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말과 행동엔 ‘결정적 시간’ 있다[김헌·김월회의 고전 매트릭스]

2023. 11. 17.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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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못된 말들의 횡행
이소크라테스 ‘소피스트 반박’
쓸 만한 말 없이 사사로운 이익만 챙기려는 흑심의 말들 난무
무모한 허풍과 모순적인 행동들 과도한 약속 안돼
게티이미지뱅크

기원전 393년 이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도성 동남쪽의 아폴론 성지인 리케이온에 학교를 세웠다. ‘철학’을 교육의 핵심으로 내걸었지만, ‘말의 교육’을 위한 수사학 학교였다. 그는 말이란 ‘영혼의 모상’이며, 따라서 말을 교육한다는 것은 영혼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이란 원래 ‘지혜(sophia)를 사랑하기(philo)’를 뜻하는 ‘필로소피아’였는데, 그에게 참된 ‘소피아’란 우리의 삶의 여러 문제에 관한 시의적절한 의견을 말로 표현하여 소통하고 설득하는 능력이었다. 이때 시의적절함에 해당하는 말이 ‘카이로스’다.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둘로 나누었다. 시곗바늘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했고, 어떤 특정한 행동과 말에 적합한 결정적인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했다. 둘 다 신격화되었다.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으로서 신들의 왕 제우스의 아버지였고, 카이로스는 제우스의 막내아들이었다. 제우스는 영원한 권력을 쥐고 난 이후, ‘모든 것들의 원인인 제우스’라는 별명을 얻었던 터라, 시간과 관련된 신화적 부자 관계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크로노스 속에서 특정한 이유와 원인이 개입되면, 결정적인 순간 카이로스가 반짝이며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일에서 성공하려면 카이로스를 잡아야 한다.

카이로스는 젊고 잘생긴 청년의 모습인데, 특이하게도 만주인의 변발처럼 한 줄기 머리채가 길게 늘어져 있다. 그런데 뒤통수가 아니라 머리 앞쪽에 달려 있고, 눈썹 아래로 흘러내렸다. 카이로스가 내 앞에 다가와 마주하고 있을 때는 그 머리채를 잡기 쉽지만, 그가 등을 돌리고 달아나면 도무지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날개 달린 샌들을 신고 바람처럼 날고 뛰어가니 그 머리채를 잡을 재간이 없다. 결정적인 순간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니, 나를 찾아왔을 때 얼른 잡지 못하면 영영 잡을 수 없다는 신화적 상징이다.

이소크라테스는 말에도 행동에도 카이로스가 있고, 그것에 맞춰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테네 정치판은 그렇지 못했다. 인류 최초로 민주정을 실시한 아테네는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민회에 나가 입법과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고, 법정 다툼에 엮이면 검사나 변호사처럼 본인이 직접 연설해야 했다. 공적인 연설을 한다는 것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몫이었다. 이때 소피스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은 수사학을 가르쳐 주겠다며 사람들을 끌어모아 교육계를 주도했고,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상황을 개탄하며 이소크라테스가 나섰던 것이다. 학교를 세우고 ‘소피스트 반박’이라는 글을 출사표로 던졌다. “지금 교육자들이 진실을 말하고 자신들의 능력을 벗어난 약속을 하지 않는다면 시민들로부터 비난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별없이 무모하게 허풍을 떠는 사람들이 설쳐댑니다.” 그들은 “진실을 추구하는 체하지만, 입을 열자마자 곧 거짓말을 해댑니다.”, “말은 잘하는 데에는 잔뜩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행동의 모순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바로 이들이 소피스트와 그 무리였다.

이들은 정치판에 나서서 우월성을 과시하듯,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며 여론을 주도했다. 말의 홍수 속에서 시민들은 극한의 피로감을 느꼈을 법하다. 말은 많지만 쓸 만한 말은 별로 없고, 아테네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말 대신, 사사로운 이익만을 챙기려는 흑심의 말들만 난무한 상황. 카이로스에 맞는 ‘시언(時言)’이 부재한 절실한 상황을 이소크라테스가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외침은 그때 거기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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