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미식 신화’… 셰프 아닌 작가가 만들었다[북리뷰]

2023. 11. 1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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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음식문화사
마리안 테벤 지음│전경훈 옮김│니케북스
전세계 미식원조·정수로 꼽혀
2010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마담 보바리’ 속 결혼식 파티 등
문학·영화에 음식 이야기 담아
佛요리 ‘고상한 초상화’ 그려내
요리의 핵심은 ‘사부아르페르’
프랑스 땅이 기른 훌륭한 먹거리
고도 기량으로 조리하는데 집중
달팽이 요리 ‘에스카르고 아 라 부르기뇽’(위 큰 사진)은 프랑스 요리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다. 마늘과 허브로 요리한 개구리 다리(아래 왼쪽)는 17세기 이후 명물이 됐으며 크로캉부슈(오른쪽)는 프랑스 결혼식에서 흔히 보는 전통적인 디저트다. 니케북스 제공

목숨을 이어가려고 먹는 일과 맛을 따져가며 먹는 일은 다르다. 음식의 맛과 영양을 끌어올리고 냄새와 소리와 식감을 따지며 색감과 배치를 생각할 때, 비로소 미식은 태어난다. 미식은 다채롭고 풍부한 요리법을 낳고, 음식을 먹고 즐기는 다양한 방식을 낳으며 음식을 둘러싼 더 많은 이야기와 신화를 낳는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울려 격식을 갖추면, 예술적 요리 문화인 가스트로노미(gastronomie)가 탄생한다.

프랑스는 자국의 미식 문화를 인류사적 신화로 만들어 왔다. 프랑스 음식은 미식의 원조이자 정수로서 알려져 있고, 세계 어디서나 맛과 품위를 함께 갖춘 고급 음식으로 받아들여진다. 2010년 유네스코가 프랑스 미식 문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프랑스인들은 음식을 더 맛있고 세련되게 즐기기 위해 애써 왔다.

‘프랑스의 음식문화사’에서 마리안 테벤 미국 사이먼스 록 바드 칼리지 교수는 돼지고기를 날것으로 먹던 야만적 프랑크족이 어떻게 오트 퀴진(고급 요리)의 나라로 올라섰는지를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 음식이 가스트로노미의 상징으로 추앙받는 건 단지 맛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 때문이다. 프랑스 요리란 신화는 요리사의 손끝만이 아니라 작가의 펜 끝에서 탄생한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요리책이나 규정집뿐 아니라 문학, 영화 등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프랑스 음식의 맛과 매력을 알리고 먹는 방식을 퍼뜨리면서 프랑스 요리의 고상한 초상화를 그려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결혼식 파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 나오는 프랑스 만찬 등은 그 선연한 증거다. 이 책은 프랑스 음식 문화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안내한다.

저자에 따르면, 프랑스 음식 역사는 귀족 취향의 가스트로노미, 민중의 요리, 농민의 요리 등이 뒤섞여 발전해 왔다. 고대 로마의 문헌은 갈리아 시대에 이미 프랑스인들이 비옥한 대지에서 만든 다채로운 음식들을 골라 먹었다고 증언한다. 골족과 프랑크족은 돼지고기와 치즈, 따뜻한 빵에 대한 미각을 유산으로 남겼고, 지역 하천에서 잡은 온갖 물고기를 왕성하게 즐겼다. 훗날 프랑스인들은 이를 바탕 삼아 스스로 음식을 잘 차려 먹는 기질을 타고난 미식의 민족으로 생각했다.

중세 프랑스는 빵의 시대였다. 수도원의 생활 습관이 널리 퍼지면서 금욕이 일상화하며 고기 소비가 제한되어 빵이 프랑스 식단 중심에 들어서고, 고도로 발달한 프랑스 특유의 복잡한 빵 문화가 형성됐다. 지역·신분에 따라 먹는 빵은 달랐으나, 빵마다 정확한 명칭과 중량이 엄격하고 세세하게 규정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요리에 미식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난다. 독특한 맛과 취향을 추구하는 요리가 유행하고, 프랑스를 잘 먹는 사람들의 나라로 포장하면서 미식과 문명을 결합한 담론이 출현했다. 엄청난 양의 고기를 호화 향신료, 신선 과일과 채소, 최고급 와인과 함께 즐기는 진수성찬 궁정 요리는 주위의 부러움을 사면서 프랑스 고급 요리의 뿌리가 됐다.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프랑스 요리의 신화가 형성됐다. 요리책이 쏟아져 관련 지식이 프랑스 국민 자산이 되고, 고급 요리가 프랑스어로 뒤덮이게 되었다. 요리사 각자가 다양한 혁신을 추구하는 누벨 퀴진이 등장하고, 고기에 걸쭉한 소스를 끼얹어 접시에 담아내는 문화가 형성됐다. 아울러 브랜드 치즈가 처음 나오고, 샴페인이 발명돼 식탁을 풍요롭게 했다.

혁명 이후, 프랑스 요리에 드디어 가스트로노미가 정착됐다. 프랑스 요리를 예술로 끌어올린 삼총사는 전설적 셰프 카렘, ‘미식 예찬’의 브리야사바랭, ‘미식가 연감’을 쓴 라 레니에르였다. 손맛과 글맛이 연합, 탁월한 식사와 귀족 취향을 굳게 연결해 열망하게 하는 미식 신화를 이룩한 것이다. 자유·평등·박애라는 혁명의 이상과 달리, 궁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셰프들이 파리 곳곳에 레스토랑을 열면서 귀족의 고급 정찬이 시민의 일상을 파고들고, 파리의 최상급 관광 상품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 이후, 프랑스인들은 테루아르(terroir), 즉 프랑스 땅과 거기서 자란 식재료에 집착했다. 프랑스 음식의 우월성, 프랑스 음식의 프랑스다움을 따지는 이런 태도 탓에 식민지 요리와 작물은 프랑스 요리에 거의 통합되지 못했다. 이런 국수적 태도는 프랑스 각지의 와인과 치즈 등을 법으로 보호하는 원산지 명칭 통제, 질 좋은 농산물을 공급하는 소농에 대한 강한 보호 정책, 지역에 뿌리 박은 수수한 가정 요리에 대한 동경 등 현대 프랑스 음식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프랑스 요리의 핵심에 사부아르페르(savoir-faire), 즉 수완이나 기량이 있다고 말한다. 프랑스 음식이란 프랑스 땅이 길러내는 뛰어난 먹거리인 테루아르와 이를 더 맛있게 만들고 제대로 즐기는 가스트로노미의 기술을 연결해 하나의 전통으로 끌어올린 기나긴 신화다. 빵, 치즈, 와인 등 맛있는 이야기를 읽다 보니 문득 배가 고파진다. 580쪽, 3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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