많은 여성들은 개별화된 능력주의를 신봉한다. 일터에서 겪는 불합리는 자신의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무한 경쟁은 신성한 ‘나와의 싸움’으로 바꾼다.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한, ‘흠결이 없는 파편’들의 사회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는 한국의 일터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흠결 없는 파편’이 되어가는지 탐구한 책이다. 여성들이 처한 구조적 곤경과 감정 상태, 각자의 일터에서 겪는 위태로움이 고스란히 담겼다.

책은 아들보다 딸이 선호되는 시대적 배경부터 시작해 학창 시절과 취업준비 시기를 거쳐 일터에 나간 다양한 연령대 여성의 삶을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남성과 적지 않은 여성조차 믿고 있는 ‘2023년 한국의 일터에는 성차별이 없다’는 명제가 철저히 무너진다. 어학점수와 학점, 인턴 경력 등이 빼곡한 여성 지원자보다 ‘1~2학년 때는 놀다가 군대 갔다와서 정신 차렸다’는 남성 지원자의 서사에 환호하는 기업 고위 간부들이 등장한다. 일터에 친밀성을 공급하지 못하는 남성이 그저 ‘낯을 가리고 점잖은 성격’으로 이해받는 동안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여성도 만나게 된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문화인류학자인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 교수다. 오랜 시간 한국 여성들의 일 경험을 해석하며 페미니즘이 현대의 일터에서 어떻게 자원이 될 수 있을지 질문해왔다. 김 교수는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를 통해 단선적이고 균질하게 표준화된 생애주기를 비켜가면서 자율성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은 채 사무직·전문직 일터에서 살아가는 20~60대 한국 여성들의 일과 삶 경로를 좇는다. 멀게는 2009년부터 가깝게는 2023년 9월까지 인터뷰한 남성과 여성의 솔직한 경험이 바탕이 됐다.

김 교수는 이른바 ‘젠더 각본’ 속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이 택하는 생존 방식을 ‘액팅’, ‘쇼잉’ 등 흥미로운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회사에서 ‘유능하지만 무해한’, ‘겸손하지만 나대는’,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 어린 여자애’로 인식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모두가 인지하고 또 수행하고 있지만 이름 붙이지 못했던 여성들의 행동 전략은 비로소 적확한 단어로 정의내려진다. 이것이 주는 쾌감이 상당하다.

여성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 개탄스러운 대목은 일터의 남성 연대를 파헤친 2부 ‘우리의 동료 남성들에 대하여’다. 인터뷰에 참여한 20~30대 남성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가부장적이고 꼰대 같은’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들은 주기적인 성구매 사실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다. ‘잠자리 승진’, ‘베갯머리송사’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그에게 여성 동료들은 ‘자신의 여성성이나 섹슈얼리티를 활용해 기득권 남성과 거래하고 협상하는 교활한 존재’다.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미투 운동 역시 그에겐 ‘여성이 거래가 실패한 이후 하는 고발’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남성 연대를 거부하는 남성들도 적지만 있다. 일명 ‘일탈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곧장 여성들의 연대자가 되지 않을뿐더러, 남성 연대에서 박탈 또는 추방된 듯한 염려를 안은 이들의 존재가 여성들에게 감정적 부담이 된다는 대목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책에는 고학력자들이 모인 일터인 대학에서 평생을 일한 저자의 경험과 감정이 적극적으로 개입된다. 저자는 ‘라인 타기의 중요성’을 말하는 현재 2030 여성들에게 느낀 실망스러움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호주 시드니에서 협업한 해외 연구자들에게 ‘조찬 모임’을 제안했다가 ‘돌봄의무자를 배제한다’는 지적을 받은 경험을 고백하고 자신조차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와 관습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익숙한 불평등에 눈감는 현실에서 ‘침묵 깨기’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위태로운 경험이 녹아 있는 글이지만 대체로 읽기 쉬운 에세이처럼 풀어냈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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