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전쟁포로 목소리 들려준 ‘연인’…“제 잘못이 아닙니다”
드라마 ‘연인’, 여성 전쟁포로의 시선 보여줘
병자호란 지배층 무능과 여성 수난사 생생
“비극적 상황에 내동댕이쳐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 MBC 드라마 <연인>(금·토 9시50분, 파트1 2023년 8월4일~9월2일, 파트 2 10월13일~11월18일)을 집필한 황진영 작가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연인>은 조선 사회에 “독한 패배”를 안긴 병자호란을 겪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작은 통통 튀는 로맨스였다. “연모하는 이와 더불어 봄에는 꽃구경하고 여름엔 냇물에 발 담그고 가을에 담근 머루주를 겨울에 꺼내 마시면서 함께 늙어가”는 게 소원인 말괄량이 ‘애기씨’ 유길채(안은진). 그가 사는 평화롭고 청정한 능군리 마을에 어느 날 정체 모를 선비 이장현(남궁민)이 나타난다. 길채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분꽃 피는 소리’를 들은 장현은 길채에게 직진하지만, 길채의 마음은 어릴 때부터 봐온 성균관 유생 남연준(이학주)을 향해 있었다. ‘연준 도령’은 길채의 친구인 경은애(이다인)와의 혼인을 준비 중이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사각관계 로맨스 드라마 구도다. 그러나 능군리 마을의 사랑과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병자호란 겪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김준원)는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 ‘친명’ 정책을 펴온 조선을 먼저 굴복시킬 목적으로 1636년(인조 14년) 12월에 조선을 침략한다. 전쟁은 12월에 시작해 다음해 1월에 끝날 정도로 짧았지만, 피해는 막대했다. 느닷없는 침략이었기에 인조(김종태)와 대신들은 비교적 안전한 강화도로 피란 갈 새 없이 남한산성에 고립돼 한 달 정도 버티다 굴욕적인 항복을 한다. 그 결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보내야 했고, 50만~60만 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갔다.
국가의 위기는 개인들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남성은 전쟁터로 향했다가 죽고, 노인과 어린이와 여성만 남은 마을은 청나라 군대의 노략 대상이 됐다. 장현이 “재물과 여자”라고 청나라 군대의 목적을 간파했듯 그들은 무고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재물을 취하는 데 거침없었고, 자신들의 성적 탐욕을 위해 여성을 마구잡이로 납치했다.
<연인>은 전쟁 발발의 책임을 굳이 따져 묻지 않지만, 전쟁이라는 위기 앞에서 한없이 무능하고 비겁했던 국가와 지배층, 그리고 가부장 사회를 향한 비판적 견해를 단호하게 드러낸다. 전쟁이 나자 임금과 대신들은 누구보다 재빠르게 피신해 ‘명분’에 관한 공론(空論)을 하느라 전쟁 피해를 줄일 시간을 허비한다. 그런 임금이어도 사대부에게는 “나라의 근본(임금)을 구하는 일”이 중요했다. 마을 남성들에게 의병이 되어 임금을 구하자고 독려하는 연준에게 장현은 묻는다.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는데, 왜 백성이 임금을 구해야 한단 말입니까? 위험할 때 제일 먼저 몸을 피하는 것이 나라의 근본이 할 일이오?”
적군 홍타이지도 묻는다. “전장에 나서지도 않는 임금을 저리도 사모하는가?” 홍타이지의 이 말은 조선 사람들을 향한 찬사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무능력하고 비겁한 임금과 국가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임금을 지키는 일(연준)과 사랑하는 이를 지키는 일(장현)을 대비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국가는 누구(무엇)를 지켜야 하는가? 인조는 두려움에 휩싸여 자기 안위를 지키느라 나라와 가족을 지키지 못했고, 대신들과 사대부는 명분을 지키느라 무고한 백성의 희생을 막지 못했다. 전쟁이 비극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누구를 지켜야 하는가
한편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을 지키길 강요하기도 한다. 드라마는 정절을 지키는 일(조선 사회)과 삶을 지키는 일(길채)의 충돌을 통해 여성의 관점으로 전쟁을 보게 한다. 어느 전쟁이나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와 여성인데 병자호란은 그 피해가 더 심각했다. 남성뿐 아니라 무수한 여성도 포로로 끌려갔다.
여성의 정절을 강조했던 조선 사회에서 청나라로 끌려가는 것은 정절을 잃은 ‘훼손된 여성’이 된다는 것을 뜻했다. 피란길에서 많은 여성이 몸이 더럽혀지기 전에 차라리 죽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당시 상황을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기록한다. “적에게 욕보지 않으려는 부인들이 바다에 빠졌다.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에 떠 있는 낙엽처럼 바람에 날려 둥둥 떠다녔다.”
