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빈 만찬에도 오른 씨간장’, 명인이 만드는 장맛의 비법을 찾아서…[주식(酒食)탐구생활㉟]
멀찍이 펼쳐진 월봉산 자락. 소나무 숲 한가운데에 1000개가 넘는 항아리가 반질반질한 빛을 내며 방문객을 맞는다.
전남 담양 창평면 ‘기순도 전통장’의 장고지다. 370년간 대물림해 온 씨간장을 비롯해 된장, 고추장 등 전통 종가의 발효장이 숨 쉬고 있는 곳. 기순도 명인이 직접 메주를 만들고 장을 담는 과정을 전수하는 ‘발효 학교’가 열리는 곳이다. 기 명인은 장흥 고씨 양진재 종가 10대 종부이자 2008년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 35호로 지정됐다.
그가 이번에 개설한 ‘발효 학교’는 10월 중순 시작해 12월 초까지 두 달간 집중적인 수업이 이어진다. 그동안 기 명인은 다양한 무대에서 대중들에게 전통장을 알려왔다. 그런데 이번처럼 집중 교육을 통해 발효 마스터 양성에 나서는 것은 처음이다. 이 때문에 셰프, 요리 연구가 등 전국에서 10여 명의 식품업계 종사자들이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발효학교 수업 현장을 찾았다. 이날 배우는 것은 장을 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메주 만들기였다. 마당 한 쪽에 벽돌로 쌓아 만든 간이 장작 화로 위에는 큼직한 가마솥에 물이 끓고 있었다. 기 명인은 우선 누런 백태를 여러 차례 씻었다. 손으로 치대고 큼직한 조리로 이물질을 골라냈다. 헹구면서 물 위로 떠오르는 ‘부실’한 콩들도 골라냈다.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헹궈내면 됩니다. 이 물은 지하에서 올라오는 건데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도 온기가 있어 손이 시리지 않아요.”
씻은 콩 20㎏은 따로 불려두고 전날부터 미리 불린 콩을 끓는 물에 넣었다. 9시간가량 물기를 머금은 콩은 원래의 크기보다 서너 배는 부풀어 있었다. 4시간가량 삶아 뜸을 들여놓은 콩을 절구에 찧어 메주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일일이 손으로 이뤄진다. 돌절구에 삶은 콩을 넣고 찧기 시작하자 고소하고 들큰한 콩 냄새가 마당에 퍼졌다. 미끄럽기도 하고 끈기가 있어 절구질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한동안 찧다 보면 어느새 으깨진 콩이 덩어리를 이룬다. 다 찧어진 콩은 나무로 만든 메주 틀에 옮겨 직육면체 모양으로 성형한다. 틀에서 빼낸 메주는 여전히 따뜻하다. 묵직하게 만들어진 메주를 지푸라기로 묶어 말리면 완성이다. 완성된 메주는 장고지 한 쪽에 있는 한옥 황토방에서 발효 과정을 거친다. 발효된 메주는 수강생들에게 마련된 저마다의 항아리에서 장으로 숙성될 예정이다.
기 명인의 장 제품은 프랑스 봉마르셰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도 입점해 있다. 제품의 바탕이 되는 메주 만들기는 보통 동짓달에 이뤄진다. 가을에 나는 햇콩으로 동짓달에 길일을 받아 메주를 만들어 발효시킨 뒤 정월에 항아리에 메주와 죽염수를 담아 숙성시킨다. 그렇게 6개월 이상 숙성을 거치면 햇간장이 만들어진다. 한번 만든 메주가 그 해의 장맛을 좌우하는 셈이다.
간장은 숙성 기간에 따라 색깔과 풍미가 달라진다. 숙성기간이 1년 미만인 청장은 색이 연하고 맛이 담백해 맑은 국이나 나물을 무치기 좋다. 5년 미만 숙성시킨 중간장은 색이 진하고 짭조름한 맛이 강해 감칠맛 나는 반찬을 하기 적합하다. 5년 이상 숙성시킨 간장은 진장이다. 색이 검고 향이 깊은 데다 감칠맛과 단맛도 가장 높다. 묵을수록 간장의 맛이 깊어지고 좋아진다는 이야기다. 기 명인이 370년간 대물림 하는 문중의 씨간장은 2017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당시 청와대 국빈 만찬에 오르면서 더욱 명성을 얻었다. 장고지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씨간장은 덜어 쓴 만큼 가장 좋은 진장을 더하는 ‘덧장’으로 맛을 이어가고 있다.
1000개가 넘는 항아리가 품고 있는 장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들도 함께 품고 있다. 매일 항아리를 닦고 돌아보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기 명인은 “오늘 아침에도 항아리를 닦으며 ‘귀한 손님들 오시니 반갑게 잘 맞이하자’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마당 맨 아래쪽에 놓인 항아리들은 이번 발효학교 수업에 참여하는 수강생들의 이름표가 붙은 항아리들이다.
점심시간은 장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이날은 기 명인이 준비한 10여 가지 정갈한 반찬과 불고기가 상에 올랐다. 불고기 양념 재료는 진장과 조청, 배즙, 참기름뿐이다. 부재료로 들어가는 당근과 버섯, 고추와 파를 차례로 넣어가며 볶았다. 단출한 양념인데도 깊은 감칠맛이 났다.
한 수강생은 “평소 불고기 양념을 할 때 자주 사용하던 재료를 상당히 생략했는데도 이런 맛이 난다”면서 “간장의 깊고 풍부한 맛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젓갈 대신 간장을 넣은 김치는 싱그러운 맛이 감돌았다. 풋고추를 빻아 만든 물김치, 청국장, 보리굴비, 방아전, 우엉조림, 김부각, 더덕무침 등 한 상 가득 차려진 반찬들은 금세 동이 났다. 온갖 소스와 자극적인 조미료가 낼 수 없는, 장맛의 진수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식탁이었다.
모던 한식 레스토랑 소설한남 엄태철 셰프는 “그동안 요리를 하면서 무엇을 더해볼까, 어떻게 변형시켜볼까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데 집중했었다”면서 “하지만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부분은 장의 맛이라는 고민 끝에 발효학교를 찾게 됐다”고 말했다.
담양 |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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