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한반도 동남단 영도에 취하다…갈맷길 3-3구간
(부산=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걷기는 현대 한국인의 새 유전자(DNA)인가. 걷기 열풍은 식지 않고 있고, 전국 곳곳의 산뜻한 도보 여행길이 뚜벅이들을 행복하게 한다. 국토의 동남쪽 끝 부산에도 풍광 좋은 걷기 길이 있다. 부산 갈맷길 700리이다.
갈맷길은 9개 코스, 23구간, 278.8㎞이다. 바닷가 길, 숲길, 강변 길, 도심 길로 이어지면서 부산만의 매력과 낭만을 느끼게 한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도시 문화, 항구의 역동, 시원하게 펼쳐지는 푸른 바다, 짙은 숲, 유장한 낙동강 하구가 어우러지면서 빚는 다채로움은 부산이 아니면 맛보기 어렵다.
부산 갈맷길 700리
갈맷길은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이다. 1980년대 대중가요 '부산 갈매기'가 인기몰이를 한 뒤로 갈매기는 부산 사람을 상징하는 새가 됐다.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는 갈맷길의 동반자이다.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이기대 해안산책로를 지나 오륙도 스카이워크까지 이어지는 2-2구간, 아름다운 일몰로 유명한 다대포해수욕장 몰운대에서 동양 최대의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까지 약 8㎞를 낙동강 하구의 정취에 젖어 걸을 수 있는 4-3구간, 편백 숲이 울창한 성지곡수원지를 끼고 있는 6-3구간이 갈맷길 명소로 꼽힌다.
이 명소 반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절영해안산책로가 포함된 3-3구간이다. 이기대 길과 함께 부산 명품 길을 대표한다.
갈맷길 3-3구간은 남항대교에서 시작해 흰여울문화마을∼절영해안산책로∼중리해변∼영도해녀문화전시관∼감지해변산책로∼태종대∼동삼동패총전시관∼국립해양박물관을 거쳐 아미르 공원에서 끝난다. 길이는 약 15㎞, 5시간 정도 걸린다.
갈맷길 3-2구간에 속하는 영도대교에서부터 걸어도 좋다. 영도대교는 일제 강점기부터 부산과 영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다리 위에 서면 영도의 봉래산 정상, 자갈치 시장, 부산 북항과 남항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지하철 1호선 남포역에 내리면 영도대교가 코 앞이다.
갈맷길 3-3구간 중 감지해변산책로는 공사로 인한 통제로 접근할 수 없었다. 영도해녀문화전시관을 돌아본 뒤 버스를 타고 태종대로 이동했고 태종대에서 여정을 마쳤다.
3-3구간 후반부인 동삼동 패총 전시관과 국립해양박물관은 별도의 큰 주제를 담고 있는 장소들이다. 따로 날을 잡아 탐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영도를 알면 부산이 보인다
영도는 부산의 '여의주' 같은 곳이다. 부산 남쪽에 위치해 자연 방파제 구실을 하는 영도가 있기 때문에 부산항이 발달할 수 있었다. 영도대교를 기점으로 북쪽 항구는 북항, 남쪽은 남항이라 불린다. 컨테이너 전용 부두인 북항은 우람한 크레인이 즐비하다.
남항은 대형 선박 묘박지이다. 묘박은 배가 항만에 접안하기 전에 닻을 내리고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수십 척의 대형 선박들이 드넓은 해상에 점점이 묘박하는 모습은 해양 수도 부산의 독특한 풍광이다.
영도는 봉래산이라는 큰 산이 중심에 있는 섬으로, 섬 하나가 기초자치단체인 구를 형성한다. 인구는 16만 명 정도. 웬만한 시보다 많다. 면적은 약 14㎢.
영도는 해운대와 함께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유적인 동삼동 패총이 발견된 곳이다. 이 패총은 한국의 대표적 신석기 유적이다. 영도는 일본에서 건너온 고구마가 처음으로 재배된 곳이기도 하다.
영도의 옛 이름은 절영도였다. 육지와 가까운 영도는 말을 방목하기 좋아 예부터 국마장이 있었고 명마가 많았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천리마가 있었는데, 그 그림자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고 하여 '끊을 절(絶)' '그림자 영(影)'을 조합해 '절영도'라 명명했다. '영도'는 이를 줄인 이름이다.
영도는 임진왜란 후 무인도가 되다시피 했다. 일본의 재침이 두려워 주민들이 섬을 버리고 떠난 탓이다.
맑은 날 태종대, 절영해안산책로에 서면 일본 쓰시마(대마도)가 보인다. 영도와 쓰시마 사이 거리는 50㎞ 정도. 일제 강점기 부산과 영도는 일본의 대륙 진출 전초 기지가 됐다.
이 과정에서 영도에는 도기 산업, 근대 조선소, 제염업, 수산업 등이 발달했으며 극장, 시장, 전차, 수산시험장, 금융신탁업 등이 개설됐다.
