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헛되지 않았다" 北에 손배소 5년 만에 빛 본 북송 재일동포
(도쿄=연합뉴스) 경수현 특파원 = "20년 전 탈북할 때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했다. 이제 목표가 눈앞에 들어와 헛되지 않다."
지난 2003년 탈북한 재일동포 2세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栄子·81)씨에게 최근 소송 결과에 대한 감회를 묻자 긴 얘기가 쏟아져나왔다.
소송은 가와사키 씨가 다른 북송 피해자 4명과 함께 "지상낙원이라는 데 속아 (북한으로) 가서 인권을 억압당했다"며 2018년 8월 도쿄지방재판소(지방법원)에 북한을 상대로 총 5억엔(약 50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제기한 것이다.
원고들은 1960∼1970년대 북한에 갔다가 2000년대 탈북한 재일 조선인들이다.
애초 1심 법원은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북송 사업과 관련한 북한의 행위를 '이주 권유'와 '북한 내 억류'로 나눠 판단했다.
그러면서 북한에서 발생한 억류와 관련한 재판 관할권은 일본에 없고 이주 권유로 발생한 재판 관할권은 일본에 있지만, 제소 시점에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20년의 제척기간이 지났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하지만 지난달 30일 판결한 고등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다니구치 소노에 도쿄고등재판소 재판장은 "북한 행위는 전체를 하나의 계속된 불법행위로 봐야 하며 이 일체의 불법 행위로 발생한 침해의 관할권은 일본 재판소에 있다"면서 이 소송을 1심 법원인 도쿄지방재판소에 돌려보냈다.
가와사키 씨 변호인단은 1심에서도 원고들 피해는 인정됐고 소송 상대인 북한은 아예 재판에 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소송 쟁점인 재판 관할권 문제가 결론 난 만큼 이번 파기 환송으로 이르면 연내, 늦어도 내년 상반기 중에는 최종 승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
가와사키 씨가 "올해 안에도 결론이 날 수 있다"며 승소가 눈앞에 있다고 보는 이유다.
그는 "이번에 이 정도의 성과를 볼 것으로는 예상 못 했다"며 "북한을 정면으로 친 것이다. 속이 시원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걸렸다"고도 했다. 원고들 모두 연로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원래 소송에 참여한 5명 중 1명은 이미 사망했고 2명은 병에 걸려 이제는 재판을 챙길 수 없는 상황이다. 건강한 상태 원고는 자신을 포함해 2명뿐이라고 한다.
승소하면 일본 내 북한 재산을 찾아 압류, 매각해 현금화하는 방안을 강구할 생각이다.
한국 대법원에서 승소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전 신일철주금)이나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추진한 방식이다.
원고들은 북한적십자회와 일본적십자사 간의 협정을 토대로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이뤄진 재일동포 북송사업으로 북한에 간 인원 중 극히 일부다.
이 사업에 의한 북송 인원은 무려 9만3천340명으로 여기에는 일본인 처와 일본 국적 자녀 8천여명도 포함돼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들 대부분은 북한을 지상천국처럼 소개하고 교육과 주택도 무상 제공된다는 조총련 선전에 넘어갔다.
조총련 계열 조선학교에 다닌 가와사키 씨도 이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고3 때인 1960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의 대학에 진학해 꿈을 펼쳐나갈 꿈에 부풀어 북송선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배가 북한 청진항에 도착하자마자 북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동안 조총련이 알려준 '지상낙원'과는 먼 현실을 봤다. 오히려 북한에 간 재일동포들은 감시와 차별을 받으며 현지 주민들보다도 더 처참한 생활을 견뎌야 했다고 한다. 지난 8일 가와사키씨가 대표를 맡고 있는 북송 피해자 지원 단체 '모두 모이자' 도쿄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탈북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
-- 귀화하기 전 원래 한글 이름이 있었나.
▲ 그 이름으로 산 인생이 지긋지긋해 떠올리기도 싫다.
-- 고등법원 재판 결과에 대한 감회는.
▲ 이번에 이런 정도까지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지 못했다. 3심까지 가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뜻밖에 우리 의견을 모두 반영해줬다. (그가 보여준 판결문의 법원 판단 내용에는 "인생을 빼앗겼다"는 표현도 들어있다.)
-- 탈북은 언제 했나.
