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조폭 두목의 살인…3억 5천만 원 맡기고 ‘4년 감형’ [형사공탁 1년]①

이형관 2023. 11. 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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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공탁'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해 법원에 돈을 맡기는 제도입니다. 과거에는 공탁서에 피해자의 이름·주소·주민번호를 반드시 적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형사공탁 특례'가 신설되면서, 피해자 인적사항 대신 사건번호 등만 적으면 공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절차는 간단해졌지만, 정작 피해자들은 새 제도가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KBS는 형사공탁 특례 시행 1년을 앞두고, 관련 판결문 988건을 분석했습니다. 다섯 차례에 걸쳐 형사공탁 악용 실태와 개선 방향을 연속 보도합니다.
1. [형사공탁 1년①]전직 조폭 두목의 살인…3억 5천만 원 맡기고 '4년 감형'
2. [형사공탁 1년②]연예인 출신 대표님의 '기습공탁'…"돈 대신 엄벌을"
3. [형사공탁 1년③]초등학생 성매매 6명, 누구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4. [형사공탁 1년④]판결 988건 최초 분석…절반 이…


19년 전인 2004년 8월, 경남 경찰이 밀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최대 폭력 조직을 일망타진했다. 6개월에 걸친 기획수사 성과였다.

2004년 당시 경찰에 검거된 ‘신동방파’ 조직원들의 모습.


이름은 '신동방파', 부산과 밀양 지역 폭력배들이 모여 만든 범죄 단체였다. 이들은 농촌 마을에 도박장을 개설하고 농민들을 감금·폭행하며 갈취했다. 유흥업소 보호비 착취와 필로폰 판매, 불법 채권 추심도 서슴지 않았다.

신동방파 두목 자리까지 오른 최 모 씨는 경찰의 관리대상이었다.

당시 경찰은 조직원 36명을 검거하고 18명을 구속했는데, 이 가운데 행동대장 최 모 씨도 있었다. 복싱을 잘한다는 이유로 조직에 새로 영입된 인물이다. 사건 이후 최 씨는 두목 자리에 올랐고, 경찰은 그를 특별관리대상으로 정했다.

경남경찰청 관계자

"2004년 검거 당시 최 씨는 20대 초반으로 수괴급 행동대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신동방파 두목이 됐는데, 저희도 꽤 오랫동안 최 씨를 특별 관리대상으로 지정해 관리했죠."

■ 전직 조폭 두목이 '사람을 죽였다'
지난해 4월 밀양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관련 KBS 뉴스.


그리고 18년이 흐른 지난해 4월, 밀양에서 살인사건 기사가 한 건 보도된다. 50대 남성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지인을 흉기로 숨지게 해 구속됐다는 짧은 소식이었다.

피의자는 그동안 소식이 끊겼던 전 신동방파 두목 최 모 씨.

‘말대꾸했다’는 사소한 이유로 피해자 얼굴을 여러 차례 때렸고, 목탁이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피해자의 머리를 내려쳤다. 피해자가 도망가자 최 씨는 식탁 위 흉기를 손에 쥐고 뒤따라가, “너는 죽어야겠다”고 말하며 찔렀다. (※사건 판결문, 경찰 수사결과 중 발췌)

사건 당시 피해자가 입은 옷. 흉기에 찔린 자국이 곳곳에 남아있다.


당시 피해자의 나이는 48살, 최 씨는 평범한 한 가장을 살해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피해자 목과 등, 어깨에서 흉기에 찔린 상처가 발견됐다. 가슴 상처 깊이는 12cm에 달했다. 반복적인 폭행부터 흉기로 찌른 부위까지 검찰은 최 씨에게 살인의 고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 "꼼수 또꼼수"

창원지방법원 밀양지원


1심 재판이 진행됐다. 최 씨 측 변호인으로 전관 변호사가 나왔다. 재판이 열린 창원지법 밀양지원 지원장 출신이다.

변호인은 재판 과정에서 피고인 최 씨가 '각별히 아낀' 동생을 떠나보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죄책감으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피고인 최 씨가 재판부에 제출한 반성문 내용 일부.


그러면서 최 씨는 살인의 고의가 없었고, 자신에게 정신 장애가 있는 데다, 범행 당시 술에 취해있었다고 주장했다. 범행 사실을 인정하고 또 반성하지만, 피고인에게 유리한 요소를 빼놓지 않은 것이다.

피해 유족은 용서할 수 없었다. 최 씨 측의 뻔뻔한 태도 때문이다. 최 씨는 평소에도 피해자의 가족이 보는 앞에서 피해자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10년 전에는 피해자를 폭행해 병원에 입원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유족은 또 최 씨가 경찰에 "피해자가 자해했다"며 사건을 조작하려 했고, 그 자리에 있던 지인 2명에게 거짓 진술까지 강요했다고 말한다.

피해 유족

"살해 후에 가족에게까지 '피해자가 자해했다'고 말했습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반성이란 말을 입에 담습니까."

