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행위주체성 논의에서 빠진 두 가지 요소

한겨레 2023. 11. 1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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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OECD 학습 나침반 2030(출처: OECD)

[세상읽기] 이병곤│제천간디학교 교장

한해 동안 학생의 ‘행위주체성’(agency) 개념을 자주 들여다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교육 2030’ 자료를 읽다가 이 용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이 자료에 따르면 행위주체성이란 ‘세계에 책임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 사건, 환경이 나아질 수 있도록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 주도성, 높은 동기, 자율성 같은 개념도 있는데 왜 하필 행위주체성이라는 말을 썼을까. ‘교육 2030’에서 내건 교육목적과 관련이 깊다. 학생 개인과 그를 둘러싼 사회의 ‘잘 삶’이 교육하는 목적이란다. 효율성, 경쟁, 산업과 경제의 발전을 앞세우던 이 기구의 성격을 헤아려볼 때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시각이다. 문서 앞부분에 담긴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구절에서 일종의 급박함까지 느껴진다.

스무살 무렵 운전면허를 갓 취득한 뒤였다. 아버지가 내주신 차를 몰고 인쇄물을 배달하러 나섰다. 장대비 내리던 서울 마포구 공덕동오거리를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몰라 정신없이 헤맸다. 초보자에게는 위협적인 교차로였다. 내가 아무리 높은 동기 수준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나는 내 판단으로 위기 상황을 간파하고, 내가 가진 운전 실력과 침착한 태도로 그 교차로를 안전하게 빠져나와야 했다. 나는 내 생명과 아버지의 차, 그리고 다른 운전자들의 안전에 책임이 있다. 이런 절박한 맥락 아래 놓였을 때 나의 행동은 내 마음의 참된 ‘에이전트’, 즉 대행자 같은 역할을 한다. 행위주체성에 입각한 행동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여러 논문과 자료를 읽어보니 행위주체성은 특정한 역량이나 기술과는 다른 특성이었다. 그것은 짧은 기간 훈련을 통해 ‘획득’되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는 것에 가까웠다.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유도할 줄’ 아는 능력은 교사의 설명과 학생의 추론 및 훈련을 통해 비교적 빠르게 갖출 수 있다. 하지만 ‘국제 원자재 가격의 등락 폭이 큰 위기 상황에서 까다로운 외국 구매자의 요구에 맞추느라 팀원끼리 협력하여 새로운 제품 개발을 끝까지 책임지고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행위주체성은 행동하는 사람이 ‘내 삶을 무엇이라 바라보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라야 올곧게 드러난다. 학생은 자기 학업이든 삶이든 그 자신이 ‘잘 살아 보기로’ 마음먹어야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선다. 빗줄기 퍼붓는 공덕동오거리에 갇혔을 때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의지와 침착성을 갖춰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좀 더 그럴듯하게 표현하자면 ‘행위주체성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발현’된다. 그것은 구체적인 기술이라기보다 상황에 맞춰 자기 능력과 헌신을 조절하면서 투입할 줄 아는 기민함에 가깝다.

아일랜드 초등 교육과정에서는 학생을 사회적 행위자로 간주하면서 학교가 가진 권한 일부를 교사와 공유하는 주체로 인정한다. 핀란드와 스코틀랜드에서도 혁신적인 정신 역량과 현상 기반 학습, 교사와 학생 사이 협력을 통한 학생 행위주체성 강화를 교육과정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현상 기반 학습은 학생들에게 현상을 관찰하고, 깊이 생각한 다음 그것에 관해 스스로 질문할 기회를 주는 공부 방식을 이른다. 한국 교육부도 이런 흐름에 맞춰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작성했던 것 같다. ‘포용성과 창의성을 갖춘 주도적인 사람’ 기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니.

그런데 교육 분야에서 제안되는 이상적 지향은 이 질문 앞에서 멈춘다. “그토록 귀하고 좋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행위주체성과 관련한 국내 연구 문헌들을 찬찬히 훑어보니 두가지 허점이 있었다. 하나는 행위주체성을 키우기 위한 교육과정 구성 요소에서 ‘시간을 확보하는 방안’이 빠져 있었다. 두번째는 학생이 행위주체성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한 또래, 교사, 지역공동체, 학부모와의 관계 맺음에 관한 방안이 없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행위주체성은 눈에 또렷이 보이는 지식이나 기술의 획득이 아니기에 숙성을 위한 ‘시간’과 ‘관계’가 필요하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시대를 눈앞에 둔 시점이다. 미래 교육을 논의하면서 학습자의 적극성을 강조하는 숱한 문서들에서는 이 두가지 핵심 요소를 간과한 채 하릴없는 말잔치만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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