1934년 개통된 영도대교는 한국에서 최초로 육지와 섬을 연결한 다리였다.
선박이 지나갈 때 다리 한쪽 끝이 들어 올려지는 도개교인 이 다리의 개통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6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당시 부산 인구가 16만여 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영도다리가 얼마나 이목을 끌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도다리는 한국전쟁 때도 중요한 랜드마크였다.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무작정 부산으로 향하던 피란민들은 어쩌다 헤어지게 되면 영도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미리 약속해 두었다.
영도다리는 만남의 광장이었고 주위 벽면은 헤어진 가족을 애타게 찾는 메모로 빼곡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로 시작하는 현인(1919∼2002)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는 1·4후퇴 때 헤어진 금순이를 영도다리에서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영도 출신인 현인의 노래비 겸 동상이 영도대교 끝에 세워져 있다.
지금도 속 썩이는 아이에게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말하는 부모가 더러 있다.
전쟁 때 부산과 영도는 피란민으로 들끓었고 영도다리 밑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많았다.
부산 인구는 전쟁 전 20만 명이 못 됐으나 전쟁이 터지자 부산항 주변 중구 지역만 인구가 500만 명을 넘었다.
흰여울과 숨비소리
갈맷길 3-3구간의 인기 장소인 흰여울문화마을도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형성했던 마을이다.
마을 위 봉래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눈처럼 하얗다고 해서 흰여울이라 불린 이 마을은 이제 광안리, 해운대 다음으로 관광객이 많고, 아기자기한 카페와 소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위로는 한국에서 가장 풍광이 아름다운 도로 중 하나인 절영로가 지나고, 아래로는 명품 산책길인 절영해안산책로가 나 있다. 기암괴석이 빚어낸 해안 경관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푸른 하늘과 바다를 두 눈과 가슴 가득 채우고 걸을 수 있는 길들이다.
흰여울마을에서는 '변호인' '범죄와의 전쟁' '태풍' '카운트다운' 등 여러 영화가 촬영됐다.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변호인'은 1980년대 초 가난한 흰여울마을 거주 대학생이 용공 조작 사건에 휘말려 폭행과 고문을 당하자 주인공 송우석(송강호 분)이 그를 변호하면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내용이다.
갈맷길 3-3구간에서는 절영로와 절영해안산책로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게 된다. 절영로에는 맑은 날 대마도를 관찰할 수 있는 하늘전망대, 1975년에 지어진 75광장이 탁 트인 조망과 쉼터를 선사한다.
중리해변에 있는 영도해녀문화전시관에서는 영도 해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전시관 1층은 해녀들이 직접 잡은 해산물 판매 매장이다.
영도 해녀의 기원은 제주 해녀이다. 1890년대 제주 해녀들은 처음으로 제주 섬을 벗어나 영도에서 바깥 물질을 시작했다. 영도는 국내를 벗어나 동북아시아 바다를 누볐던 출향 해녀의 첫 기착지로, 제주 해녀의 새 역사를 여는 첫 페이지였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영도에서 100년 넘게 이어지는 제주 해녀들의 도전 정신과 기개를 기리기 위해 2019년 제주 해녀 상을 전시관에 기증했다.
해녀들이 물질할 때 깊은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캐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물 밖으로 나오면서 내뿜는 휘파람 소리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바다는 내 생명이지" "욕심 버리지 않으면 물숨 먹고 죽어요" 전시관 내 글귀가 경건하다.
돌아오지 못한 영도유격대원 800여 명
태종대는 영도의 유구한 역사를 거듭 환기한다. 태종대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한다.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이곳 절경에 취해 활을 쏘며 즐긴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하나이다.
1419년 조선에 큰 가뭄이 들자 태종 임금이 이곳을 찾아 기우제를 지낸 뒤 비가 내린 데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대는 울창한 숲과 해안 침식 절벽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관광 자원이 그다지 개발되지 않았던 1960∼1970년대 태종대는 신혼여행 1번지였을 만큼 격조 높은 청정 관광지였다.
태종대는 북파 영도유격대의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영도유격대는 1950년 말 창설된 비정규부대이다. 1·4후퇴 때 북한 함경남북도, 강원도 북부에서 탈출한 청년 1천200여 명의 자진 입대로 구성됐으며 태종대 일원에서 훈련받았다.
이 중 900여 명이 북한에 침투해 철도 폭파, 후방 교란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휴전으로 900여 명 중 생환한 대원은 33명에 불과했다.
대원 대부분은 북한에 남은 가족들을 어떻게든 데리고 내려오겠다는 일념으로 입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번도 계급도 없었던 대한의 젊은 영도유격부대원들은 한 푼의 보수나 대가 또한 바람 없이 다시 못 올 결의로 떠나던 날 태종대 이 소나무 저 바위 밑에 머리카락 손톱 잘라 묻고 하늘과 바다로 적 후방에 침투하여 ∼" 산책로 옆에 세워진 추모비 글의 일부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1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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