▲ 2003년이다. 60살도 넘어서 탈북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세상에 이 문제를 알려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 북에 가족은 있나.
▲ 아들 하나, 딸 넷을 두었고 막내딸은 다행히 탈북해 일본에서 살고 있다. 손자까지 포함하면 북에 가족이 12명 있다.
-- 연락은 되나.
▲ 2019년 11월까지는 간신히 됐다. 하지만 그 뒤 연락이 끊겼다. 밤에는 북한의 현실이 떠올라 잠도 못 잔다. 아침이 밝아질 때쯤 잠이 들곤 한다.
-- 이런 활동을 하면서 북한 보복이 두렵지 않나.
▲ 얼굴을 드러내놓고 활동하면 북한이 국제사회의 눈 때문에 오히려 제 가족한테 보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나섰다.
-- 탈북 재일동포는 몇 명 정도 있나.
▲ 40명 정도다. 그들의 탈북 가족까지 합치면 200명 정도다.
-- 이번 소송 원고 이외 다른 분들에게는 소송 참여를 권유했나.
▲ 물론이다. 그러나 보복당할까 봐 참여하지 못하는 거다.
-- 탈북 이후 언제 일본에 들어왔나.
▲ 중국을 거쳐 2004년에 일본에 입국했다. 당시 입국하고서 사흘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43년간의 북한 생활 기간 양친은 전혀 못 봤나.
▲ 어머니는 재일동포 방문단으로 4차례 북한에 왔고 아버지도 한번 온 적이 있다. 아버지는 딸의 모습을 보고 분노해 그 뒤 북한 및 조총련에 발을 끊었다.
-- 일본에 돌아와서는 어떻게 생활했나.
▲ 2년간은 고향인 교토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당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북한에서 직접 겪고 들은 북송 피해자들 얘기를 소설 형식의 글로 정리했다. (이 책은 2007년 일본에서 발간됐고 한국에서도 2021년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 언제 도쿄로 이사했나.
▲ 2006년이다. 그때부터 8년가량 도쿄출입국재류관리국 간부 출신인 사카나카 히데노리 씨가 세운 탈북 북송 피해자 지원 단체에서 활동했다. 사카나카 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북송 사업이 잘못됐다고 문제를 제기해온 분이다. 퇴직금을 넣어서 단체를 세우고 운영했다. 현재 알려진 북송 인원도 공식 통계라기보다는 이분이 출입국관리 업무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집계한 것이다.
--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모두 모이자는 어떤 단체인가.
▲ 당시 사카나카 씨와 함께 단체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피해자가 직접 단체를 만들고 활동해야 한다고 권유해 2014년 11월 결성했다. 탈북자도, 재일동포도, 일본 사람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회원으로 함께 하고 있다. 일본인이 3분의 2정도 된다.
-- 어떤 활동을 하나.
▲ 매달 10일께 조총련 건물 앞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회를 열고 북송사업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촉구해왔다. 첫 북송선이 출항한 날인 12월 14일께는 니가타항에서 희생자 추모식도 연다.
-- 문제를 알리는 활동 이외에 법적인 대응은 이번이 처음인가.
▲ 2015년 일본변호사연합회에 인권구제 신청을 냈다. 북한과 함께 일본 정부와 조총련, 일본적십자사, 북한적십자회, 국제적십자사 등 6곳을 상대방으로 한 신청이다.(재일동포 북송 사업은 형식적으로는 북한적십자회와 일본적십자사가 맺은 협정을 기반으로 이뤄졌다. 협정이 맺어진 1959년 당시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이끈 일본 정부도 동조했다. 이 신청에 의한 구제는 법적인 강제권은 없지만 조사 후 인권침해가 인정되면 변호사회가 상대방에 대해 경고, 권고 등 조치를 취한다.) 한국의 변호사단체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도 북송사업의 피해자에 대한 인권 구제나 조사를 요청하는 협력 요청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 그런 활동도 성과를 내고 있나.
▲ 올해 9월 진실화해위가 조사 개시를 결정해줬다.
-- 국제기구를 상대로 한 활동도 해 온 것으로 아는데.
▲ 2018년에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했다.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 앞으로 계획은.
▲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이번 소송이 끝나면 조총련을 상대로도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이번 사례를 보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탈북자들에 의한 소송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ev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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