검찰은 형을 줄이려는 '꼼수'라고 봤다. 진지한 반성과 우발적 범행, 그리고 심신미약을 노린 거다. 검찰은 죄질이 불량하다며, 최 씨에게 징역 30년을 구형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 최 씨에게 검찰 구형량의 절반 수준인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검찰 구형량의 절반 수준인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잔혹한 범죄에 법정 최고형을 기대했던 피해 유족은 30년이라는 검찰 구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1심 재판부의 판단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검찰은 최 씨의 죄가 가볍다며 양형 부당을 이유로 항소했다. 피고인은 검찰보다 먼저 항소했는데, 1심 판결 바로 다음 날이었다.

■ 공탁금 3억 5천만 원에 '4년 감형'

부산고등법원 창원재판부


항소심이 진행됐다. 피고인 최 씨 측에 처음 보는 변호사들이 나왔다. 항소심 재판이 열리는 곳의 법원장을 지낸 또 다른 ‘전관 변호사’였다.

피해 유족 측은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엄벌 의사를 알렸다. 1심부터 항소심까지 모두 11차례에 걸쳐 제출한 탄원서만 80여 건이다. 최 씨가 전과 30범에 폭력 전과만 20회라는 점도 강조했다.

피해 유족이 제출한 수많은 엄벌 탄원서 가운데 하나. 82살 피해자 노모가 직접 손으로 썼다.


마침내 항소심 선고 당일. 피해 유족은 떨리는 심정으로 선고 결과를 기다렸다.

최 씨에게 엄벌이 내려지리라는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재판부는 오히려 형을 4년 더 줄여, 최 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다.

유족에게 놀라운 일이 하나 더 있었는데, 최 씨가 피해 유족 앞으로 낸 ‘형사공탁금’ 3억 5천만 원이 양형상 유리한 정상으로 적용됐다는 점이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 이유


피해 유족은 항소심 선고 당일에 최 씨의 형사 공탁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최 씨에 대한 양형에는 유족의 엄벌 탄원보다는 최 씨가 법원에 낸 돈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였다.

피해 유족

"판사가 판결문을 길게 읽었어요. 저희 쪽 주장이 다 인정됐어요. 그런데 갑자기 '형사공탁'이라며 3억 5천만 원을 말하더군요. 정체도 모르는 돈이었어요. 그리고는 4년을 깎았죠. 억장이 무너져내렸어요."

■ 신종 감형의 기술, '형사공탁'

형사공탁. 합의에 실패한 피고인이 피해자를 위해 일정 금액을 맡길 수 있는 사법 절차다. 법원은 피고인의 형사공탁을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으로 보고 형량을 깎아준다.
형사공탁 접수 서류. 지난해 공탁법 개정으로 ‘피공탁자 인적사항’ 기재란이 빠졌다.


과거에는 피고인이 일방적으로 형사공탁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형사공탁을 하려면 피해자의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 등 인적 사항을 알아야 했다. 피고인은 개인 정보를 얻기 위해 피해자로부터 최소한의 동의나 용서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공탁법이 개정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피해자 인적 사항을 몰라도 공탁할 수 있다. 피해자가 원하든 원치 않든, 피고인이 선고 전 법원에 언제든 돈만 내고 감형받을 이유로 제시할 수 있게 됐다.

최 씨가 법원에 맡긴 3억 5천만 원도 그런 돈이었다. 그는 유족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던지다시피’ 공탁금을 법원에 맡겼다. 결국 최 씨는 자기 죄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고도 4년을 감형받게 됐다.

단 하루라도 형량이 깎이는 걸 막기 위해 지난 1년을 노력했던 피해 유족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최 씨가 형사공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용서해준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김슬아/변호사(법무법인 영민)·새로운 미래를 위한 청년변호사 모임

"과거에 형사공탁을 하려는 가해자들이 피해자 개인정보를 불법 수집하는 등 2차 가해 사례가 발생했습니다. 공탁법 개정 배경이죠."

"하지만 이로 인해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일방적인 공탁이 가능해졌고, 가해자의 감형 수단으로 새로운 제도가 악용되는 부작용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피해자를 위해 바뀐 제도가 오히려 피해자를 힘들게 하는 거죠."

■ 법정 밖으로 끌려나간 유족들…"누가 용서를 하나"

“사람 목숨값이 3억 5천만 원입니까! 내가 4억 줄게! 판사, 네 목숨이나 내놓아라!”

항소심 선고 당일, 피해 유족은 법정에서 절규했다.

피해자가 용서하지도 않는데, 법원이 왜 용서한 듯 형을 깎아주는 것인가. 대체 누가 누굴 용서한단 말인가. 유족들은 법정 바닥에 쓰러지며 소리치다 법원 관계자들에게 제지당해 온몸이 들린 채 법정 밖으로 끌려나갔다.

피해자가 아내가 함께 운영하던 카페. 지금은 문을 닫았다.


현재 피해 유족들은 사건과 재판 결과에 대한 충격으로 피폐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행복할 날을 꿈꾸며 피해자와 함께 운영했던 작은 카페는 문을 닫아 폐허가 됐다. 둘째 딸은 다니던 대학교를 한 학기만 남겨두고 관뒀다.

교도소에 수감된 최 씨는 항소심 선고 일주일 뒤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피해 유족이 대검찰청에 진정을 넣자 돌연 상고를 취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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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관 기자 (parol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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