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영원한 따거` 주윤발의 클래스

서울문화사 2023. 11. 1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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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 배우 주윤발을 만났다. 말에선 맛이, 행동에선 멋이 느껴졌다. 역시 ‘따거’다.

아시아 최대 규모 영화 축제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올해 특별한 손님을 맞이했다.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배우 주윤발(저우룬파)이 그 주인공이었다. 2009년, 영화 <드래곤볼 에볼루션> 국내 개봉 이후 14년 만에 내한한 주윤발은 등장만으로 환호를 자아냈다. 올해 나이 68살, 50년의 연기 경력을 자랑하는 주윤발은 여유로운 미소로 국내 관객과 인사를 나눴다. 앞서 건강 이상설에 휩싸여 걱정을 샀던 바와 달리 건재함을 입증했다.

올해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한 주윤발은 재치 있는 수상 소감으로 웃음을 선사했다. 수상 소감을 마친 주윤발은 객석을 향해 셀카를 찍으며 기쁨을 나눴다. 주윤발의 행동에 객석 곳곳에선 웃음이 터졌다. 개막식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만난 주윤발은 유쾌함을 잃지 않는 동시에 삶의 깊은 내공을 드러내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그의 입을 거쳐 완성된 문장들은 감칠맛이 있었고, 행동에선 멋이 느껴졌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웃음)

50년 만에 큰 상을 받았습니다. 제게 사랑을 보내주시는 한국 팬들 앞에서 수상한 상이라 의미가 더 큽니다. 부산에서 매일 아침 러닝을 하는데 많은 분이 저를 알아봐주시고 반갑게 맞이해주셔서 기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중국에선 인생에 두 번의 갑자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한 갑자(60년)를 끝내고, 이제 막 두 번째 갑자에 들어섰어요. 앞으로 남은 날들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제게 펼쳐질 시간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신작 영화 <원 모어 찬스>가 11월 국내 개봉을 확정 짓는 겹경사를 맞이했죠.

오랜만에 선보이는 장르의 영화라 긴장이 됩니다. 한국 팬들이 영화를 재미있게 봐주시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네요. 개인적으로 도전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작품입니다. 그동안 다양한 영화로 관객을 만났지만, 늘 새로워요. 배우로서 제 연기에 한계를 정해두고 싶지 않습니다. 어떠한 역할이든 도전하고 싶죠.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이 특별합니다. 도전하고 싶은 마음을 따라가 선택한 작품이거든요.

주윤발은 특히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자랑한다. 1980년대 주윤발은 국내에 트렌치코트 열풍을 일으킨 바 있다. 영화 '영웅본색'에서 그가 선보인 패션이다. 또 음료 ‘밀키스’ CF에 외국 연예인 최초 CF 모델로 출연해 “사랑해요, 밀키스”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홍콩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오랜 시간 사랑받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인기를 얻는 이유, 오래 활동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우 주윤발은 공식 석상에서 대중을 만날 때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벗어나면 저는 지극히 보통 사람이죠. 슈퍼스타라는 표현도 제겐 어색합니다. 제가 다른 누구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반대로 제가 한국에 가진 애정이 남다릅니다. 1980년대 제주도에서 2~3개월간 촬영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한국에서 매일 갈비탕에 밥을 말아서 김치와 먹었습니다. 한국 스태프는 양식을 먹자고 했는데, 저는 갈비탕을 고집했습니다. 남대문시장에서 번데기를 사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한국 음식과 잘 맞아서 그런지 애정이 커지더군요.

우리가 사랑했던 ‘홍콩 누아르’

주윤발은 1980~1990년대 홍콩 영화의 최전성기를 이끈 ‘홍콩 누아르’의 대표 배우다. 그의 이름을 빼놓고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 약 100편에 달하는 작품에 출연했으며, 대표작으로 <영웅본색>(1986), <가을날의 동화>(1987), <첩혈쌍웅>(1989), <와호장룡>(2000) 등이 있다. 액션뿐만 아니라 멜로, 코미디, 사극까지 폭넓은 연기를 선보인 주윤발은 홍콩을 넘어 아시아 스타로 등극했다. 특히 <영웅본색>에서 마크 리(주윤발 분)가 위조지폐를 불태워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기부는 매니저인 아내의 뜻이었습니다.
저는 용돈을 받으면서 지내고 있어요.(웃음)
모두가 그렇듯 저 또한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어요.
그러니 돌아갈 때 빈손으로 가도 괜찮습니다.
저는 흰쌀밥 두 그릇만 있으면 됩니다”

수많은 명작을 남겼는데, 주윤발이 꼽는 자신의 대표작이 뭔지 궁금합니다.