다른 여성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길채는 삶을 선택한다. 그리고 다른 여성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께 죄를 짓는 거”라며 절벽에서 뛰어내리려는 여성에게 손을 내밀며 길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고 싶다는데 부모님이 무슨 상관이야? 종종아, 일전에 강화도 때 다 뛰어내리는데 우리는 살았어. 난 살아서 좋았어.” 삶을 향한 길채의 주체적 열망은 전쟁 뒤 납치돼 포로로 끌려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전쟁 이후 청나라는 조선으로 도주한 노예들을 송환하라 독촉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조는 송환을 승인한다. 그 과정에서 피란길 갔다가 돌아온 길채 같은 부녀자들도 납치돼 끌려간다. 그들은 청나라 관리들의 노예가 되어 성적 착취를 당하거나 노예시장에 팔렸다. 가족이 거액의 속환비를 마련해 찾으러 오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들이나 부모를 찾으러 오는 이는 있어도, 부녀자를 찾으러 오는 남편은 없었다. 정절을 잃은 여성은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길채가 납치돼 심양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구원무(지승현)는 길채를 속환하기 위해 심양에 갔지만 “포로시장까지 간 것이라면 볼 장 다 본 몸”이라는 사람들의 말에 사로잡혀 갈팡질팡하다가 발길을 돌린다.
살아서 고향에 돌아온 ‘죄’
사회도 작정하고 이들을 버렸다.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은 죄인이 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을 이르던 ‘환향녀’(還鄕女)는 문자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일 뿐이었지만, 조선 사회는 그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오랑캐에게 잡혀갔다는 이유만으로 정절을 잃은 부인과는 제사를 같이 지낼 수 없다며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가 많아져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인조는 사대부 남성이 속환된 부인과 이혼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반발이 끊이지 않자 효종이 즉위하던 해에 이혼이 허용됐다. 전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국가였는데 그 피해는 오롯이 백성, 특히 여성에게 가혹하게 전가됐다. 가부장 사회는 그렇게 자신들의 무능과 비겁함의 책임을 개인의 불행과 잘못으로 돌렸다.
속환돼 고향에 돌아온 길채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임신한 두 번째 부인과 살고 있던 원무가 길채에게 한 첫 질문은 이랬다. “그곳에서 부인에겐 아무 일도 없었겠지?” 정절을 지켰는지 묻는 것이었다. 주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지도 않고 뻔뻔하게 살아 돌아온 길채를 비난한다.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이 평생 지옥에서 살게 된 현실을 슬퍼하다가 잠든 길채의 목을 조른다. 충격에 빠진 길채는 자신을 배신한 원무에게 이혼을 선언하며 이렇게 말한다.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건 제 잘못은 아닙니다. 그 일로 이혼을 요구하셨다면 전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사회적 편견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존엄을 지킨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길채는 사회적 낙인에 절망해 우물에 빠져 죽으려던 여성과 전쟁고아들을 한데 모아 함께 살기를 선택함으로써 타인을 지킨다.
포로 속환과 환향녀 문제는 당시 사회를 시끌벅적하게 한 논쟁거리였지만, 이혼과 후손 문제 등 가부장적 관점으로만 다뤄졌고 여성 당사자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소거됐다. ‘있지만 없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에게 환향녀란 그 단어를 변형한 ‘심한 욕’으로 남았거나 <전설의 고향>을 비롯한 몇몇 단막극에서 ‘원귀’로 기억될 뿐이다.
전쟁은 삶을 파괴하지만 사랑은 서로를 구원한다
<연인>은 그렇게 지워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길채를 통해 2023년의 우리에게 전한다. 드라마 속 길채는 당당하게 살아서 말한다. 포로가 됐다가 속환된 이들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나 죽어 마땅한 존재가 아니라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요란하고 화려하게 길채답게” 살았던 여성, 길채를 통해 여성의 시선으로 전쟁을 재인식하게 됐다. 또한 비극적 상황에 내동댕이쳐졌음에도 살아내려 노력했던 평범한 인간, 길채를 통해 ‘살아내는 것’의 가치도 배울 수 있었다. <연인>은 그간 대중문화에서 소외됐던 전쟁포로와 환향녀 이야기를 전면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연인>은 전쟁에 관한 드라마지만 결국 무언가를 지켜내는 이야기다. 국가는 백성을 지키는 데 실패했으나, 장현과 길채는 온갖 역경에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랑의 힘으로 서로를 지켜낸다. 원무는 길채에게 정절을 지켰는지 묻지만 장현은 사랑의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를 어찌 생각하는지 묻는 길채를 안으며 장현은 이렇게 말한다.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많이 아팠지. 많이 힘들었지. 다 끝났소.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난 이제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당신이 날 밀어내도 난 여기, 당신이 내게 싫증을 내도 난 여기 있겠소.”
장현의 이 말은 길채를 위한 것이었지만, 당시 죽기를 강요받던 다른 여성들을 향한 위로이기도 했다. <연인>에서의 사랑이란 연인 간의 애틋한 사랑을 넘어 전쟁이라는 역경에 굴하지 않고 삶을 지켰던 평범한 인간들을 향한 사랑이기도 하다. 전쟁은 삶을 파괴했지만, 사랑은 서로를 구원한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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