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링머신' 신유청 연출 "천재가 아닌 인간 튜링 만나는 이야기"
올해 연출한 작품만 5편 이상…"어떤 환경이든 창작 가능한 연출 되고파"
(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앨런 튜링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천재 수학자나 컴퓨터 과학자는 '튜링머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튜링이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은 뛰어난 직관으로 나치 독일군의 암호 체계를 해독한 인물이다. 컴퓨터가 상용화하기 전부터 인공지능의 출현을 예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극 '튜링머신'이 그리는 앨런 튜링은 '천재 수학자'라는 수식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자신이 앞서 했던 말을 잊고 거짓말을 들키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가 하면, 애인 아놀드의 도둑질을 모르는 체 넘어가기도 한다.
또한 튜링은 솔직한 면모로 주변 인물들에게 작은 변화를 끌어낸다. '기계도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튜링의 주장은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는 토론으로 이어진다. 아놀드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튜링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신유청 연출은 튜링의 인간적인 면모에서 작품의 매력을 발견했다. 단순히 천재의 이야기로 작품을 풀어낸다면 그의 삶을 전부 담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지난 16일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만난 신 연출은 "천재라고 하면 남들보다 높은 곳에 있는 인물을 생각하지만, 튜링은 누구보다 자신을 낮춘 사람"이라며 "튜링을 거리감이 느껴지는 천재가 아니라 주변에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품은 집에 도둑이 들었다며 경찰을 부른 튜링이 조사관 미카엘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과정을 그린다. 튜링을 러시아의 스파이로 의심하던 미카엘은 튜링의 진솔한 내면을 듣고 난 뒤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튜링의 진솔하고 따뜻한 면모는 인간다움의 조건을 질문하는 작품의 주제와도 이어진다. 신 연출은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튜링의 모습이 울림을 줬다고 했다.
그는 "튜링은 자신을 적대시하는 마음을 가진 인물까지도 친구로 만드는 진짜 영웅"이라며 "튜링은 사람들이 가진 차이가 존중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천재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 연출과 제작진은 관객이 튜링의 다층적인 면모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무대 사방에 객석을 배치했다. 각본을 쓴 브누아 솔레스는 2018년 작품을 초연할 당시 객석과 무대가 마주 보는 일반적 극장에서 공연했지만, 신 연출은 튜링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려면 지금의 형태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 작품은 관객이 튜링의 흔적을 만나는 연극"이라며 "관객이 튜링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나 전시실에 들어온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관객은 튜링이 살았던 공간부터 그가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던 라디오 공장까지 전시를 보듯 감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튜링을 연기하는 배우 고상호는 관객과 가까이 있다는 점을 활용해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등 적극적으로 소통하기도 한다. 자칫 극의 흐름을 깰 수 있는 요소지만 배우의 자연스러운 연기로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
그는 "관객과 배우가 가까이 위치한다고 관객을 의도적으로 극에 참여시킬 필요는 없다"며 "배우들이 공간에 익숙해지면 억지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 연출은 올해 '세일즈맨의 죽음', '테베랜드', '더 웨일' 등을 연출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튜링머신'이 폐막한 뒤에도 다음 달 '와이프'를 무대에 올린다.
그는 "전쟁터를 다니는 느낌"이라며 "몸이 너무 고되게 작업해 막판에 좀 힘이 들지만 모든 작품이 만족스럽다"고 돌아봤다.
중극장과 소극장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연차의 배우들과 작품을 올린 것이 본인에게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든 창작 활동이 가능한 연출가가 되는 것이 목표다.
"다양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스스로를 다지고 싶었어요. 좋은 환경에서도 가난했던 경험을 잊지 않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배우와 일하든 창작할 수 있는 연출이 되고 싶습니다."
'튜링머신'은 오는 25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된다.
cj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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