제가 출연한 모든 작품을 사랑합니다. 그중에서도 <영웅본색>은 제게 의미가 큽니다. 방송국을 떠나 영화배우로서 첫발을 내딛게 한 작품이기 때문이죠. 영화는 드라마에 비해 짧은 호흡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의 힘이 대단한 거죠. 이 밖에 <와호장룡> <첩혈쌍웅> 또한 제게 많은 변화를 있게 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1년 동안 최대 10편에 달하는 작품에 출연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영화가 없으면 지금의 주윤발도 없었을 겁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저는 영화를 통해 지식을 쌓았습니다. 영화를 찍으면서 많은 걸 배웠고,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을 쌓았죠.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그 캐릭터의 삶을 살아보는 건 배우가 아니면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난 50년간 연기를 했는데, 앞으로 50년간 연기를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능하다면 한국에서 미용 시술을 받아서라도 사람들 앞에 서고 싶습니다.(웃음)

주윤발이 ‘따거(형님)’라는 수식을 유지하는 데는 그의 소신이 한몫한다. 주윤발은 중국 당국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 수차례 주목받은 바 있다. 2014년 홍콩 우산혁명 시위대를 지지하는가 하면,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 당시 마스크 착용을 금지한 복면금지법이 발표된 날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거리에 등장해 찬사를 받았다. 기자회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윤발은 홍콩 영화계가 침체된 현실을 언급하면서 중국 정부의 지나친 검열을 원인으로 꼽았다. 그의 말에서 강단이 느껴졌다.

호황을 이루던 시기와 달리 홍콩 영화 산업이 오랜 침체기를 겪고 있습니다. 홍콩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이 같은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1980년대 홍콩 영화를 사랑하고, 기억해주시는 분이 많았는데 검열과 제한으로 힘든 상황입니다. 현재 홍콩에서는 영화 한 편을 제작할 때 각종 부서의 승인이 필요하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홍콩의 정신이 깃든 영화를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자율성을 침해받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클 거 같습니다.

그렇죠. 그런 면에서 한국 콘텐츠가 가진 창작의 자유를 높이 삽니다. 한국 영화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발휘하는 데는 자유가 큰 몫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영화를 보면 ‘저런 이야기까지 다룰 수 있다고?’ 싶을 때가 많아요. 영화 산업이 정체되고 있는 시기에 한국의 콘텐츠가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콘텐츠 산업에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코로나19라는 예측 불허의 상황이 더해져 많은 변화가 일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극장에 가지 않는 현상은 홍콩, 한국을 넘어 전 세계가 직면한 문제입니다. OTT라는 플랫폼이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것이죠. 다시 극장이 붐빌 수 있도록 사람들의 입맛을 자극할 만한 콘텐츠가 무엇인지 찾는 게 가장 큰 숙제가 됐습니다.

“빈손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가도 괜찮다”

20대 청춘 배우였던 주윤발이 어느덧 68살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드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깊게 파인 주름도 제 일부입니다. 오히려 젊었을 때와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어요. 백발노인을 연기할 수 있다면 기꺼이 참여할 겁니다. 탄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무서울 게 없습니다.

뚜렷한 소신만큼이나 꾸준히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 늘 화제죠(주윤발은 연기 활동을 이어오면서 거액을 기부한 데 이어 전 재산으로 알려진 9,600억원을 사회에 환원할 것을 약속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엄연히 말하면 기부는 매니저인 아내의 뜻이었습니다. 저는 용돈을 받으면서 지내고 있어요.(웃음) 그래서 정확히 얼마를 기부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모두가 그렇듯 저 또한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어요. 그러니 돌아갈 때 빈손으로 가도 괜찮습니다. 저는 흰쌀밥 두 그릇만 있으면 됩니다. 아침은 잘 챙겨 먹지 않기 때문에 두 그릇이면 충분합니다.

요즘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가 궁금합니다.

마라톤에 푹 빠졌습니다. 촬영 스케줄이 없는 시기엔 마라토너로 지낼 계획이에요. 나이 들면서 건강한 취미를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어요. 그 일환으로 11월에 홍콩에서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갑자에는 배우로 살았는데, 두 번째 갑자에는 마라토너로 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웃음)

주윤발 인생의 화두는 무엇인가요?

