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호이어 아르노 CEO “나는 아방가르드한 경영자… 아이디어, 나보다 팀에서 나오게 해야”
해외 유명 브랜드 CEO를 많이 만나봤지만, 163년 역사의 스위스 고급 시계 브랜드 태그호이어의 CEO를 만난다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프레데릭 아르노(Arnault·28). 명품 업계에선 마치 이름 자체가 전세계 ‘통행증’처럼 보이는 바로 ‘그 아르노’다. 그의 아버지는 세계적인 고가 브랜드 75개를 거느린 ‘명품제국’ 루이비통모엣헤네시(LVMH) 베르나르 아르노(74) 회장이다.
지난 2017년 태그호이어에 입사해 2020년 CEO자리에 오른 프레데릭 아르노가 국내 일간지와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언제나 ‘정확성’을 다루는 시계 브랜드 CEO답게 인터뷰 시간에 정확히 맞춰 왔다.
서울 청담동 플래그십 스토어 옆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는 질문지를 훑으며 답변 내용을 미리 체크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가 교복처럼 착용하는 진남색 슈트에 흰색 디올 셔츠의 깔끔한 차림. 손목에는 그가 요즘 편하게 차고 다닌다는 아쿠아레이서 프로페셔널 200 솔라그래프 티타늄 제품이 눈에 띄었다. 400만원대로 가문의 자산 약 241조원(1847억 달러)에 비하면 겸손(?)한 선택이다.
시계 브랜드 CEO로서의 모습만 드러내고 싶다며 가족 등 ‘개인사에 관한 질문은 절대 금지’라는 요청 같은 제지에 사전 질문지를 세 번 수정했지만, 막상 1대1로 만나니, 아버지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꺼냈다. 차분하고, 신중하며, 조심스럽고 절제된 매너의 소유자라는 기존 매체들의 묘사와는 다를 바 없는 태도였지만,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는 그의 말투에 흥을 불어넣었다. 절대 20분을 넘기지 말라는 시간이 어느덧 그의 두 배인 40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뒤에 스케줄만 없었다면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매달 적어도 한 번씩 가족들이 프랑스 파리 자택에 모여 90분간 점심을 함께하는데, 이렇게 시간을 정해놓지 않으면 아버지를 비롯해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느라 하루 종일도 모자랄 것이란 이야기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방가르드한 경영자”
프레데릭 아르노 CEO는 “열정을 강렬하게 느끼고 헌신해야겠다고 생각한 이 브랜드에 저 자신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태그호이어(TAG Heuer)의 TAG가 프랑스어 ‘Techniques d’Avant Garde’(전위적인 기술)에서 따온 것처럼 “아방가르드한 경영인이 되겠다”고 덧붙였다.
11살 때 아버지에게 태그호이어 아쿠아레이서 제품을 선물받은 이후 관심을 갖게 됐고, 관심은 곧 애정과 열정으로 분화했다. “제 첫 번째 시계였기 때문에 브랜드와 특별한 개인적 인연이 있지요. 제품, 업계, 혁신, 스위스, 아방가르드라는 브랜드의 가치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스포츠도 굉장히 좋아하는데, 최초의 크로노그래프(시간을 정확히 기록하는 장치)를 내놓는 등 성능도 스포츠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브랜드에서 제가 맡은 첫 번째 역할은 기술 부서(커넥티드 워치) 책임자였습니다. 스마트워치 라인 팀을 맡았고, 처음부터 새로운 팀과 새로운 노하우를 구축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기업가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지금도 성공적인 결과를 내고 있습니다.”
가문 소유 회사의 대표 자리에 오너 2세가 발탁되는 것은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그런데 시계 업계에선 조금 반응이 다르다. 각종 복잡시계(컴플리케이션 시계)를 제조하기 위해선 천체·우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술·과학에 정통해야 하고 예술적인 심미안도 갖춰야 한다. 최근엔 스마트 워치 등 각종 최근 테크 분야 신기술에도 익숙해야 한다. 마니아 층이 어느 분야보다 두텁고, 고객들의 지식도 대단하다. 싱가폴 레볼루션 매거진은 “대형 그룹 소유 브랜드들이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경영자 대신 마진과 매출 올리는 데 능한 경영전문대학 출신 CEO로 상당수 대체해 버린 상황에 등장한, 드문 열정의 소유자”라면서 “그동안 (매출에 집중하느라) 영혼 없는 전략적 창작물(soulless strategic creations)을 쏟아내던 시계 업계에서 프레데릭 아르노는 시계 제조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쏟은 제품을 선보였다”고 평했다.
―태그호이어의 대표작인 까레라, 포뮬러1, 모나코 등 리뉴얼을 통해 전통을 부활시키며 명성을 다시 얻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다.
