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함이 만든 ‘지금의 에르메스’… “빠른 성장 아닌 최선의 성장 추구”

최보윤 기자 2023. 11. 17. 10:1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에르메스 Hermès 플로리안 크랭 부회장 단독 인터뷰

‘에르메스는 에르메스다.’ 프랑스 고급패션 브랜드 에르메스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더 나은 문장은 찾기 어려울 것 같다. 품질이 뛰어나고, 유행과 상관없이 시대를 타지 않는 디자인에, 욕망을 자극하고, 쉽게 구하기 어렵고…. 그 어떤 수식어를 늘어놓는들 에르메스가 가진 이미지를 온전히 담아내진 못할 것 같다. ‘최고’ ‘최상’ 정도와 맞바꿀 수 있달까. 어떤 제품이 주목받을 때마다 ‘oo계의 에르메스’ ‘XX계의 에르메스’ 같은 수사가 붙으니, 사람들의 머릿속에 ‘에르메스=최상위’로 각인된 것만은 틀림없다.

플로리안 크랭 부회장. /에르메스 제공

에르메스가 ‘지금의 에르메스’가 된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플로리안 크랭(Florian Craen) 에르메스 인터내셔널의 영업 및 유통 부회장은 최근 만난 자리에서 ‘정직함(intégrité·앵테그리테)’을 제1순위로 꼽았다. “에르메스는 속임수를 쓰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저희 제품이 가장 아름답고 최고 품질의 가방, 실크, 캐시미어 제품 등을 만든다고 이야기하는 만큼, 내부적으로도 디자인, 생산, 유통, 수선 등 모든 부문에서 매일같이 이를 달성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정직함은 모든 직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진정한 자랑스러움의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그는 에르메스의 악셀 뒤마 회장이 평소 강조하는 문구를 인용해 에르메스의 정신과 철학을 한 문장으로 다시 풀어 이야기했다. “뒤마 회장님은 자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일즈 실적은 나쁠 수도 있지만, 나쁜 제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on peut faire des mauvaises ventes, mais on ne peut pas faire de mauvais produits).”

가죽 결을 정리하는 모습. /에르메스·크리스 페인(Chris Payne)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새들스티치. /에르메스·크리스 페인(Chris Payne)

그간 수많은 명품 업체를 취재하면서 ‘탁월한 품질을 구현하기 위해 (눈앞의 이익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반복적으로 듣곤 했지만, ‘정직함(intégrité)’이란 단어로 탁 짚어준 적은 거의 없었다. ‘앵테그리테’는 영미권에서 쓰이는 인테그리티(integrity)의 불어 표현으로 ‘말과 행동이 같다’ ‘앞과 뒤, 겉과 속이 같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일관된 진실성’으로 풀어 해석하기도 한다. 단계별로 누구 하나 작업에 소홀하거나 부족함 없이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 냈을 때, 그 모든 ‘앵테그리테(정직함)가 쌓여 차별화된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완전무결함을 지향하는 데엔 ‘거짓’ 뿐만 아니라 ‘적당히’도 허용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지난 10월 24일과 25일 서울에서 열린 ‘플리스 체크 인(Please Check In)’ 행사. 에르메스 상징적인 백의 영감과 스토리를 담은 여덟 개의 방들이 펼쳐졌다. 사진은 배의 닻 체인 링크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룰리(Roulis) 백을 표현한 바다 위의 보트가 돋보인다. /신경섭 사진작가
타들락 카프스킨 소재의 베루 백. /에르메스·잭 데이비슨(Jack Davidson)
버틀러 카프스킨 소재의 룰리 백. /에르메스·잭 데이비슨(Jack Davidson)

◇”’정직함(intégrité)’이 오늘의 에르메스를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곰곰이 생각해보자. 언제부터 에르메스가 ‘지금의 에르메스’ 같은 지위를 누렸을까. 1837년 탄생해 올해로 186년 역사의 브랜드로, 프랑스 왕실과 귀족에 안장과 마구(馬具) 등을 납품하며 명성을 인정받은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에르메스 하면 떠오르는 버킨백이 탄생한 건 1984년. 이제 40년이 지났을 뿐이다.

에르메스 인기의 ‘쌍두마차’로 꼽히는 켈리백은 어떤가. 대중에 화려하게 데뷔한 건 1956년이다. 1954년 할리우드 배우 그레이스 켈리 주연 영화의 소품으로 쓰였다가, 1956년 모나코의 왕비가 된 켈리가 들고 다니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희귀 제품은 세계적인 경매사인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 오르기도 한다. 그래도 70년이 채 안 된다. 두 세대 정도 만에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길지 않은 시간에, 소비자뿐만 아니라 업계도 선망하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고객이 보내준 신뢰가 가장 중요한 터전이 됐다. 또 제품 카테고리(métier·메티에)와 시장의 다각화가 지난 몇 년간 에르메스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현재 에르메스는 가죽, 남성복, 여성복, 가구, 테이블웨어(식기류) 등 16개 메티에가 있다. 어느 특정 시장에서 하나의 메티에만 가지고 승부를 본 것이 아니라, 모든 메티에를 통해 전 세계 모든 시장에서 반향을 일으켰기에 지금의 성공이 가능했다. 우리 기대치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바로 에르메스가 단 한 종류의 가방만으로 유명한 메종이 아닌, 카테고리를 막론한 모든 제품의 탁월한 품질로 명성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테이블웨어가 있다. 50년 전에 출시됐지만 15년 전부터, 말 그대로 폭발적 성장을 이룬 카테고리다.”