중국의 불학(佛學)에 ‘이 순간만이 진짜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 자리에서 많은 분과 눈을 맞추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끝인 거죠. 전부 지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현재가 더 중요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를 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합니다. 지금 이 순간, 저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상황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나이가 드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깊게 파인 주름도 제 일부입니다.
오히려 젊었을 때 와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죠.
탄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흐르는 게 무섭지 않습니다”

 

 ‘아내 바보’ 주윤발과 진화련의 러브 스토리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주윤발의 옆에 그의 아내 진화련이 함께했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개막식 레드 카펫을 밟았다. 이날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한 주윤발은 “걱정 없이 연기에 매진할 수 있게 도와준 아내에게 감사하다”고 아내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연예계 대표 잉꼬부부다운 행보였다.

“마음속 여신은 아내뿐이다”

주윤발은 소문난 애처가다. 그는 1986년 10월 4살 연하인 진화련(천후이롄)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주윤발의 아내 진화련은 싱가포르 화교계 거상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이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던 데는 주윤발의 끈질긴 애정 공세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진화련에게 반한 주윤발이 1년간 연애편지를 보냈고,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던 진화련이 그의 정성에 감동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고 한다.

주윤발의 구애 끝에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혼인신고를 마치고 싱가포르에서 지인들만 초대해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혼 비용은 단돈 35달러, 소박함의 끝을 보여주는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주윤발은 결혼 이후 줄곧 아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과시해왔다. 2014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를 묻자 주윤발은 “내 마음속 여신은 오직 아내 한 사람밖에 없다. 내 눈엔 아내가 그 어떤 여배우보다 아름답다”며 “매년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아내를 위한 선물을 준비한다”고 답했다.

아내의 유산 이후…

부부의 연을 맺은 지 37년. 주윤발과 진화련은 아이를 갖지 않고 두 사람의 행복에 집중하고 있다. 그 내막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2015년 중국 매체 시나연예에 따르면 두 사람은 결혼 5년 만인 1991년 임신의 기쁨을 맞이했지만, 안타깝게 유산을 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로 인해 아내 진화련이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부부가 유산의 아픔을 잊는 데 7년이라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주윤발은 아내가 겪게 될 육체적·정서적 상처를 걱정해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윤발의 인생작 TOP 3 

홍콩 영화의 새 지평을 연 <영웅본색>1989

홍콩 영화가 ‘누아르 맛집’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작품이다. 홍콩 영화 산업의 황금기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을 정도로 아시아 전반에 거대 팬덤을 구축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 장국영과 주윤발, 적룡이 함께 출연한 영화로 “장국영을 보러 갔다가 주윤발에게 반하고 왔다”는 반응이 잇따랐다. <영웅본색>은 한때 암흑가를 주름잡는 보스였으나 손 씻고 새 삶을 시작한 ‘자호’(적룡 분), 경찰의 길을 걷는 자호의 동생 ‘아걸’(장국영 분), 자호와 함께 암흑가의 화려한 나날을 보냈으나 몰락한 채 때를 기다리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소마’(주윤발 분) 등 세 남자의 뜨거운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들의 심리가 반영된 OST는 물론 출연 배우가 착용한 트렌치코트, 성냥개비 등 작품에 소개된 소품들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

주윤발의 시대를 연 <첩혈쌍웅>, 1989

<영웅본색>으로 시작된 주윤발의 인기를 최정점으로 끌어올린 영화 <첩혈쌍웅>. 오우삼 감독이 연출하고 주윤발 등 홍콩 누아르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열연해 큰 인기를 얻은 홍콩 누아르의 대표작이다. <첩혈쌍웅>은 살인 청부업자인 ‘아쏭’(주윤발 분)이 살인 청부를 실행하다가 무고한 여가수 ‘제니’(엽천문 분)의 눈을 실명하게 만들고, 그 죄책감으로 제니의 곁을 맴돌다 결국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누아르와 로맨스의 결합물이다. 극 중 주윤발은 의리가 전부였던 남성적인 킬러의 면모와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을 절절하게 표현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스토리, 극의 몰입도를 더하는 영상과 음악, 새드 엔딩으로 인해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는 명작으로 꼽힌다.

아카데미가 인정한 영화 <와호장룡>, 2000

주윤발을 비롯해 양자경, 장쯔이가 출연한 중국, 홍콩, 미국, 대만 합작의 무협 영화로 청나라 건륭제 시기에 명검으로 이름난 청명검을 둘러싼 등장인물 간의 음모와 갈등, 배신을 그린다. 기존 무협 영화와 달리 현실적인 액션으로 허구적인 요소를 지워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당대 아시아 배우들로만 구성된 영화 가운데 북미에서 1억 3,000만 달러의 수익을 낸 최초의 영화로 기록됐다. 여기에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미술상, 음악상, 촬영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TV 드라마, 게임 등으로도 출시됐다.

기획 : 하은정 기자 | 취재 : 김태이(프리랜서) | 사진 :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조이앤시네마, 네이버 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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