“다른 패션기업과는 다르게 워치 업계의 CEO는 팀을 이끌기 위해 스스로 시계 기술을 발전시키고 제품의 완성 과정과 창의성 등 부품 하나까지 완벽히 파악해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950~1970년대 까레라 제품을 보면 올해 출시한 60주년 에디션과 디자인이 크게 다르지 않다. 최신 퀄리티와 첨단 테크닉을 적용하면서 전통(헤리티지)을 잇는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
“우리의 임무는 브랜드 선호도와 가치를 높이는 것이었다. 선호도가 상승하기 위해선 당연히 제품이 좋아야 한다. 좋은 브랜드는 제품, 품질, 인지된 가치, 유통, 커뮤니케이션 모두 높은 수준에서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제품이 있어도 적절한 부티크가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매장을 화려하게 갖춘들 고객과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고객은 제품이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다. 즉 제품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멋지기도 해야 하지만, 제품과 자신이 연결돼 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게 중요하다.”
―전 세계 부자순위 5명 중 LVMH그룹을 제외하고 모두 IT를 기반으로 한 신흥 테크기업이다.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포지셔닝과 제품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를 사용하는 고객이다. 우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을 운영한다. 내 역할도 멀리 보는 비전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LVMH 그룹의 강점 중 하나다. 우리는 브랜드를 구매(M&A)한다. 우리는 장기적으로 브랜드를 구매하고 장기적으로 투자한다. 또 항상 ‘우리가 지속 가능한 것을 만들고 있는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콘을 만들고, 앞으로 몇 년 동안 사용할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홍보대사도 마찬가지다. 1~2년만 하다가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 직원도 마찬가지다. 장기적으로 참여하고 싶게 만들어야 앞으로 우리를 성공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디어는 내가 아니라 팀에서 나오는 것”
미국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2017년 프레데릭이 태그호이어에 입사할 당시 CEO였던 스테판 비앙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들이 회사를 이끌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다시 보고해 주세요, 아들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그때도 보고해주세요.” 현재 LVMH 시계 및 주얼리 부문을 이끌며 프레데릭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는 비앙키는 “프레데릭은 경청할 줄 안다”면서 “머리가 좋아도 리더가 못될 수 있는데 프레데릭은 (두뇌와 리더십) 둘 다 지녔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어릴 때부터 식사자리에서 사업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출장과 비즈니스 미팅에도 아버지와 동행했다. 아버지는 저를 강요하지 않으시면서 자연스럽게 제가 사업을 하고 싶어하고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계셨다. 사업가를 꿈꿨고, 태그호이어 입사 전에 창업도 했다.”
―직원들을 이끄는 리더십 스타일을 스스로 표현한다면?
“리더십이라는 단어까지 쓰기엔 아직 내가 어린 것 같다. 그래도 브랜드를 6년간 다니며 쌓인 경력을 바탕으로 이야기하자면, 열정, 헌신, 전념(passion, commitment, dedication)이다. 또 권한 부여(empowerment)도 빼놓을 수 없다. 기업에선 올바른 문화를 조성하는 게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문화란, 올바른 인재들이 권한을 부여받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충분히 이야기하며 프로젝트에 기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고 느끼도록 해야 한다. 모두가 기업가적 정신을 지니는 것이다. 우린 상당히 평평한 조직이다.”
―적절한 때와 장소에 적절한 사람을 배치하는 건 누구나 알지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시계 업계를 바꾼 3대 여성 중 하나로 꼽히는 캐롤 포스티에를 영입하는 등 쟁쟁한 이들을 채용했다.
“캐롤은 내가 CEO가 되면서 정말 최고의 채용이라 할 만큼 중요했다. 그전에 지인들에게 딱 한명 영입한다면 누구를 하겠느냐 물었을 때 늘 언급된 인물이었다. 다른 디렉터들도 마찬가지다. 가장 열정적이고, 크리에이티브하고, 브랜드과 잘 맞는 인물들이며, 브랜드의 비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그들은 개개인이 강한 성향과 의견 그리고 시각을 갖고 있어, 자유롭게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발언권을 보장하고 자율성을 존중한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태그호이어 CEO를 맡으면서 당신이 택한 최선의 결정은 무엇인가.
“매일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답변하기 어렵다. 하루에도 몇가지 결정을 해야 한다.”
―오늘은 어떤 결정을 내렸나.
“매장 리노베이션에 대해 오늘 결정했다. 플래그십 스토어도 한국에 선보인 지 10년 됐는데, 진정한 글로벌 플래그십으로 거듭나기 위해 대대적으로 바꿀 계획이다. 백화점 매장 역시 마찬가지다. 더 좋은 위치를 위해 협상할 예정이다. 한국의 글로벌 앰버서더를 어떻게 정하고 언제 만날지도 결정했다.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결정이 서로 잘 어우러지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좌우명(mantra)이 있는가
“나를 일으켜 세울 칭찬의 주문(mantra)가 꼭 있는 건 아니지만, 굳이 한 단어로 꼽자면 야망(ambition)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매우 높은 수준의 야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팀을 이끌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매일 우리가 하는 일과 말, 팀원들과의 관계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런 면에서 매우 훈련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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