1997년 에르메스에 합류한 뒤 유통·영업 전문으로 빠른 승진을 거듭한 크랭 부회장이 국내 언론에 나선 건 코로나 이후 이번이 처음. 지난 10월 24일과 25일 서울에서 열린 ‘플리스 체크 인(Please Check In)’ 행사를 기념해 한국을 찾았다. 에르메스의 상징적인 가방의 영감과 스토리를 담은 여덟 개의 방을 통해 탄생의 근원을 알리고 체험하는 행사다.

사막에서의 열정적인 자동차 레이스가 펼쳐지는 볼리드, 깃털처럼 가벼운 플룸을 표현한 달나라, 파리-런던행 비행기에서 장-루이 뒤마와 여배우 제인 버킨이 우연히 만나 탄생한 버킨의 스토리를 담은 항공기, 회전목마 위에서 댄서들의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델라 카발레리아, 놀라운 밴드 공연이 펼쳐지는 막시모르, 배의 닻 체인 링크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룰리를 표현한 바다 위의 보트, 1920년대 스트리트 댄스 린디 홉에서 영감을 받은 린디, 1930년대의 작은 영화관 콘셉트의 켈리, 그리고 1970년대의 파리 클럽을 연상시키는 콘스탄스 등으로 구성됐다.

1920년대 자동차의 등장과 더불어 가방에 지퍼를 단 ‘혁신’을 선보이며 핸드백 시대를 연 게 바로 에르메스. 영화라는 매개체와 배우를 통해 유명해지긴 했지만 버킨 백의 근간은 20세기 초 에르메스가 말 안장을 넣고 다니기 위해 만든 가방인 ‘르 오트 아 크루아(le Haut à Courroies·위에 끈이 달린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플룸 가방은 1960년대 탄생해 6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다.

―1990년대부터 명품 업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에르메스의 성공은 남다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큰 회사라고 여기지 않는다. 에르메스는 여러 개의 작은 회사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그룹으로, 총 16개의 메티에와 25개의 지사로 구성돼 있고, 각 메티에와 지사는 매우 자율적인 방식으로 운영된다. 강력한 기업정신과 함께 혁신을 거듭하며 자율적 주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많은 분의 예상과는 달리 에르메스는 본사 중심적인 대형 브랜드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가죽의 흠결 같은 것이 없는지 보고 디자인하는 리딩(reading)작업. /에르메스·크리스 페인(Chris Payne)

◇”최대한 빠른 성장이 아닌 최선의 성장을 추구한다”

―'플리스 체크 인’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 엑스레이 검사대를 지나는 형식에서 시작한다. 무언가 숨기고 있어도 엑스레이를 통해선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안과 밖이 같은’ 앵테그리테를 추구하는 에르메스만의 유희, 재치가 느껴졌다. 에르메스의 투명성을 보여준 듯 했다. 에르메스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앵테그리테에 버금가는 가치는 지속성(long lasting)이다. 나에게 부여된 미션도 2023년 최고의 매출 달성이 아닌, 20년 후에도 에르메스가 매력적이고 인정받으며, 신뢰를 받는 브랜드로 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디. 우리는 최대한 빠른 성장이 아닌 최선의 성장을 추구한다. 때문에 종종 생산량 증대나 매장 추가 개점과 같은 제안을 거부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내 업무 중에서 매장 여는 것을 거절하는 일도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것은 에르메스의 명성과 정직함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기준 에르메스의 시가총액은 2100억 유로(약 298조원)를 돌파했다. 대기자가 많아서 실질적인 매출은 주가에 다 반영된 것도 아니라고들 한다.

“최근에도 공방(팩토리)을 열었고, 장인도 늘리고 있다. 거절 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빠른 성장을 위한 타협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 포지션으로 발생하는 부차적인 손실을 고객과 직원이 감내해야 하는 건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역할은 고객과 단단한 관계를 구축해, 왜 거절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고객이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판매 방식은 매우 복잡해, 다른 회사들에는 절대로 권장하지 않는다. 거의 200년 가까운 시간에 걸쳐 구축하게 된 방식이기 때문이다.”

―AI, 디지털 혁명 시대를 맞아 제품을 만들고 디자인하는 방식도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온라인 판매 등을 통해 에르메스를 보다 많은 대중에 알렸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 발전이 장인이나 판매 직원 등을 보조할 순 있어도 대체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3년 전만 하더라도 메타버스로 오프라인 매장이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고, 5년 전에는 3D 프린팅으로 제조업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나는 역설적으로 영업과 매장의 힘을 굳게 믿는다.

신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매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기술의 발전 ‘때문에’ 매장을 더 많이 찾게 될 것이라 본다. 물론, 현재에 비해 매장 수는 보다 적어지겠지만, 그만큼 더 소중한 삶의 순간을 나누는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계가 아닌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옷을 입어보고, 제품 수선을 맡기고, 조언을 듣는 그 모든 순간이 점점 더 소중해진다. AI나 다른 기술이 우리가 더 나은 방식으로 일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찰해 최선의 효과만 취할 것이다”

―에르메스의 문화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메종’. 프랑스어로 메종(maison)은 집, 즉 우리가 사는 곳을 의미한다. 메종이라는 단어가 요즘에는 업계에서 상당히 많이 사용되고 있기도 한다. 에르메스의 구성원들은 가족과 같이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주주나 CEO의 프로젝트가 아닌,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공동의 프로젝트다. 우리는 회사 발전의 혜택이 모두에게 주어지고, 여기에 모두가 기여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구성원들의 웰빙에도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 서로를 배려하는 공동의 성격을 지닌 에르메스를 가장 잘 요약하는 단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