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걸어 나와.” [새로 나온 책]

시사IN 편집국 2023. 11. 17.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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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기자들이 직접 선정한 이 주의 신간. 출판사 보도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기자들이 꽂힌 한 문장.

페이지보이

엘리엇 페이지 지음, 송섬별 옮김, 반비 펴냄

“내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느꼈다.”

2014년 자신이 퀴어임을 밝히고 2020년에는 트랜스젠더로 새 삶을 출발한 배우 엘리엇 페이지의 자서전이다. 29장에 걸친 에세이 끝에 그는 이렇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이 세상에 제가 존재할 자리를 내어준 모두에게, 글쎄요, 제가 얼마나 큰 행운을 누린다는 기분이 드는지 차마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어요.” 번역가의 세심한 고민 덕분에 책이 더 부드럽게 읽힌다. 무엇보다 책의 만듦새가 독특한데, 문을 열 듯 양쪽으로 펼쳐야 한다. 마치 커밍아웃(벽장 밖을 나온다는 의미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는 일)을 은유하는 것 같다. 책의 ‘문’ 안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눈을 감고 걸어 나와.”

하나의 경우

이동은 지음, 정이용 그림, 우리나비 펴냄

“사는 게 너무 지긋지긋하지 않아? 그래서 정 떨어져서 다 포기하고 외면하는 그 순간, 삶이 딱 예쁜 거 하나 내미는 거야.”

폭력이 사랑이라는 가면을 쓸 때 삶은 지옥이 된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진 폭력일수록 주변의 조력을 구하기 어렵다. 그 지옥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길은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을 때가 많다. ‘하나’는 그렇게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의도치 않게 하나에게 벌어진 일을 목격하게 된 ‘경우’는 연민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사랑은 ‘밥’ 먹여주지 않고, 마음은 생활을 초과하지 못한다. 경우가 떠난 자리 뒤에 마침내 홀로 남겨진 하나는 자신에게 ‘작은 자유’를 허락할 수 있을까. 〈환절기〉 〈당신의 부탁〉 〈니나 내나〉 등을 같이 쓰고 그렸던 이동은‧정이용 작가가 오랜만에 들고 온 이야기가 남긴 질문이 꽤 묵직하다.

이지 뷰티

클로이 쿠퍼 존스 지음, 안진이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내가 가장 치유받고 싶은 부분은 몸이 아니다.”

철학 교수이자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선천성 희귀질환을 겪고 있다. 천골무형성증이라는 병 탓에 척추와 골반을 연결하는 뼈가 없다. 저자는 책에서, 그가 겪은 배제의 일화들을 풀어낸다. 사람들은 그의 걸음걸이와 키에 주목했고, 선의로 포장해 의심스러운 치료법을 강권하는 이도 있었다. 장애 여성에게 여성성을 연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에게 성적 매력이 있다고 느낄 때 새삼 충격을 받는 남자들이 있었다. 임신한 뒤 찾아간 산부인과 의사는 “이게 도덕적으로 맞는지 고민해보셨나요?”라고 물었다. 쉽고 친절하게 쓰인 책은 아니다. 오래 눌러 담아온 감정이 폭발하는 대목이 많다. 날것 그대로의 인생을 드러내는 처연한 책이다.

이강국의 경제 EXIT

이강국 지음, 책세상 펴냄

“정부가 빚을 져야 국민이 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부터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경기부양 대책으로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을 민간에 배포했다. ‘경제학의 상식’으로 볼 땐 당연히 초인플레이션이 예상되었지만, 정작 물가는 10여 년 넘게 바닥을 기다가 지난해 초 비로소 급등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상식적 경제학으론 이 같은 현상을 왜 예측도 설명도 하지 못했는가. 이와 관련된 경제학의 새로운 동향을 맛보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가 쓴 이 책을 추천한다. 인플레이션, 금리인상과 물가의 관계, 빅테크 기업의 독점, 다른 나라들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일본의 재정정책과 자본주의, 국가채무와 가계채무의 관계 등 경제적 난제들에 대해 최근의 이론적 동향을 기반으로 간결하고 쉬운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유럽사 1~3

존 코넬리 지음, 허승철 옮김, 책과함께 펴냄

“반제국 투쟁은 민족문화를 살아남게 했지만, 배타적 이념도 촉진했다.”

‘보스니아 전쟁’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너무 많은 민족(그 개념 자체가 한국과 다른 듯했다)과 이해할 수 없는 갈등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스스로의 문해력을 한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동유럽은 1, 2차 세계대전 등 “20세기 지구상 가장 많은 사건이 발생”한 데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역인데도 말이다. 이 책은 19세기 중반부터 오늘날 유럽의 일원이 되기까지 동유럽 역사를 간추려 해설한다. 동유럽 국가들의 개별 역사를 일일이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 지역에 존재했던 ‘제국’이 그 내부 여러 민족들의 독립투쟁으로 쇠퇴하면서 지금의 15개국 이상 민족국가들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탐색한다. 이 책을 읽다 보니, 효율적 취재를 위해 ‘보스니아라 불리는 곳’으로 정보를 제한하려 했던 과거의 시도가 터무니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세지옥

최지수 지음, 세종서적 펴냄

“우리가 열심히 살아온 모든 시간과 계획과 생각 대부분이 ‘전세 사기’ 네 글자에 잠식당했다.”

신호를 놓치는 사소한 일로도 스스로를 책망했다. 모든 문제가 나의 부주의함과 무지함 때문인 것 같았다. 2020년 7월 생애 처음으로 얻은 전셋집이 1년 만에 경매에 넘어갔다. 사회 초년생이던 저자는 일상이 무너지고 꿈을 유예한다.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을까.” 2년 넘게 시청과 법원, 경찰서, 주거복지재단을 쫓아다니며 드는 질문이 있다. 50년간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해온 전세 제도가 왜 이렇게 허술한가. 왜 가해자들은 죗값대로 처벌받지 않는가. 피해자 대부분이 2030 세대인 이 사회적 재난은 충분히 ‘분석’되지 못했다. 피해자들과 연대하며 ‘어떻게든 살아남자’고 말하는 한 청년의 고발문이자 투쟁 기록이다.

시사IN 편집국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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